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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21화 (21/100)

21화

성조를 따라 걷던 단이가 미심쩍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인적이 드물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았다.

‘이 한량 나리, 또 나를 골탕 먹이려 하시는 거 아니야?’훈련원은커녕 사람 하나 보이지 않으니, 이쯤 되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성조가 생글 웃는 낯으로 단이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받고 싶은 선물은 생각해 보았느냐?”

“선물이요?”

“뇌물 말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단이가 다시 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안 받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나리께 뇌물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이유를 만들어주지. 지난번 내게 차를 내어주었으니, 그 답례로 선물을 주마.”

“그럼 지금 데려다주시는 걸 그때의 답례라 생각하겠습니다.”

“어찌 그리 고민도 안 하고 말하느냐? 그럼 내가 상처받는다니까.”

“상처 안 받으실 거 다 압니다.”

“허어, 눈치 하난 빠르구나.”

“이래 봬도 장사치였습니다, 제가.”

그 말에 성조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결에게는 살랑살랑 눈웃음을 그리며 어여쁘게 말하더니.

제 앞에서는 쌈닭이라도 삶아 먹은 양 한마디도 지지 않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한다.

다른 양반이었다면 무엄하다며 당장 호통을 쳤겠지만…….

‘조그만 게 차만 잘 우리는 줄 알았더니, 말재간까지 좋군.’성조는 오히려 그런 단이와 대화하는 것이 즐겁기만 하였다.

다섯 살 난 귀여운 꼬마를 대하는 것 같달까.

놀리면 놀리는 대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니, 그것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이 아이라면 종일 함께 있어도 재밌으리라.

“그 다점, 안 망하고 있던 게 참 용하구나.”

그런 성조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단이는 그저 짓궂은 나리라 생각할 뿐이었다.

상대하다 보면 자꾸 말리는 기분이라. 단이는 아예 대꾸도 않고 부러 앞만 보며 걸었다.

그런데 물끄러미 그녀를 보던 성조가 문득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넌 어찌 그리 청산유수 말을 잘 하느냐? 따박따박, 또박또박.”

“…….”

“북방에서 왔다는 이가 말씨는 또 한양 말씨고…….”

순간 단이의 가슴이 철렁하였다.

‘설마…… 눈치챘나?’그러잖아도 아침에 여진족 노비를 보고 심란했던 차라.

뜬금없는 말 칭찬에 갑자기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게다가 성조의 눈동자는 속까지 꿰뚫어보듯 집요하였다.

실없는 양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진지한 표정.

“다동 너, 설마…….”

단이의 심장이 튀어나올 듯 콩닥콩닥 뛰어댔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모른 척해달라고 빌어야 하나.

온갖 생각이 뒤죽박죽 엉키던 그때.

“북방에 있을 때 전기수(傳奇?)라도 했던 게냐?”

“……예?”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내가 사실 어딜 가든 말로는 지지 않는 사람이거든. 한데 이상하게 네게는 좀 밀리는 것 같단 말이지.”

“…….”

“말해 보아라. 어찌 그리 말을 잘 하는 게냐? 혹 유명한 전기수에게 화법이라도 배운 게야? 아니면 정말로 네가 전기수?!”

이야…….

이 종잡을 수 없는 양반…….

세상 심각한 얼굴로 캐묻는 성조를 보며 단이는 그만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여진족임을 들켰을까 봐 긴장을 했던 게 창피할 정도였다.

단이는 맥 빠진 목소리로 답하였다.

“예. 뭐, 그냥.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께서 책을 종종 구해다 주셔서 심심할 때마다 읽었습니다.”

거짓은 아니었다.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낡은 조선 책들을 왕 노인이 가져오면, 책 끈이 떨어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곤 했으니까.

거기에 왕 노인 또한 조선어에 능했던지라.

그는 때때로 함께 읽으며 억양까지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조선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었으니, 그녀의 비결은 가히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옳거니. 그곳에도 그럴싸한 서책방이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지요.”

“네가 살던 곳은 어떤 곳이었는지 심히 궁금하군 그래.”

“궁금해하실 것도 없이, 그저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조용했겠지. 이곳보다는.”

옆얼굴에 닿아오는 시선이 의미심장하였으나, 단이는 앞만 보느라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예. 차 끓이기 참 좋은 곳이었습니다.”

다시 앞을 본 성조는 입가를 길게 늘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기분이다. 내 언제 한번 은아암으로 널 초대하마.”

“그곳이 어디입니까?”

