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근데, 그게 싫지는 않단 말이지.”
성조의 시선이 차츰 콧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천천히, 느릿하게.
단이의 얼굴에 시선으로 하나하나 흔적을 남기는 것처럼.
그녀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내쉬는 숨에 열기가 더해지던, 아찔한 순간.
“차라리 도와드리지 말 것을 그랬습니다.”
묘한 기류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단이가 성조의 어깨를 밀치다시피 하며 일어났다.
그러곤 새침한 눈길로 성조를 흘겨보았다.
“이리 흙바닥에 구르는 걸 좋아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 말에 아래를 살피니 엉망이 된 단이의 옷이 눈에 보였다.
성조의 비단옷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하필 앉은 곳이 녹은 눈 때문에 진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뒷골목 거지꼴이 됐건만.
성조는 뭐가 그리 좋은지, 탈탈 옷을 터는 단이를 보며 기분 좋게 입가를 늘였다.
“모쪼록 내 오늘은 너에게 어마어마한 빚을 졌구나. 정말로 보답을 해야겠어.”
“겨우 이 정도로 무슨 어마어마한 빚까지 간답니까? 제가 없어도 충분히 해결하셨을 분이.”
단이는 얼룩덜룩해진 치마를 곤란한 듯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툴툴거리는 얼굴마저 어여쁘다.
왜일까.
교태라곤 전혀 부릴 줄 모르는 네가 이 순간 왜 이리 어여뻐 보일까.
뜻하지 않은 순간 내 앞에 나타난 네가 왜 이리 반가울까.
너는 왜 이리, 자꾸 시선을 끄는 걸까.
밀려오는 물음에 따라오는 답은 없는지라.
성조는 그저 새어 나오는 웃음으로 이 설명 못할 감정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래도 네 덕에 큰 해는 면하였지 않느냐. 그것이 가장 큰 은혜다.”
자리에서 일어난 성조가 단이의 머리에 묻은 흙을 조심스럽게 털어주었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더러워진 제 옷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단이만 보인다는 듯.
“그러니 이번만큼은 거절하지 말거라. 내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니.”
당황한 눈으로 성조를 보던 단이가 미간을 좁혔다.
“참 막무가내시어요.”
“그래. 난 참으로 막무가내다. 그러니 내게 마음껏 보답할 기회를 다오.”
거절해도 듣지 않을 양반이라는 건 이미 경험한 뒤였다.
단이는 체념하듯 폭 한숨을 내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어요. 어차피 말려도 안 들으실 것 같으니.”
“오랜만에 재밌는 고민거리가 생겼구나.”
드디어 받아낸 승낙에 성조가 얼굴 가득 미소를 그렸다.
감정을 숨기는 가면 같은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짓는 미소였다.
얼마 만에 지어보는지 모를 진짜 미소.
***
대나무가 빽빽하게 수놓인 울창한 숲 속.
훅, 훅-!
사그락사그락 흔들리는 대나무 잎 위로 빠르게 적운검이 스쳐 지나갔다.
눈 깜짝할 새 잘린 대나무 잎들이 허공에 흩날리고, 그 잎들이 바닥에 닿기 전에 또 다른 잎들이 잘려나갔다.
새벽안개가 자욱하던 숲은 어느새 밝은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벌써 한 시진이 훌쩍 넘도록 검을 휘두르고 있건만.
결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검술을 이어나갔다.
땀으로 온몸이 젖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몸이 힘들수록 생각도, 감정도 점점 사라지기에.
결은 한계라고 생각될 때마다 더욱 힘주어 몸을 움직였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몸을 혹사시켜야 할 만큼, 지금 머릿속이 많이 복잡하다는 뜻이었다.
사사삭, 탁!
굵직한 대나무 세 그루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와 함께 결 역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억, 헉…….”
긴 전투를 끝낸 것처럼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바닥에 적운검을 꽂은 결은 아예 길게 드러누웠다.
땀이 비처럼 쏟아지는 얼굴을 쓸어내리자 저 멀리 말간 하늘이 보였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어두웠던 하늘은 어느새 푸른 쪽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지저귀는 새와 조금씩 불어오는 바람, 간간이 흔들리는 길쭉한 대나무 잎들.
그리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까지.
평화. 그 두 글자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정도로 혹독하게 몸을 움직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각들이 비워지곤 했었다.
분에 찬 감정도, 한스러웠던 기억도 잠시나마 모두 잊히곤 하였다.
늘 그랬는데.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그래야 하는데.
‘나리, 이제 하늘이 좀 밝지요?’
어찌하여 너의 얼굴은 더 선명해지는 것일까.
집중하는 커다란 눈망울, 재잘거리는 목소리, 차를 우리는 손길.
티 하나 없이 맑은 미소.
그 미소를 눈부시게 그리던, 입술.
무엇 하나 선명하지 않은 것이 없어 차마 외면할 수조차 없었다.
