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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26화 (26/100)

26화

그런데 그때.

휘잉-.

한순간 세찬 바람이 일더니, 단이가 들고 있던 차부 속 불씨가 순식간에 꺼지고 말았다.

“아! 안 되는데…….”

단이가 안타까운 얼굴로 차부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더 나리의 하늘을 밝혀드리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솔방울 숯이 너무 약했던 모양이다.

“제가 금방 다시 불을 피울게요, 나리. 조금만 기다려주시어요.”

“괜찮다.”

다시 차로의 숯불을 가져오려던 찰나, 결이 커다란 손으로 차부를 가져갔다.

“향을 피운 듯하여 좋구나.”

그의 말대로 불이 꺼진 차부 속에선 엷은 연기 한 줄기가 고요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

다시 어두워진 사위에도 결은 아까처럼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단이는 다시금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연기와 그 너머의 결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빛을 가져가버렸나 했더니.

다행히 빛은 온전히 나리의 마음으로 스며들었나 보다.

나리께서 저리 편안한 얼굴을 하고 계신 걸 보면.

“어!”

한참 결의 얼굴만 바라보던 단이가 문득 어느 한곳을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나리, 저것 좀 보시어요! 달이 떴어요!”

단이의 손끝을 따라 결도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았다.

과연 잔뜩 끼었던 구름이 걷히고 달이 환하게 빛을 비추고 있었다.

“와아……. 달이 엄청 밝아요, 나리.”

달을 향해 더 가까이 걸어간 단이는 입까지 작게 벌린 채 둥실 떠오른 달을 보았다.

그녀의 뒤에 선 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감상을 더했다.

“그래. 참으로 밝구나.”

하지만 어째서인지 결의 시선은 줄곧 단이에게만 머무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달인 것처럼.

그녀로 인해 주위가 밝아진 것처럼.

이제껏 그에게 다비는 차 시중드는 아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늘 곁에 있으면서도 의식하지 못하는 공기와도 같았고, 그랬기에 차를 마실 때를 제외하곤 각별히 신경을 쓸 일도 없었다.

저 아이가 없어지면 그 다음 아이가, 그 다음 아이가 없어지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늘 채워주었으니.

그들은 언제나 다비였고, 혹은 그저 다동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찌 너는 이리 다른 것인지.’자꾸만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는 단이가 결은 처음으로 특별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혼자만의 선을 그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제 영역에, 저 아이가 멋대로 발을 들인 기분.

그저 흔한 다비로서가 아닌 단이 그 자체로.

그런데 그게, 어쩐지 싫지만은 않다.

아니……. 조금 더 들어와도 될 것만 같다.

저 아이라면. 저 아이만은.

조금 더 가까이 두어도 괜찮을 것만 같다.

“으앗!”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나방 한 마리가 단이의 머리에 앉았다.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제법 큰 나방이라.

기겁한 단이가 눈을 질끈 감고 양 주먹을 꼭 말아 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나리, 나리……! 이것 좀 제발 떼 주시어요!”

매순간 반응이 생생한 아이라.

벌레 하나에 저리 오들오들 떠는 것이 퍽 우스우면서도 귀여웠다.

작게 실소를 흘린 결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팔을 휘두르면 금방 날아갈 줄 알았더니. 머리카락에 발이라도 엉켰는지 나방은 쉬이 떠나질 않았다.

“갔어요?”

“아직.”

“힝…….”

고작 벌레 하나가 저리도 몸서리치게 싫을까.

단이는 거의 울상이 되어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괜히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리, 저만 두고 가시면 안 돼요. 꼭 나방 떼 주시고 가셔야 해요!”

“…….”

“나리? 나리이!”

“가만히 있거라. 움직이면 네 이마로 내려올 것 같으니.”

결은 웃음을 참으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농을 쳤다.

답지 않은 장난이었다.

그럼에도 순진한 단이는 깜빡 속아 넘어가 입술까지 앙다물고 결의 말을 따랐다.

그 야무지게 맞다문 입술이, 왜 그 순간 시선을 잡아끈 것인지.

붉디붉은 앵두처럼 촉촉한 윤기가 단이의 입술 위에 흐르고 있었다.

묘하게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윤기가.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졌다.

조금 전 차를 마셨는데도 목이 타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들이켜 삼키고 싶다.

네가 내게 물을 흘려보낸 그날처럼.

흠뻑 젖도록.

“…….”

의지를 반한 고개가 저도 모르게 점점 아래로 기울어졌다.