“내가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 나의 다옥이다. 아무 곳에서나 쉬이 볼 수 없는 차제구와 찻잎들로 가득 채워져 있지.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차밭이 바로 나의 은아암이니라.”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차밭!

그 말이 단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꼭 놀러오너라. 분명 네가 좋아할 것이다.”

“……서결 나리께서 가신다면, 저 또한 가게 되겠지요.”

단이는 부러 별 흥미 없다는 듯 새침하게 답하였다.

그러면서도 은아암에 대한 이야기가 더 궁금한지, 눈동자는 힐긋 힐긋 이쪽을 향했다.

‘못 숨기긴.’성조는 그런 단이가 귀엽게 느껴졌다.

마침 길가에 일찍이 꽃망울을 틔운 분홍빛 들꽃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초봄의 응달 속에서 용케 얼굴을 내민 것이 퍽 어여쁜지라.

허리를 숙여 들꽃을 쥔 성조가 그것을 단이의 귓등에 꽂아주었다.

능숙하게 귓바퀴를 훑고 지나가는 손길에 여린 솜털이 일었다.

커다란 눈이 옅게 일렁이며 성조에게 향했다.

잘 어울렸다.

어여쁜 것에 어여쁜 것이 얹어져서.

성조는 그 말간 얼굴을 눈에 담으며 미소 지었다.

“조그맣게 생긴 게, 꼭 다동 널 닮았구나.”

그랬더니 어김없이 양 눈가가 불퉁해졌다.

“지금 절 놀리시는 겁니까?”

“조그만 걸 조그만 거라 하지, 그럼 큰 거라 말하랴?”

“저 그렇게 안 작습니다.”

“넌 그렇게 작다.”

푸스스 웃는 성조에 단이의 눈매가 더욱 세모꼴이 되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절 다동이라 부르실 겁니까? 전 엄연히 다비란 말입니다.”

“성급해하지 말거라. 때가 되면 다 크는 법이니라.”

아무리 말해도 도돌이표다.

필시 저를 약 올리려는 심산이리라.

단이가 흥,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돌린 찰나.

앞으로 향하던 그녀의 발이 자리에 멈춰 섰다.

“……서결 나리.”

저만치 먼 곳에 결이 서 있었다.

오래 뛰어다닌 모양인지 그의 넓은 어깨가 얕게 들썩이고 있었다.

깊이 생각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내내 자신을 찾아다녔다는 사실을.

“나리. 저, 그것이…….”

무어라 말해야 될까.

모르는 여인이 도움을 청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나는 줄 모르고 함께 다녔다? 아니면 시전에서 길을 잃어 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에겐 전부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다.

어떤 것도 차를 올려야 할 다시(茶時)에 소다옥을 벗어난 것에 대한 정당한 사유는 될 수 없었다.

결국 변명 대신 사죄를 하려던 그때.

“송구…….”

“내가 데리고 있었네.”

단이가 놀란 얼굴로 성조를 보았다.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한성댁네 국밥이나 한 그릇 할까 해서 나온 길이었네. 한데 자네 다동이 바람 쐬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는지, 시전 한복판에서 쩔쩔매고 있지 않은가. 해서 훈련원으로 데려다줄 겸 바람이나 쐴까 하여 걷는 중이었지.”

“이쪽은 훈련원 가는 방향이 아닌데.”

“이왕 바람 쐴 거 빙 둘러 가면 좋잖은가.”

역시 지름길이 아니라 더 돌아가는 길이었어!

단이는 원망스럽게 성조를 보았다가 다시 결의 눈치를 살폈다.

성조의 말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를 마주쳤을 땐 이미 행다할 시간을 훌쩍 넘긴 뒤였다.

결과적으론 성조 때문이 아닌 제 잘못이 맞았다.

하지만 성조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는 듯, 단이를 향해 몰래 콧잔등을 찡긋해 보였다.

그 모습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두 손만 꼭 맞잡았다.

“혹 그 사이 차 마실 시간이 지났는가? 아이쿠,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성조는 과장되게 미안한 표정을 꾸미며, 다음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단 덧없는 약조까지 덧붙였다.

결이 이윽고 뭉친 숨을 길게 내뱉었다.

무언가를 참는 듯도 하였고, 혹은 안도의 한숨 같기도 하였다.

숨을 고른 그가 전보다 가라앉은 눈으로 단이를 보았다.

“……아무 일 없었으면 되었다.”

그러곤 먼저 등을 돌렸다.

급하게 단이를 찾은 것치고는 너무도 쉽게 돌리는 발길이었다.

