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아하하하! 그리 생각해주시니 제가 참으로 기쁩니다, 대감.”
병조 판서 심 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정회는 잔잔히 웃으며 그의 것에 잔을 부딪쳤다.
“이 자리도 진즉에 마련했어야 하는데, 준비가 변변치 않은 탓에 이리도 늦게 되었습니다.”
“늦다니요. 매번 회동이 있을 적마다 대감께서 저를 잘 살펴주셨잖습니까.”
“그저 미흡한 성의나마 보였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그 가운데, 성조는 홀로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입가만 늘였다.
숨이 막힐 만큼 지루한 시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참아야 했다.
이런 자리에서나마 얌전히 굴어야 정회가 ‘망나니짓’이라 일컫는 것들도 어느 정도 허용이 될 테니.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시간만 죽이다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참 술잔을 기울이던 심 씨가 은근슬쩍 말을 걸어왔다.
“한 좌랑은 요즘 일하면서 어려운 것 없나?”
성조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감정을 숨기기 위한, 그저 입술만 가늘게 늘인 가면 같은 미소였다.
“대감께서 잘 살펴주시는 덕분에 더할 나위 없이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단순한 심 씨는 점잖을 떠는 것이라 생각하며 기분 좋게 성조의 잔을 채워주었다.
“어려운 것 있으면 언제든 개의치 말고 말하게나. 내 힘이 닿는 곳까지 도울 터이니.”
“말씀만으로도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어려워 말게. 내 자네를 아주 눈여겨보고 있으니.”
낮게 헛기침을 한 심 씨가 성조의 잔을 채워주며 슬그머니 본심을 꺼내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한 좌랑도 나이가 찼는데 아직 혼담이 오가는 집안이 없다고…….”
똑. 술병 끝에 떨어진 마지막 한 방울이 작은 잔 속에 물결을 일으켰다.
그림처럼 웃고 있던 성조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심 씨는 그것을 당혹감이라고만 생각했는지, 근심을 가장하며 정회에게 말했다.
“우리 딸아이도 과년하여 슬슬 혼처를 알아봐야 하는데, 이것이 아직 철이 안 들었는지 말을 꺼내는 족족 심드렁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성조에게로 향했다.
“한 좌랑 같은 사내가 또 있다면 우리 딸아이도 대번에 마음이 바뀔 듯한데, 이리 좋은 사윗감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려우니…….”
대놓고 성조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표하고 있는 것이었다.
병판의 질녀는 금상의 비, 서현왕후 정 씨라.
병판과 사돈을 맺는다면 한 씨 가문의 입지는 지금보다 더 단단해질 것이다.
이만큼 확실한 동아줄은 없었기에 정회로선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정회는 입술 끝이 올라가려는 걸 참으며 점잖은 표정을 지었다.
“부족한 제 아들을 그리 좋게 봐주시니, 아비 된 자로서 이만한 기쁨이 또 없습니다.”
“부족하다니요. 내 한 좌랑 같은 이를 사위로 맞을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것입니다.”
“그럼 혹, 제 아들을…….”
“과찬이십니다.”
하나 이번에도 아들은 아비의 뜻에 반하였으니.
“소생은 그저 제 한 몸 건사하기에도 벅찬 상태입니다. 한 여인의 지아비가 되기엔 아직 한없이 어리석은 어린아이와 같으니, 대감께서도 너무 높이 보지 마십시오.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가 민망합니다.”
성조는 정중히 거절의 뜻을 보였다.
그러나 체면도 뒤로하고 속내를 드러낸 심 씨가 쉽게 물러날 리 없었다.
“자고로 혼인이란 어른이 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나서 어른이 되는 법이지.”
“혹 대감의 여식이 저로 인해 웃음을 잃을까 저어됩니다.”
“지아비를 보필하고 어여쁨 받고자 노력하는 것이 여인의 기쁨 그 자체 아니겠는가. 자네 곁이라면 내 딸아이도 분명 행복할 걸세.”
“하나 소생은…….”
“이놈이 보기완 달리 부끄러움이 많아 이럽니다, 대감.”
보다 못한 정회가 성조의 말을 막으며 웃음으로 무마했다.
“워낙 숙맥이라 속마음을 내색하기 어려워 이러는 것뿐이니, 대감께서 이해해주시지요.”
천하의 호색한이라 불리는 성조가 숙맥이라니.
가당찮은 말이었지만 정회는 시치미를 떼었다.
이 좋은 기회를 저 어리석은 놈이 망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뭐, 이런 일은 저희들끼리 따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그저 편히 즐기다 가시지요.”
