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쪼르륵.
정오시, 소다옥을 채우는 맑은 소리와 함께 화자잔에 차가 담겼다.
첫잔에 입을 댄 단이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으며 그 잔을 결의 앞에 놓았다.
찻잔 속에 봄을 담은 게 짙게 우러난 꽃향인가, 은방울꽃을 닮은 옆꽂이인가.
괜스레 마음이 몽글몽글해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나리께서 보시면 너무 속없다 생각하실 것 같았다.
하여 단이는 맞다문 입술 속에 미소를 꼭꼭 숨기곤 결의 속도에 맞춰 차를 덥히고 채우길 반복했다.
그렇게 마지막 세 번째 잔을 막 채웠을 때쯤.
“판관 나리 거 계시는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소다옥 문을 넘어왔다.
이윽고 허락도 없이 열린 문 너머.
“역시 예 있었군.”
예상대로 성조의 얼굴이 나타났다.
“다동 너도 잘 있었느냐?”
단이를 약 올리는 것도 잊지 않은 성조가 소다옥 안으로 들어왔다.
결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야.”
“새벽 나절부터 앉아만 있었더니 몸이 영 찌뿌둥하여서 말이야. 오랜만에 자네랑 함께 대련이나 할까 싶어 왔지. 요새 통 검 휘두를 시간이 없어서 팔다리가 녹스는 것 같으이…….”
끊임없는 말로 주의를 분산시킨 성조가 은근슬쩍 찻잔으로 손을 뻗은 찰나.
간발의 차로 먼저 잔을 낚아챈 결이 남은 차를 모조리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옳거니! 단이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흥, 성조를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헛손질을 자연스럽게 팔 돌리기로 연결시킨 성조는 이내 아무 일도 없던 척 다시 능글맞게 웃었다.
“다 마셨으면 나가세. 남은 휴식 시간 알차게 써야 하지 않겠는가.”
“쉬고 싶다.”
고민도 않고 거절하는 결을 성조가 서운하다는 듯 보았다.
“내 일부러 복장까지 갖추고 왔단 말일세.”
“진위한테 말해보든가.”
“벗을 놔두고 어찌 애먼 이와 검을 맞대겠는가? 내 형편없는 실력을 봐주는 이는 자네밖에 없으이.”
바꿔 말하면 알아서 적당히 봐주며 놀아달란 뜻이었다.
단이가 듣기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뻔뻔한 말이건만.
들어주지 않으면 내내 이곳에서 귀찮게 할 것임을 알기에, 결은 버티다 못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나가. 목검 받아올 테니까.”
무엇보다, 단이가 성조와 한 자리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고.
“오! 그럼 심판은 저 다동이…….”
“검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아이를 무엇 하러. 넌 여기 있거라.”
단칼에 원천봉쇄한 결이 성조를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얼른 나가란 뜻이었다.
성조가 입술을 비죽이며 단이에게 작게 속삭였다.
“네 상전 참으로 팍팍하다. 우린 다음에 놀자꾸나, 다동아.”
“쓸데없는 소리 말고.”
“혼자 남겨졌다고 너무 서운해 말고, 내 다칠까 걱정도 말고! 내 꼭 돌아오마, 다도옹……!”
결에게 뒷덜미를 붙잡힌 성조가 단이를 향해 한껏 애틋하게 팔을 뻗으며 멀어졌다.
곧 아득한 메아리와 함께 두 사람이 사라졌다.
전에 다신당에서 보았을 때와 꼭 같은 퇴장이었다.
“에휴……. 언제 철드실까.”
한심한 눈으로 고개를 내저은 단이는 홀로 조용한 휴식을 만끽하였다.
***
탁, 탁탁!
훈련원 대련장에서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소리가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결과 성조, 두 사람의 목검이 맞부딪칠 때마다 나는 소리였다.
날이라곤 전혀 없는 목검이건만.
두 사람은 마치 진검으로 싸우는 것처럼 매순간 진지하였다.
실력이 형편없다는 건 답지 않은 겸손이었는지, 성조는 결을 상대로 제법 막상막하를 이루었다.
허를 찌르거나 방어를 공격으로 바꾸는 모양새가 놀랍도록 능숙하였다.
‘죄 엄살.’결은 아슬아슬하게 제 옆을 스치는 목검을 빠르게 막으며 잠시 거리를 두었다.
여연으로 놀러 올 적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성조와 검을 맞대었던 그는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성조는 단 하루도 검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결코 적당히 봐줄 실력이 아니라는 것도.