그녀의 유약한 숨소리가 들릴 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대로 널 삼켜버릴까.

다른 건 생각지 말고 널 가져볼까.

이토록 아팠으면, 하나쯤은 가져도 되지 않을까.

내가 온전히 원하는 걸…… 처음으로.

그 순간, 틀어진 시선 끝에 닿은 건 단이의 목에 둘러진 광목천이었다.

몇 번을 빨아 쓴 흔적이 보이는 너덜너덜한 광목천.

상처가 아물어 딱지가 앉고도 남았을 지금까지 저 천을 두르고 있다는 건 분명 흉한 상처를 가리기 위함일 터.

그것은 그날의 잔상을 떠올리게 함과 동시에, 자신의 처지를 새삼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몽롱했던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나 까짓 게 무엇을 원할 수 있다고.

결국 또, 이리 다치게 할 것을.

“…….”

결은 뒤늦게 단이의 머리에 붙어 있던 나방을 날려 보냈다.

“되었다.”

“휴……. 감사합니다, 나리.”

그제야 감았던 눈을 뜬 단이가 다시 배시시 웃어 보였다.

결은 굳은 눈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다 먼저 발길을 돌렸다.

“들어가 쉬거라.”

“아……. 네, 나리. 안녕히 주무십시오.”

등 뒤로 말간 목소리가 따라왔지만, 결은 돌아보지 않고 단이로부터 멀어졌다.

곧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찻상을 들고 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걸음을 멈춘 결은 멀어지는 단이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과 광목천이 바람처럼 밀려와 그의 속을 다시금 헤집어 놓았다.

요동치는 물결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너도.”

닿지 않을 대답이 허공으로 스러졌다.

그저 잠깐의 파동이기를.

아주 잠시 스쳤다가 금세 저만치 멀어지는 물결 같은 것이기를.

‘그러니…… 파동에 흔들린 표면이 나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일은 없기를.’나는 너를, 이 지독한 길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으니.

단이가 사라지고 없는 마당에서 결은 오래도록 홀로 서 있었다.

달은 다시 구름 뒤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오늘은 결이 등청을 하지 않는 날이었다.

새벽부터 어딜 급하게 간 건지, 결은 파루에 첫 차만 마시고 자리를 비웠더랬다.

덕분에 해초시까지는 휴식을 갖게 된 터라.

단이는 보선 어멈이 시킨 심부름을 할 겸 홀로 집을 나섰다.

그러나 모처럼 맞이한 자유 시간에도 그녀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부턴 어디든 함께 가야 한다 하셔 놓고선…….”

자신에겐 그저 쉬라고만 하고 훌쩍 나가버린 결이 괜스레 서운했던 까닭이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한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이다.

요 며칠 가까워졌다 느낀 것이 착각이라 느껴질 만큼 저만치 멀어져 버린 결이었다.

“내가 또 무엇을 잘못하였나?”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이번엔 정말 떠오르는 것이 없다.

어제만 하더라도 차부의 불씨를 보며 함께 웃음을 나누었으니까.

어쩌면 오늘 새벽, 평소보다 물을 조금 덜 끓인 제 기우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별일 아니겠지……. 얼른 심부름이나 하고 돌아가야겠다.”

폭 한숨을 내쉰 단이는 애써 생각을 비우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결을 따라 매일 같이 오간 덕에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길이었다.

일전의 안 좋았던 기억도 뒤로 한 채 단이는 자유롭게 시전을 누비고 다녔다.

“여기, 말씀하신 백반 가루 한 홉입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파시어요!”

보선 어멈이 시킨 물건을 챙긴 단이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나 걸었을까.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가려는데, 불현듯 어디선가 소란이 들려왔다.

하필이면 소란이 이는 곳이 그녀가 가려는 방향이라.

단이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누군가 무뢰배들과 시비가 붙은 듯했다.

“그래서, 우리한테 그 녀석을 못 넘기겠다?”

“남의 돈을 빼앗는 건 나쁜 짓이다.”

음……?

왠지 낯익은 목소리인데…….

단이는 뒷모습만 보이는 양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화려한 비단 옷에 고급 태사혜, 멀리서도 눈에 띄는 사치스러운 접선.

‘설마…….’단이는 뒷모습마저 익숙한 양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뒷모습만으로도 엄청난 부를 자랑하는 양반은 남루한 차림의 한 소년을 등 뒤에 감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소년 때문에 일이 벌어졌나 보다.