“허허, 제가 딸아이 일 앞에선 이리도 성미가 급해집니다.”
다행히 심 씨도 성조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고 정회가 따르는 술을 받았다.
이미 그는 마음을 굳힌 듯 보였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자신은 아버지의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이라.
“……소생, 술이 과하여 대감 앞에서 실수를 할까 염려됩니다. 잠시 자리를 피해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게. 오늘 업무도 과중했을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심 씨는 벌써 사위를 대하듯 살갑게 답했다.
허리를 숙인 성조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
취기라곤 전혀 없는 얼굴이 밤바람에 더욱 온기를 잃어갔다.
오늘따라 밤공기에도 숨이 쉬이 트이질 못하니, 그만큼 가슴에 쌓인 것이 많은 까닭이라.
‘내가 이리도 무력한데…… 결이라고 내가 탐탁스러울 리가.’낮에 자신 때문에 결이 정회를 만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무 일도 없던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네 앞에서 그 척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아니. 이런 나를 네가 언제까지 가만 놔둘까.
친형제도 이리 애틋할 수 없겠건만.
그놈의 우애가 뭐라고.
“……다 내 탓이지. 이곳에도 발을 걸치고 저곳에도 발을 걸친 채, 애매하게 갈팡질팡하는 나의 탓이지.”
말로는 벗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허공으로 쓸쓸한 입김이 흩어졌다.
지그시 눈을 감은 성조는 한숨으로나마 갑갑한 것들을 밀어내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절 다동이라 부르실 겁니까?’ 문득 감은 눈 너머로 보이는 작은 머리통.
조막만 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들어차 있던 그 아이.
단이가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성조가 물끄러미 허공을 보았다.
사라진 잔상이 마치 잘못 튄 먹물 자국처럼 가슴에 번지고 있었다.
어찌 그 아이가 떠오른 것인가.
결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함께 딸려온 것인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뚜렷하게 드는 생각은 있었다.
‘재밌는데. 그 다동이랑 얘기하면.’이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다니. 저 자리가 그만큼 끔찍이 지루했나 싶었다.
싱겁게 조소를 흘린 성조가 한 번 더 깊이 숨을 내쉬었다.
내내 죄책감에 시달릴지언정 결에게 가고 싶었다.
혈육보다 더 의지하는 나의 벗이, 나를 증오하지 않을 거란 확인을 받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 다동도 함께 보면 좋을 것 같고.’무의식중에 든 생각은 곧 다른 고민들에 밀려 저만치 사라져버렸다.
***
깊은 밤.
십수 년간 금줄로 막혀 있던 중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낡은 안채가 버려지다시피 남아 있는 마당 한가운데.
그곳에 결이 홀로 서서 어느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향한 곳은 텅 빈 평지였다.
겉보기엔 우둘투둘 고르지 않은, 그저 평범한 흙바닥처럼 보이는 곳.
그러나 결의 눈엔 여전히 저곳이 커다란 연못처럼 보였다.
축 늘어진 채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이 잠겨 있던.
그들의 검붉은 핏물이 먹처럼 번져가고 있던…… 저주의 시작.
“…….”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틀어쥐는 것 같았다.
결은 잠시 눈을 감고 폐부에 억지로 숨을 집어넣었다.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른 그는 무겁게 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달마저 흐릿한 월영만 남기고 있을 뿐이었다.
빛 한 점 없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복잡한 감정들이 한데 엉키며 가슴을 메워왔다.
여연에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하였다.
반드시 가족들의 원한을 갚아주겠노라고.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이 저주받은 땅에 가족들의 피를 뿌린 만큼 그들의 피도 이 땅에 뿌려주겠노라고.
하지만 시간은 너무도 많이 흘러 있었다.
그날의 단서를 찾기조차 어려울 만큼.
적들은 너무도 많았으며, 죽을힘을 다해 단련했다 생각했던 힘은 저들 앞에서 한없이 약한 것이었다.
얽힌 타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데 미친 척 잘라낼 수도 없었다.
끝도 없는 원한이 불길처럼 치솟고 있으나.
‘한성조…….’그 어리석은 것이 자꾸 이 불길 속으로 함께 뛰어들겠다고 하여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을 끌 수도 없어서.
“너와 내가……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나의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는.
나의 가족들은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허공에 대고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을 수밖에.
끝내 결은 메꿔진 연못을 더 볼 수 없어 자리를 떠났다.
다시금 중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사랑채로 향하였다.
연못 자리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누군가 발목을 붙잡듯 걸음이 무거워졌다.
온전히 마주할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는 과거의 심연.