그것을 증명하듯 수십여 합이 지나도록 승부가 나지 않으니.
어느덧 굵은 땀방울이 두 사내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이제 슬슬 끝내야 할 것 같은데.”
잠시 숨을 고른 성조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 말에 결의 눈매도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윽고 멈춰 있던 두 검이 다시 서로를 향해 날아든 순간.
팍!
“…….”
목검 하나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상대의 목검이 닿은 목에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결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니, 실없이 웃음을 흘리며 양팔을 든 성조가 보였다.
“역시 자네에겐 못 당하겠군. 완전한 내 패배야.”
성조는 죽는 시늉을 하듯 고개를 뒤로 꺾기까지 하였다.
그제야 결이 뻗었던 팔을 내려 목검을 거두었다.
결과는 예정된 것이었지만, 그 과정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만큼 성조가 검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아비의 뜻 때문에 억지로 문관의 길로 떠밀린 성조였기에, 그 심정이 어렴풋이나마 이해는 갔다.
“실력이 귀신을 넘어 괴물 같아졌어. 오랜만이라고 너무 안 봐주는 것 아닌가?”
“엄살.”
“진심이네. 지금 내 팔 안 돌아가는 거 보이는가? 응? 어우, 삭신이야. 아프다고 하고 조퇴를 해야 하나.”
농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성조를 두고 결은 그저 땀만 닦아내었다.
성조는 싱겁게 웃으며 그런 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죽음 앞에서 가다듬은 검이, 어찌 고요한 육지에서 길들인 검과 같을까.’그것을 알기에, 결과 또한 예상한 성조였다.
몸이 개운해진 만큼 마음은 더욱 무거워지는 순간이었다.
“만약에 말일세.”
잠시 틈을 두던 성조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날 자네를 따라갔다면, 지금 어찌 되었을까.”
뜬금없는 가정에 결이 눈을 들어 성조를 보았다.
불현듯 성조가 말한 그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차 덕분에 조금이나마 건강을 회복하고 거동이 가능해졌을 때쯤.
결이 외숙부 민지청을 따라 여연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성조가 부리나케 달려왔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한다는 소리는 ‘나도 데려가’였다.
“그땐 자네와 떨어지는 것이 꼭 내 몸뚱이의 일부분을 떼어내는 것처럼 느껴졌어.”
“…….”
“저 아이가 사라지면 나는 누구를 보며 사나. 어린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였지.”
마냥 부리는 고집이 아니었다.
어린 성조는 정말 결을 따라갈 기세로 야무지게 짐까지 쌌더랬다.
그러나 정회 앞에선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입신양명만을 바라는 그가 어찌 아들을 무관의 길로 보내겠는가.
그것도 역모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약을 받았던 자의 아들과 함께.
자신이 외면했던, 벗의 아들과 함께.
정회는 불같이 화를 내며 반대하였다.
성조는 몇날며칠 아버지를 설득하며 단식도 하고 가출까지 해보았지만, 오히려 광에 가둬지기만 뿐이었다.
결과 지청은 감히 한 씨 집안의 대문조차 넘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날이 되어 결은 지청과 함께 떠나고, 성조는 몇 년간 방황하다 끝내 뜻을 굽히고 정회의 뜻대로 과거를 준비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토록 서로에게 애틋한 우애였다.
본디 결은 무예보다 책을 더 좋아하였고, 성조는 책보다 무예를 더 좋아하였거늘.
스스로는 원치 않던 길이 정작 상대에겐 바라 마지않던 길이었단 사실에, 두 사람은 괜스레 기분이 묘해졌다.
그날을 기점으로 그들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으니까.
생각도, 가치관도, 미래의 꿈도.
그리고 서로를 향한 마음도.
성조가 웃음기라곤 사라진 얼굴로 결을 보았다.
너라고 편하게 부르던 벗은 어느 순간부터 자네라 불러야 할 만큼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조차 외면하고 싶을 만큼 성조는 결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자네에게…….”
그때와 같은 벗인가?
쉬이 꺼낼 수 없는 질문이 입안에서 쓰디쓰게 고여 가던 그때.
“저어, 서결 나리.”
단이의 유약한 목소리가 두 사내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언제 이곳으로 온 건지, 쭈뼛쭈뼛 대련장으로 다가온 단이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결을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잠시 소다옥을 비운 사이에 낯선 분이 그 앞을 서성이고 계셔서……. 무서워서 차마 뉘신지 여쭙지 못하고 바로 이곳으로 왔습니다. 송구하옵니다.”
결과 눈짓을 주고받은 성조가 물었다.
