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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23화 (23/100)

23화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설원.

밤안개가 자욱이 깔려 숨조차 쉬기 어려운 그곳을 한 여인이 걷고 있었다.

세상을 뒤덮을 것처럼 내리는 눈 때문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두 발이 푹푹 빠졌다.

이미 짚신은 다 해지고 끊어져 신으나 마나 한 것이 된 지 오래였다.

여인의 손끝엔 이제 겨우 세 돌이 지났을까 싶은 어린 딸아이가 딸려 있었다.

“다리, 다리 아파아. 싫어어.”

아이는 연신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거렸다.

작은 몸으로 너무 오래 걸은 탓에 지금도 어미 손에 끌려가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힘없는 어미는 제 한 몸 움직이기도 버거웠기에, 차마 우는 아이를 안아줄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가자. 조금만 더 가면 편히 쉴 수 있어.”

“다리이!”

“쉬이. 큰 소리 내면 안 돼. 제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애원하듯 아이를 달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행여 누가 쫓아올까, 연신 주위를 살피는 눈동자는 불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설원 한가운데 낡은 집 한 채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여인은 감격인지 절규인지 모를 울음을 터트리며 아이를 데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은 사립문 앞에 여인이 아이를 세웠다.

“……아. 이걸 잘 갖고 있어야 해.”

여인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이의 옷 속으로 넣어주었다.

그러고도 물건이 떨어질까, 해진 앞섶을 최대한 여며 꽁꽁 동여맸다.

“절대로, 절대로 이걸 잃어버려선 안 돼. 알겠지?”

“엄마는?”

“응, 엄마는 잠깐 어디 가서 누구 좀 데리고 올게.”

“언제 와?”

“다섯 밤만. 다섯 밤만 여기서 코 자면, 엄마 다시 돌아올 거야.”

여인이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지만, 어미는 자식에게 슬픔을 드러낼 수 없어 안간힘으로 울음을 참았다.

“엄마가…… 많이 사랑해. 우리 ……이, 많이 사랑해.”

여인이 아이를 안아들어 사립문 안쪽에 내려주었다.

그러곤 초가집을 향해 있는 힘껏 외쳤다.

“우리 아이 좀 거둬주시오! 우리 아이 좀 제발 살려주시오! 제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한참을 비명처럼 내지르던 여인이 마지막으로 딸아이를 눈에 담곤 등을 돌렸다.

엄마, 엄마아.

설원에 울려 퍼지는 어린 것의 울음이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희미해질 때쯤.

“……!”

새하얀 설원에 불현듯 붉은 핏자국이 튀었다.

놀란 아이는 울음조차 잃은 채 앞을 보았다.

이내 여인이 나무토막처럼 힘없이 쓰러지고, 그 뒤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붉게 물든 장검을 든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이를 보았다.

얼굴 곳곳에 튄 핏자국.

황새 같은 눈썹. 독사 같은 눈매.

그리고 살기 가득한 눈동자.

준백이었다.

“…….”

눈을 뜬 단이는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아직 한밤중인지 방 안엔 희끄무레한 달빛만 비추고 있었다.

이불을 그러쥔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하였고, 진이 빠진 몸은 차갑게 식은 듯 오한이 들었다.

“하아…….”

뭉쳐 있던 숨이 그녀의 잇새로 가늘게 흘러나왔다.

‘뭔가…… 무서운 꿈을 꾼 것 같은데.’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생했던 장면들이 손 틈 새로 흐르는 모래알처럼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유일하게 남은 기억은 준백의 얼굴이었다.

감당키 어려운 두려움과 함께.

“그 사람이…… 왜.”

떨리는 목소리로 자문하였지만 답은 구할 수 없었다.

그저 원인 모를 공포만이 오래도록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 뿐이었다.

***

그리고 그날 밤.

칼을 든 자의 꿈에서도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

아침 조회를 마친 백관들이 차례로 왕에게서 물러났다.

그 가운데 준백 역시 다른 고관대작들과 함께 편전을 나섰다.

평소보다 굳어 있는 낯빛에 신료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상 대감,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안색이 좋지 않아 뵙니다.”

그 말에 준백이 언짢은 듯 미간을 좁혔다.

“별일 아닙니다. 그저 생각할 거리가 조금 있어서.”

꿈자리 하나로 잠을 설쳤다 말하기가 어쩐지 어려운 까닭이었다.

‘밀서……. 그게 왜 갑자기 꿈에 나온 거지.’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아주 중요한 밀서였다.

세상에 절대 드러나선 안 될, 완전히 사라졌어야 할 위험한 편지.

그것이 난데없이 꿈에 나온 것이다.