양반이 괜찮다 타이르자, 소년은 머뭇거리다 곧 혼자 도망쳤다.

그러자 무뢰배 중 가장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고개를 우둑우둑 비틀며 더욱 위협적으로 나왔다.

“하……. 이 번지르르한 샌님이 자꾸만 기어오르네.”

“기어오르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 쪽이겠지.”

“우린 양반이고 뭐고 안 봐줍니다.”

“나야말로 봐줄 생각 없으니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거라. 다들 한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듯한데, 내 특별히 너른 마음으로 보내주마.”

“책만 들여다보다가 현실 감각을 잊으셨나!”

무뢰배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날렵하게 주먹을 피한 양반은 잽싸게 발을 걷어차 그를 쓰러트렸다.

언뜻 보인 얼굴은, 분명한 성조였다.

“젠장! 다들 덤벼들어!”

남은 무리가 일제히 성조에게 달려들었다.

일대 다수의 상황임에도 그는 조금의 어려움 없이 그들을 상대했다.

오히려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임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무뢰배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봐주고 있다.

성조의 여유로운 얼굴만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저 비실한 한량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나 보다.

하나 둘 차례로 쓰러져 나가는 동료에 먼저 쓰러졌던 사내가 바득 이를 갈았다.

그는 성조가 다른 이들을 상대하는 사이 품속에서 작은 칼을 꺼내었다.

‘안 돼!’그 모습을 본 단이가 있는 힘껏 소리쳤다.

“나리, 뒤를 조심하시어요!”

단이의 외침에 성조가 몸을 틀었다.

칼끝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등을 스쳐 작은 생채기를 내었다.

성조는 재빠르게 발을 들어 사내의 얼굴을 차버렸다.

쿵!

저만치 날아간 거구의 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하지만 혼자서 장정들을 전부 때려눕히기엔 역시 한계가 있는 터라.

다시금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는 사내들에 성조가 쯧 혀를 찼다.

“어허이, 이 끈질긴 놈들 보소.”

곤란한 듯 눈썹을 비튼 성조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향해 싱긋 웃는 얼굴이 어쩐지 불안하다 싶던 순간.

“가자!”

순식간에 달려와 단이의 손목을 낚아챈 성조가 그녀를 데리고 뛰기 시작했다.

“으아아, 저는 갑자기 왜요오!”

“너 혼자 저곳에 남고 싶으냐?”

뒤를 돌아보니 쫓아오는 장정들의 살기가 어마무시한지라.

“더 빨리, 더 빨리요!”

헉 숨을 집어삼킨 단이는 필사적으로 성조와 함께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성조가 단이의 손을 고쳐 잡으며 앞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뛰어도 단이가 사내의 속도를 감당할 리 없었다.

점점 좁혀지는 거리에 단이가 두 손으로 매달리듯 성조의 손을 잡았다.

힐긋 뒤를 살핀 성조는 짧은 고민 끝에 결심한 듯 그녀를 보았다.

“꽉 잡거라.”

“꺄악!”

그러더니 돌연 단이를 안아들고 뛰기 시작했다.

한순간 높아진 시야에 겁을 먹은 단이가 성조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 야무진 손을 본 성조의 눈매가 더욱 길게 휘었다.

손쉽게 거리를 벌린 성조는 곧장 어느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단이를 품에 안은 채 움푹 팬 구석에 앉아 몸을 숨겼다.

“윽…….”

순간 상처가 흙벽에 쓸렸는지 성조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단이는 놀란 나머지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아버렸다.

“어디로 간 거지?”

“우린 이쪽을 살필 테니, 너흰 저쪽으로 가 봐!”

“예!”

근처에서 우왕좌왕하던 사내들이 곧 다른 쪽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숨죽이길 한참.

단이는 뒤늦게 성조의 입을 너무 꽉 틀어막았음을 깨닫고 그에게서 떨어졌다.

“소, 송구하옵니다.”

손끝으로 느릿하게 입술을 문지른 성조가 이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는 좋았는데.”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작은 몸이 쉽게 딸려와 그의 품에 도로 안겼다.

“역시 맹랑해. 양반의 입을 손으로 막을 생각도 다 하고.”

놀라 커다래진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의 눈길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근데, 그게 싫지는 않단 말이지.”

이윽고 멈춘 곳은 그녀의 붉은 입술 위.

짙은 시선이 열기를 더하며 배회하였다.

정말로, 다가올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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