많이 화나신 걸까.

단이가 안절부절못하자, 성조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괘념치 말고 얼른 따라가. 다음부턴 이런 일 없게 조심하고.”

“……감사했습니다.”

성조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인 단이가 얼른 결의 뒤를 따라갔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성조는 곧 시원섭섭한 숨을 내쉬며 왔던 길을 홀로 되돌아갔다.

***

길을 걷는 내내 단이의 시선이 결의 옆얼굴을 콕콕 찔러왔다.

송구하다는 사죄에 괜찮다 말해주었는데도 내내 저 상태였다.

필시 제 눈치를 살피는 것일 터.

이대로 놔두면 훈련원에서는 물론 집에 갈 때까지도 저럴 기세라, 한 번 더 괜찮다 말하려던 참이었다.

“…….”

고개를 돌린 결의 시선이 단이의 귀에 걸렸다.

귓가에 꽂혀 있는 손톱만 한 작은 꽃이 눈길을 사로잡은 탓이었다.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챈 단이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꽃을 손으로 가렸다.

“그게, 아까 그 한량 나리…… 아니. 나리의 친우분께서 멋대로 제 귀에 꽂으셔서…….”

커다란 눈망울이 걱정을 품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많이 이상하여요?”

순간 가슴 속에 설명 못할 감정이 번져나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엷은 분홍 빛깔인데, 어찌 가슴에 번지는 것은 불길 같은 붉은 빛깔인지.

속이 뜨거워 괜스레 날숨이 깊어졌다.

잠자코 단이를 보던 결이 이내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아니다.”

그러자 단이의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 미소에 결의 눈빛이 더욱 묘한 이채로 물들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한데, 무어라 콕 집어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낯설음인가. 아니면 불쾌함인가.

혹은…… 답지 않은 소유욕인가.

낯선 감정이 가슴을 헤집은 순간.

수줍게 웃는 단이의 얼굴 위로 성조가 겹쳐 보였다.

그 어이없는 잔상에 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대체 왜?’자문해 보아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단이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아도 역시 나오는 답은 없으니, 그저 외면할 수밖에.

소다옥에 도착해 뒤늦은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단이의 귀에 꽂힌 들꽃은 결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차를 흘려 넘기는데도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였다.

마음에 안 들었다.

성조가 준 꽃이 단이의 귓가에 꽂혀 있는 것이.

또 그 꽃이 그녀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

차제구를 정리하는 단이를 가만히 응시하던 결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소다옥을 나가는 대신 단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들꽃이 그의 손길 한 번에 떨어져 나갔다.

“아…….”

귀를 스치는 온기에 단이가 놀라 앞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귀에 얹어져 있던 들꽃이 결의 커다란 손 안에서 구겨져 있었다.

놀란 눈동자 속에 결의 얼굴이 담겼다.

그의 눈동자 역시, 단이의 얼굴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이런 것 함부로 만지지 말거라.”

보기 싫다. 다른 사내가 준 것을 네가 지니고 있는 게.

시답지 않은 말들이 결의 입안에 진득하게 고였다.

마치, 질투처럼.

그러나 솔직한 심정을 있는 그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당최 무슨 마음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였으니까.

결국 그는 싱거운 이유를 갖다 붙였다.

“소양증 생긴다.”

누가 들어도 충동적인 행동에 급하게 붙인 변명이건만.

멍하니 입을 다물지 못하던 단이는 순진하게도 그 말에 속아 넘어갔다.

“하긴, 이제 날도 따듯해져서 들풀에 벌레도 많을 텐데. 앞으론 조심하겠습니다, 나리.”

일말의 의심 없이 제 말을 믿는 표정이었다.

그제야 목 안을 꽉 틀어막고 있던 것들이 슬며시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결은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단이에게 말하였다.

“앞으로 어딜 나갈 땐 반드시 내게 고하고.”

“예, 나리.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이어요. 약조하겠습니다.”

“……그래. 쉬어라.”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짐하는 단이를 보고 나서야 결은 소다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손을 펼치니 조금 전까지 앙증맞은 잎을 펼치고 있던 들꽃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잠시 미안한 감정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성조가 줬다는 꽃을 단이가 계속 지니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내 다비를 기생 취급하게 둘 순 없으니까.’

이 역시, 시답잖은 이유를 대며.

결은 오래전 성조가 기생의 마음을 훔칠 때 쓰는 백한 가지 방법이라며 농하던 것을 떠올리곤 멀리 꽃을 내던져버렸다.

내내 답답하던 가슴이 비로소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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