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달마저 구름에 가려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
스산한 바람이 빛 한 점 없는 마당을 쓸고 지나갔다.
온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진 않는 텅 빈 마당.
그 가운데 선 준백은 뒷짐을 진 채 홀로 허공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엇을 보는지 명확치 않은 초점은 그저 시린 냉기만을 품을 뿐이었다.
그때, 빈 허공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다 사라졌다.
그것을 발견한 준백의 동공이 바짝 조여졌다.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무엇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속이건만.
미동도 없이 그 한가운데를 응시하던 준백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슥. 미세하게 청각을 건드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윽고 바람 소리와 함께 다시 적막이 찾아들었다.
준백은 낮게 숨을 내쉬곤 발길을 돌려 사랑채로 들어갔다.
낯선 흔적 하나 없는 마당이 더욱 황량하게 변했다.
***
그 밤.
결에게 잡혀 광에 갇혀 있던 자객은 오늘도 기진한 상태로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의 몸은 갖은 문초의 흔적들로 처참해진 상태였다.
이제는 풀려난다 한들 더 이상 칼을 잡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단 뜻이었다.
차라리 자결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손과 발이 묶인 데다 입에는 항시 재갈이 물려 있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진실을 실토할 생각이 없는 그는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침묵 속으로 낯선 인기척이 흘러들었다.
“…….”
자객은 잘 떠지지도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려 앞을 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웬 인영 하나가 희미하게 보였다.
“누……구…….”
모래를 삼킨 것 같은 까끌한 목구멍에 억지로 힘을 주어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낯선 사내가 다가올수록 그의 모습도 점차 또렷해졌다.
“나다.”
일전의 자신과 똑같은 입성.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으로 두른 그의 한쪽 뺨엔 세로로 길게 그어진 흉터가 보였다.
검은 천 위로 언뜻 드러난 그것을 본 사내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바로 자신의 우두머리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사내는 말없이 자객의 상태만 살폈다.
한눈에 보아도 자객의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여기서 구출한다 해도 더 이상 자객으로서 쓸모가 없다는 뜻이었다.
자객에게 몸을 쓸 수 없다는 건 곧 죽음과도 같은 것.
거기다 잡힐 당시 자결조차 하지 못하고 이리 볼썽사나운 꼴이 되었으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제 하나밖에 없었다.
“너에게 어떤 처분이 내려졌는지는 알고 있겠지.”
차디찬 사내의 말에 자객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런 꼴이 된 주제에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졌던 걸까.
사내가 작게 코웃음을 치자 자객의 눈빛이 다시 굳어졌다.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압니다…….”
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결연한 듯, 혹은 허무한 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내는 품에서 작은 단도 하나를 꺼내었다.
그러곤 자객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칼끝으로 도려내어 형태조차 남지 않게끔 만들었다.
“윽……!”
자객은 심히 괴로워하면서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 여기서 더 망가진다 해도 두려울 것 없었다.
문신을 완전히 없앤 사내가 불현듯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광 한쪽에 놓인 책상 위에 웬 종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살핀 사내의 미간이 언짢은 듯 구겨졌다.
그것은 자객의 팔에 새겨져 있던 문신을 똑같이 그려놓은 종이였다.
어차피 놈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문신이 유출되었을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증거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지.’사내는 종이를 잘게 찢어발겨 횃불에 던져버렸다.
찢긴 종이는 금세 화르륵 타올라 까만 재로 변하고 말았다.
재를 발로 짓이긴 사내는 품속에서 동그란 환 형태의 무언가를 꺼내 자객에게 건네었다.
“먹어라.”
“…….”
“고통은 짧고, 안식은 길 것이다.”
환을 본 자객의 얼굴에 두려운 빛이 스쳤다.
그러나 시작부터 목숨을 버릴 각오로 뛰어든 일.
자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받아먹었다.
“크헉……!”
오래지 않아 괴롭게 몸부림치는 자객을 홀로 두고서, 사내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
새벽 공기를 가르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다급하였다.
순식간에 광 앞에 도착한 결이 닫혀 있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안에는 싸늘한 주검이 된 채 축 늘어진 자객이 보였다.
결은 안색을 굳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까이서 본 자객의 모습은 훨씬 더 처참했다.
문신이 새겨져 있는 팔은 난도질을 당해 있었고, 온몸은 피부가 새까맣게 변해 오래된 송장과도 같았다.