결국 얼마 못 가 다시 멈춰 서고 말았다.
사방이 어둡다. 세상에 저 하나 남은 것처럼.
모두가 나를 버린 것처럼.
막막함이 가슴을 짓누르던 그때.
“나리, 어찌 나와 계시어요?”
청아한 목소리가 결의 세상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고개를 돌리니, 찻상을 낑낑 들고 오던 단이가 저를 향해 싱긋이 웃어 보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두웠던 세상에 별 하나가 빛을 밝혔다.
“오늘 차는, 이곳에서 마시면 좋겠구나.”
“밖에서요? 네. 그럼 이곳에서 준비하겠습니다.”
단이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적당한 곳에 찻상을 내려놓았다.
흙바닥에 치마가 더러워지지 않게 야무지게 갈무리한 후, 단이는 성심껏 차를 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향을 피운 것처럼 찻잔 속에 흰 김이 피어올랐다.
결은 단이의 숨결이 담긴 찻잔을 받아 조금씩 제 입안으로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그런 결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피던 단이는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분명 제가 마셨을 땐 맛도, 향도 낮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차였다.
그런데 차를 마시는 결의 표정이 유난히 좋지 않아 보였다.
차가운 바람에 차가 금방 식었나. 아니면 향이 벌써 다 날아갔나.
매일같이 결의 표정만 살피다 보니 미세한 차이도 금세 알아챈 단이라.
차 맛에 대해 묻지 않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마음에 걸렸다.
나리께서 슬퍼 보이셔서.
그것이 싫어서.
“혹, 안 좋으시어요?”
하여 조심스럽게 물으니.
“……밤하늘이 너무 어두운 듯하여.”
한참 만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밤하늘이 그럼 어둡지, 밝은 밤하늘도 있다던가.
뜻을 알 수 없는 대답에 단이는 더욱 의아해하며 결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낮에 있던 일 때문인가…….’
생각해 보니, 결의 낯빛이 어두워진 게 성조의 아버지란 사람이 다녀간 뒤부터였던 것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결코 좋은 사이 같지는 않았다.
정회에게 향하던 그의 눈빛이 무척 시리게 느껴졌던 걸 보면.
‘꼭 원망 같았어.’
한데 지금은 원망이 있던 자리에 쓸쓸함만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차갑고 단단해 보이던 나리가, 그 차가움에 스스로 갇혀 더욱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나리의 외로움은 겨울과 같아 주위를 모두 서느렇게 만든다던가.
단이는 어쩐지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듯 시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저런 표정을 지으실까.’
그리고 저 표정을 보는 나는, 왜 이리 가슴이 미어지는 걸까.
아무래도 나리 말씀대로 밤하늘이 너무 까매서 그런가 보다.
달도 없이, 구름만 잔뜩 끼어서.
그 작은 별 하나 보이지 않아서.
‘나리께서 슬퍼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단이가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의 눈동자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다시 차를 우릴 것도 아닌데 무얼 저리 열심히 하나.
조용히 지켜보길 잠시.
그의 눈앞에 별안간 별 하나가 불쑥 나타나 주위를 밝혔다.
자세히 보니 별이 아니라 차부 속에 든 불씨였다.
하늘에 닿기엔 턱없이 모자란 높이건만.
까치발까지 하고서 팔을 쭉 뻗어 올린 단이가 차부 뒤로 고개를 빼꼼 기울이며 물었다.
“나리! 이제 하늘이 좀 밝지요?”
그보다 더 밝은 미소가 달처럼 단이의 얼굴에 떠올랐다.
작게 일렁이는 불빛을 따라 결의 눈빛 또한 흔들렸다.
하늘이 밝아졌으니, 이제 나리의 마음도 괜찮으시지요?
묻지 않은 질문이 단이의 순수한 눈망울 안에 가득 담겨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더니.
다 저 아이의 눈에 들어 있었나 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리 눈이 부시는 걸 보면.
“밝다. 눈이 부시도록.”
얼어붙어 있던 결의 입가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품었다.
또다시 마주한 그의 미소에 단이의 마음속에도 별이 콕콕 박히다가 이내 환한 보름달이 떴다.
떠오른 보름달에 달 토끼도 함께 온 걸까.
쿵덕쿵덕, 떡방아라도 찧는지 벅찬 가슴이 크게 두근거린다.
온몸이 달을 따라 둥실 떠오를 만큼.
‘나리의 마음에도 이런 보름달이 뜨면 좋을 텐데…….’
간절한 바람 하나가 달보다 더 높이 떠올랐다.
해사하게 웃는 단이를 따라 결의 미소도 한층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