“인상착의가 어찌 되느냐.”
“나리께서 아까 입고 계셨던 옷과 비슷한데, 색깔은 붉은빛이었어요.”
홍포는 2품 이상의 관원이 입는 관복이었다.
굳이 훈련원까지 찾아와 구석에 위치한 소다옥을 살피는 당상관이라면, 예사 이유는 아닐 터.
아무래도 결에게 목적이 있어 온 듯싶었다.
“너는 진위에게 가 있거라. 볼일이 끝나면 데리러 가지.”
“예, 나리.”
결이 성조와 함께 소다옥으로 향하려던 그때.
채 걸음을 뗄 새도 없이 누군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여기 있었구나.”
정회였다.
그 순간, 결과 성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단이의 앞에 서서 그녀를 등 뒤로 감추었다.
정회에게 단이의 얼굴을 보여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준백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으니.
“…….”
결은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를 올렸다.
굳은 눈으로 결을 바라보던 정회가 성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으로 오면 널 찾을 수 있을 거라더니……. 내 너 하나 찾으러 여기까지 와야겠느냐.”
못마땅한 눈으로 아들을 보길 잠시.
그의 눈동자가 두 사내의 몸 틈으로 보이는 단이의 어깨에 닿았다.
그 눈길을 알아챈 결이 등 뒤로 손을 뻗어 단이를 제 뒤로 완전히 숨겨버렸다.
순식간에 결의 뒤로 사라진 조그마한 몸집에 정회가 눈가를 좁혔다.
집요하게 단이의 잔상을 쫓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마저도 곧 옆으로 한 걸음 더 옮겨 틈을 메꿔버린 성조로 인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누가 봐도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
그러나 입 아프게 그것을 지적하기엔, 이미 그런 태도가 당연해져버린 부자 사이였다.
‘어차피 도성 안에 있는 동안 한 번은 마주치게 되겠지.’정회는 단이에 대한 관심을 갈무리하고 성조에게 말했다.
“병판께서 금일 저녁에 집으로 오신다 하더구나. 괜히 미적거려서 늦지 말고 오늘은 재깍 들어와.”
“오늘은 일이 많아 퇴청이 늦을 듯한데…….”
“잔꾀 부리지 말거라. 내 조금 전 병판께서 오신다 하지 않았느냐.”
성조가 말한 일도 어차피 병조 판서의 소관이니, 핑곗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일이 많으면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에 가서 서둘러 해결해. 오늘은 봐주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렇게까지 나오면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성조는 결국 체념하듯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한심하다는 얼굴로 헛기침을 흘린 정회는 마지막으로 결을 쳐다보다 이내 몸을 돌렸다.
정회가 훈련원 밖으로 나갈 때까지 미동도 않던 결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낮게 숨을 내쉬었다.
임시방편일 뿐이었지만, 저들에게 단이를 보이는 건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결은 잡고 있던 단이의 손목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괜찮으냐.”
고개를 돌리니,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있던 단이가 큰 눈을 들어 결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두 뺨은 발그레 물들인 채.
결에게 잡혀 있던 손목을 다른 손으로 꼭 감싸 쥐며.
“다음부턴 아예 소다옥 밖으로 나오지 않겠습니다, 나리……. 송구하여요.”
또 풀이 죽은 단이였다.
아무래도 정회 앞에서 숨긴 것이, 그녀가 다른 관원들 앞에 나타나선 절대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설명하자니 너무 많은 것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라.
“괘념치 말거라. 네 잘못 아니니.”
낮은 음성으로 말하자 경직되어 있던 어깨가 조금은 풀리는 듯 보였다.
여전히 붉어진 얼굴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지만.
그때까지 정회가 사라진 방향만 말없이 보고 있던 성조가 결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나 때문에 괜히 놀라게 만들었구먼. 미안하네.”
가뜩이나 결이 정회와의 만남을 극히 꺼려하고 있음을 알기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었다.
성조는 애써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땅에 박힌 목검을 뽑아 결에게 건넸다.
“그럼 나는, 끌려가기 전에 일부터 마무리하러 가야겠네.”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눈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결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얼른 가라. 나중에 닥쳐서 허둥거리지 말고.”
그저 싱거운 응원만 보낼 수밖에.
“그래야지.”
그제야 성조가 눈에 옅은 호선을 그리곤 자리를 떠났다.
어쩐지 쓸쓸함만 남은 순간.
멀어지는 성조와 결을 번갈아 보던 단이는 전보다 어두워진 결의 눈을 오래도록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