소식을 듣고 찾아왔던 진위가 자객의 상태를 살피고선 말했다.
“아무래도 극독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극독이라.”
결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주위를 보았다.
밤사이 장정 여럿이 집 안 곳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눈을 전부 따돌리고 이곳까지 들어올 정도면 보통의 실력자는 아니란 것을 의미했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저자와 같은 패거리겠지.’그것을 방증하듯 자객의 문신을 본떠 놓았던 종이까지 사라져 있었다.
결의 시선 끝에 횃불 아래 검게 흩어진 재가 보였다.
역시 그 불청객이 처리하고 간 듯했다.
워낙 복잡한 문양이었던 데다 본떠 놓은 것은 저거 하나뿐이었거늘.
하필 그것을 없애버렸으니, 유일한 증거마저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너무 안일하게 있었다는 생각에 발밑이 아찔해졌다.
결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말 새어나가지 않게, 시신은 조용히 수습해라.”
“예, 장군.”
결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돌려 광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서서히 동이 터오는 하늘이 새벽노을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 타오르는 붉은빛을 보며 결은 턱에 힘을 꾹 주었다.
‘남준백……. 아무리 꼬리를 자르고 감춘들, 네 추악한 악취는 언젠가 새어나오게 될 것이다.’내 반드시, 진실을 밝히고 말 테니.
***
욕조에 차 주머니를 넣던 단이가 힐긋 결을 살폈다.
상처가 많이 아물어 모처럼 다시 시작하게 된 목욕 시중이었다.
하지만 물에 깊이 몸을 담근 결은 아까부터 감은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한눈에 보아도 무척 심란해 보였다.
‘혹 어제 일로 아직 화가 나신 건가?’그리 생각하기엔 어젯밤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아무렇지 않던 결이었다.
‘눈을 떴을 때부터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걸로 보아선, 분명 집 안에 심각한 일이 생긴 듯한데…….’다들 쉬쉬하거나 모르는 눈치니 쉬이 물어볼 수도 없었다.
결국 단이는 말없이 결의 안색만 살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나리께서 좀 괜찮아지실까.’곰곰이 생각하던 단이의 머릿속에 얼마 전 보선 어멈에게 배웠던 것이 떠올랐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 마시면 좋은 차가 있다지 않았는가.
단이는 목욕 시중이 끝나자마자 방으로 돌아가 수첩을 살펴보았다.
“여기 있다.”
싱긋 웃은 단이가 적힌 내용을 꼼꼼히 복기하였다.
그러곤 곧장 다신당으로 향했다.
떡차와 차제구를 챙긴 단이는 소쿠리 하나를 더 꺼내어 무언가를 한 움큼 집어 담았다.
소복이 쌓인 그것을 보며 그녀가 입가를 늘였다.
곧 찻상을 든 단이가 사랑채로 향했다.
“나리, 차를 올리겠습니다.”
“들어오거라.”
섬돌을 딛고 사랑채 안으로 들어가자, 막 환복을 마친 결이 그녀를 맞이했다.
정방에서만큼 심각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두 눈엔 여전히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깊은 한숨 소리가 절로 들리는 듯하였다.
그 눈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길 잠시.
단이는 곧 자리를 잡고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떡차와 함께 소쿠리에 담아온 것을 잘게 갈아 차관에 넣었다.
그러곤 팔팔 끓인 물과 함께 그것을 진하게 우려내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향이 방 안 곳곳으로 짙게 퍼져나갔다.
이윽고 찻잔에 옅은 주홍빛이 감도는 차가 담겼다.
단이는 소쿠리에 남은 것 하나를 집어 차 위에 동동 띄워놓았다.
바짝 말라 있던 그것은 뜨거운 차를 만나 한 잎 한 잎 곱게 펴지기 시작했다.
곧 노란 꽃송이가 찻잔 속에서 환하게 피었다.
바로 민들레였다.
조용히 민들레 꽃차를 한 모금 맛본 그녀는 찻잔을 감싸 앞으로 내밀었다.
“민들레 꽃차는 심신을 안정시켜주고 위의 긴장을 완화시켜서 원기를 회복시켜준다고 하여요.”
“…….”
“나리께서 걱정하시는 일이 있는 것 같아, 오늘은 특별히 이 차로 준비해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결의 눈동자가 낮게 일렁였다.