만일 그 밀서가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면 여기 있는 수많은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될 터.

‘그때 어떻게든 그걸 찾아서 확실히 없앴어야 했는데. 내가 내 손으로 후환을 남겨놓았어…….’지끈거리는 머리에 준백이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간밤의 꿈이 꼭 불길한 전조 같아서 기분이 더욱 좋지 않았다.

‘아냐……. 그럴 리 없어. 그 밀서는 분명 없어졌다.’설령 남아 있다 한들, 고작 종이에 새긴 내용이 아직까지 온전히 남아 있을 리도 만무했다.

평범한 방법으로 새긴 것도 아니었으니.

게다가 벌써 십수 년이 지난 일이다.

하늘이 그를 버리지 않는 이상, 이제 와서 그 밀서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극히 드물었다.

‘그래. 내 기우인 게야. 요 며칠 북귀가 돌아온 일로 내가 너무 과민했던 탓이라고.’준백은 애써 꿈의 잔상을 털어버렸다.

“그나저나 북귀 말입니다.”

때마침 심기를 긁는 이름에 준백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말을 꺼낸 관료는 괜스레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무인들에게 꽤나 신망이 두터운 모양입니다. 올해가 딱 무과 식년 아닙니까. 북귀가 한양으로 돌아와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는 소식에 벌써부터 무과 초시에 지원하려는 자들이 수두룩하답니다.”

“아니. 그 짐승같이 잔악무도한 자 밑에서 배울 게 뭐가 있다고 그리 몰려든답니까?”

“무예로는 그를 당해낼 자가 없다 하잖습니까. 오죽하면 여포가 환생했다는 말까지 있을까…….”

“으흠!”

순간 준백이 불쾌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조금이라도 결을 추앙하는 이야기는 듣기조차 싫다는 뜻이었다.

관료들은 냉큼 입을 꾹 다물며 서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그들을 마뜩잖게 훑어보던 시선이 이윽고 정회에게 가닿았다.

정회는 그때까지도 말없이 걷고만 있었다.

그저 곁에 있는 무리와 속도만 맞추며, 저 홀로 외딴 곳에 동떨어진 듯.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정회를 바라보던 준백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담론 속에 끌어당겼다.

“좌찬 대감께서 정리를 좀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내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하던 정회의 눈동자가 비로소 준백에게로 향했다.

생각에 빠져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말뜻을 파악하고도 부러 모른 체하는 것인지.

그는 침묵으로 반문하며 준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보겠단 거로군.’준백은 그 뜻을 가소롭게 여기며 입을 열었다.

“좌찬 대감께선 현재 훈련원 지사를 겸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대감의 영식은 병조 좌랑이고 말입니다.”

“…….”

“모름지기 칼은 붓보다 아래에 있어야 하는 법.”

독사를 닮은 사특한 눈이 기분 나쁜 미소를 품었다.

“도성 안에선 도성 안에서의 법도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걸, 직접 보여주셔야지요.”

“…….”

말 그대로 지위를 이용하여 결에게 부당한 처사를 내리란 뜻이었다.

인사권이 그들의 손에 있는 한, 훈련원 판관 하나쯤은 손쉽게 지방으로 좌천시킬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정회는 한발 물러서며 어렵다는 뜻을 내비쳤다.

“주상께서 친히 지켜보고 계신 자입니다. 함부로 손을 대었다가 괜한 말이 따라붙을까 저어됩니다.”

“괜한 말이라니.”

“영상 대감께서…….”

정회가 똑바로 준백을 쳐다보며 은밀히 말하였다.

“‘그날’을 감추고 싶어 하신다고 말입니다.”

무리의 걸음이 일시에 멈춰졌다.

감히 겁도 없이 함부로 말한 정회에 다른 신료들은 입조차 다물지 못했다.

준백은 뚫어질 듯 정회를 응시하며 더욱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였다.

“설마하니, 다른 생각을 품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준백과 정회 사이에 팽팽한 줄이 당겨졌다.

부유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주위를 짓눌렀다.

주위에 있던 다른 신료들은 차마 말을 얹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당장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하던 그들 가운데로 돌연 실소가 끼어들었다.

준백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의심이라니. 섭섭한 말씀입니다.”

“…….”

“하긴. 그깟 애송이 때문에 부러 헛소문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요.”

“……제 염려를 알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발길을 너무 잡아두었습니다. 이만 가시지요.”

능구렁이처럼 화두를 넘긴 준백이 낮게 웃음을 흘리며 먼저 몸을 돌렸다.

자리에 남은 서늘한 웃음소리가 듣는 이들의 고막을 소름 끼치게 긁었다.