제 낯빛에 얼마나 깊은 심려가 드러나 있었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결이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두 사람의 손끝이 서로 맞닿은 찰나.
“잘될 것이어요.”
단이의 청아한 음색이 결의 손길을 잠시 붙잡아 두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다 잘될 것이어요.”
“…….”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어요, 나리.”
오롯이 결을 향한 눈동자에 진심 어린 위로가 담겨 있었다.
결은 그 말간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대뜸 다 잘될 거란다.
한없이 막막하기만 한 상황이거늘.
저 무모한 말이, 어째서 이리 위로가 되는 것인지.
마치 네 말대로 모든 게 잘 해결될 것 같이.
“믿어보지.”
결이 찻잔과 함께 단이의 손을 감싸듯 쥐었다.
맞닿은 손 안에 고인 열기가 단이의 뺨에도 고운 꽃 하나를 피워냈다.
예민한 살갗을 쓸어내린 손이 꽃차의 향처럼 진한 여운을 남기곤 찻잔을 가져갔다.
단이의 흔적이 남은 곳에 입술을 대니, 다향과 어우러진 꽃내음이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내내 경직되어 있던 몸이 그 향과 온기로 인해 차츰 풀어지기 시작했다.
찻잔을 비울수록 그를 괴롭히던 생각들 역시 흐릿해져 갔다.
차를 마시는 시간만큼은 잠시나마 휴식을 취해도 된다는 뜻처럼.
마지막 한 모금을 머금은 입안이 아쉬움으로 헛헛해졌다.
결이 찻잔을 모두 비운 것을 살핀 단이가 연한 미소를 띠며 찻상을 정리하였다.
“그럼 저는 나갈 채비하여 오겠습니다, 나리.”
꾸벅 인사한 단이가 이내 사랑채를 나갔다.
그녀가 떠나도 여전히 남은 민들레 향이 결의 주위를 감쌌다.
여전히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전보다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시간이 흐른 덕인가.
마음을 안정시켜준다는 차 덕분인가.
그도 아니면, 네 덕분인가.
‘네가 나의 안식이구나.’
잘될 거라 말하던 단이의 모습이 오래도록 결의 망막에 맺혀 있었다.
***
“자객만 죽이고 홀연히 사라졌다라…….”
성조의 심각한 목소리가 훈련원 집무실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간밤에 일어난 일이 그에게도 적잖이 충격이었는지, 그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 하나 알아낸 것이 없는데 유일하게 생포한 자객까지 죽고 말았으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철저한 놈인지 증거가 될 만한 건 전부 없애버렸더군. 문신을 난도질해놓은 데다 본떠 놓은 종이를 그곳에 놓아두었는데 그것까지 불태워버렸다.”
“문신……. 잠깐만, 문신?”
뭔가가 생각났는지 성조가 번뜩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만 남기고선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집무실로 돌아온 성조가 숨을 헐떡이며 결의 앞에 웬 종이를 펼쳤다.
“이 문양 맞는가?”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본 결이 눈빛을 굳혔다.
틀림없다. 분명 자객의 팔에 새겨진 문신과 똑같은 문양이었다.
“내 자네 집에서 자객을 본 날 혹시 몰라서 따로 본떠 놓았었네. 조용히 수소문해보려고 보관하고 있었는데, 갖고 있길 참으로 잘했군. 내가 선견지명이 있었나 보이.”
성조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며 털썩 자리에 앉았다.
“증인은 없어져도 증거는 남았으니, 이걸로 계속 추적을 이어가보면 될 걸세.”
“……고맙다.”
“고맙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앞으로는 은밀히 움직이는 게 좋겠네.”
결은 종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막하기만 하던 앞길에 도로 빛이 비치는 듯했다.
한시름 놓은 덕인지 성조가 태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꽃 향이 짙은 듯하군. 집무실에 화분이라도 들였는가?”
그 말에 자연스럽게 단이가 올렸던 꽃차가 떠올랐다.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다 잘될 것이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어요, 나리.’
그 아이가 해준 것이라곤 그저 잘될 거란 말 한마디뿐이었는데.
마치 그 말이 자신에게 솟아날 구멍을 만들어준 것만 같았다.
기적처럼.
어느새 민들레 향이 다시 코끝을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