이윽고 정회도 다른 신료들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걱정을 솔직하게 내비치는 다른 이들과 달리 준백과 정회는 가면을 쓴 것처럼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누가 먼저 칼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을 관계였다.

***

동이 터오는 이른 아침.

결과 단이는 여느 때처럼 훈련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육조거리로 가려면 일전에 노비 시장이 열렸던 시전을 반드시 지나야 하는 터라.

그날의 기억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단이는 바닥만 보며 걷고 있었다.

그러느라 흑마와의 거리가 꽤 벌어졌다.

“어여쁜 노리개, 머리꽂이, 댕기 팔아요! 박색이던 여인도 한순간에 절세 미녀로 만들어주는 노리개, 머리꽂이, 댕기 팔아요!”

그때, 다가오는 단이를 붙들 생각이었는지 도자전 상인이 큰소리로 외쳤다.

“거기, 예쁜 처자! 이리 와서 물건 좀 보고 가요.”

무심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든 단이는 좌판에 널린 장신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한눈에 보아도 몸종 아이이건만.

상인은 물건을 팔 생각에 앞서가는 결은 보이지도 않는지, 단이를 향해 방정맞게 손짓하였다.

“와서 구경이라도 한번 해보시라니까. 조선에서 제일가는 장인이 만든 물건들이오!”

그 소리에 결 또한 고개를 돌려 도자전 좌판을 보았다.

온갖 화려한 패물들이 반짝이며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얼마 전 귓가에 꽂은 꽃 한 송이에 좋아하던 단이가 떠올랐다.

작은 것 하나라도 꽂아주면 다시금 그때처럼 웃을까.

짧게 생각을 마친 결이 말에서 내려 단이의 옆에 섰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느냐.”

순간 단이가 기대하듯 결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욕심이라 생각한 건지, 곧 표정을 가다듬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어요. 그냥 어떤 것이 있나 궁금하여 본 것이어요.”

“하나 골라보든가.”

그 말에 단이가 커다란 눈으로 다시 결을 보았다.

결은 빈말이 아니라는 듯 앞서 도자전 앞으로 걸어갔다.

“머리꽂이.”

“……예? 아, 아! 머, 머리꽂이. 예, 머리꽂이 있습죠.”

뒤늦게 북귀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겁먹었던 상인이 황급히 머리꽂이들을 펼쳐놓았다.

조그마한 원석이 달린 것부터 시작해 꽃 모양, 나비 모양, 산호 모양 등 장식 또한 다양하였다.

“가까이 와서 보거라.”

결의 눈짓에 단이가 쭈뼛쭈뼛 그 옆으로 다가왔다.

정말 골라도 되나, 눈치를 살피던 그녀는 곧 설레는 눈으로 장신구를 고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머리꽂이 중에 무엇 하나 어여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참을 이것저것 보던 단이는 조심스럽게 머리꽂이 두 개를 골랐다.

하나는 산사나무 열매를 닮은 붉은 구슬 장식이 달린 옆꽂이, 다른 하나는 은방울꽃이 촘촘하게 핀 듯한 흰 구슬 장식의 옆꽂이였다.

“이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으려나…….”

세상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결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단이와 함께 두 장식을 보던 결이 그 중 은방울꽃을 닮은 옆꽂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손수 단이의 머리에 그것을 꽂아주었다.

“넌 희고 고운 것이 잘 어울린다.”

핏빛에 물든 나와는 다르게.

잇지 못한 뒷말이 그의 혀끝에 고이다 사라졌다.

부드럽게 머리를 스치는 손길.

그 짧고도 강렬한 온기에 단이의 두 뺨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순간 아무도 모르는 새에 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예쁜 옆꽂이를 한 머리에도.

그리고…… 마음에도

감상하듯 단이의 얼굴을 눈에 담던 결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하지.”

“예, 예에. 5전만 주십시오.”

값을 치른 결은 그대로 돌아서서 다시 말에 올라탔다.

단이는 봄꽃을 닮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결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나리.”

결은 대답 대신 그런 단이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이내 고삐를 잡아당겼다.

느긋하게 흑마를 모는 결의 뒤로 해맑게 웃는 단이가 병아리처럼 종종종 따라갔다.

북방 귀신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던 사람들은 그런 두 사람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조금 전 다비를 바라보던 결의 눈빛이 묘하게 부드러웠던 까닭이었다.

엄동설한보다 더 차가운 북방 귀신이라더니.

어디선가 춘풍이 불어오는 게, 마치 그에게서 시작된 것 같더라.

하여 이날 이후로 세간에는 또 다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북방 귀신의 저주가 춘풍 꽃물에 녹기 시작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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