비워낸 공간만큼 네 생각이 차올라서 다른 건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마치 너만 생각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잊은 것처럼.
눈을 떠도 네가 그려지고 눈을 감아도 네가 그려지니, 나는 어찌하여야 좋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그랬다면 다른 생각들과 뒤엉켜 네가 조금은 희미해졌을 텐데.
결의 입가에 허탈한 한숨이 맺혔다.
해가 중천에 뜬 것을 보니 이미 정오시가 지난 듯했다.
차를 마셔야 할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흘러간 시간을 깨닫고 나니 뒤늦게 갈증이 일었다.
지금 차 생각이 이리 간절한 것은 땀을 많이 흘린 탓일까.
아니면 단순한 습관 탓일까.
그도 아니면, 네가 보고 싶은 탓일까.
“…….”
아무래도 네가 보고 싶어 그러나 보다.
타는 듯한 갈증보다 허망한 감정이 더욱 짙은 것을 보면.
“……보고 싶다.”
오랜 침묵 끝, 억누르고 억누르다 넘쳐 흘러버린 진심.
쓸쓸한 음성은 곧 바람결에 실려 멀리 흩어졌다.
저 바람을 따라가면 아주 쉽게 너에게 다가갈 수 있을 텐데.
가도 될까.
가선 안 될까.
너는, 어떻게 생각할까.
“…….”
결은 흐려지는 눈빛을 눈꺼풀 아래 감춰버렸다.
하늘조차 보지 못하도록, 누구도 이 마음을 볼 수 없도록.
네가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는 욕심조차 모두 감출 수 있도록.
가슴속에 찢어진 깃발 하나가 세워진 기분이다.
바람은 언제나 너를 향한 방향.
‘부디 이 깃발이…… 깃대를 벗어나 너에게 날아가는 일은 없기를.’결은 이 순간 간절히 바랐다.
오로지 단이를 위해.
***
깊은 밤.
이선은 홀로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이미 야장의를 입은 지가 오래 되었지만, 오늘은 쉬이 잠을 청하기가 어려워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근래 북방에서 오랑캐의 수가 급격히 많아졌다.
결이 있을 때보다 곱절은 늘어난 숫자.
북방 귀신이 여연을 떠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오랑캐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병력을 증가시키고 성벽을 보수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국경을 넘어와 약탈을 일삼으니, 여연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까지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탓에 최근 조정에선 서결 장군을 다시 여연으로 보내란 상소문이 빗발치고 있었다.
게다가 대신들은 대놓고 결이 한양에 있는 것을 아니꼬워하니.
강수를 두려는 것인지, 차라리 남쪽 용성으로 국경선을 후퇴하자는 말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품자니 가시가 너무 많아 피 흘리기를 면할 수 없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스승에 대한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 데다 그만한 장수를 다시 얻을 수도 없을진대…….’단순히 결을 지키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조선에 유능한 장군이 이토록 없는가에 대한 고심도 함께였다.
시름이 깊어질수록 술병의 바닥 또한 깊어지는 터.
자리를 지키던 상선이 결국 참다못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밤이 많이 깊었사옵니다.”
그 말에 느릿하게 고개를 든 이선이 동창을 바라보았다.
달무리가 전보다 더 짙어진 것을 보니 과연 상선의 말대로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다.
“시간은 참 야속하구나. 근심거리는 이리 많이 던져 놓고, 어찌 홀로 도망을 간단 말이냐.”
“뒤에 오는 시간이 그 답을 가져오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러는 경우도 있었지.”
오랜 세월이 흘러 결을 다시 한양에 불러들일 수 있게 된 것처럼.
하지만 이번 역시 시간이 답이 될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렇다고 긴긴밤을 술로 지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선은 잡은 술병을 내려놓고 상선을 보았다.
“오랜만에 선정 옹주가 달이는 차를 마시고 싶구나.”
“침소에 드셨는지 살펴보고 오겠사옵니다.”
상선이 깊이 허리를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천천히 가시라는 상선의 곤란한 목소리와 함께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열린 문 너머 옹주, 선정의 말간 얼굴이 나타났다.
일전에 단이를 운종가까지 끌고 갔던 바로 그 아씨였다.
“아바마마, 소녀를 찾으시었다 들었사옵니다.”
싱긋 웃은 선정이 이선을 향해 절을 올렸다.
선정 옹주는 이선이 자신의 딸들 가운데서도 가장 어여삐 여기는 딸이라.
내내 근심이 가득했던 얼굴에 비로소 미소 한 줌이 묻어나왔다.
“혹 자고 있는 걸 깨운 것이냐.”
“아니옵니다. 소녀, 잠이 오지 않아 책을 읽고 있었사옵니다.”
“또 천 상궁이 구해다 준 책 말이냐.”
그 말에 선정의 뒤로 찻상을 들고 따라왔던 천 상궁이 흠칫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구해다 준 책이 다름 아닌 저잣거리에 나도는 애정 소설이라.
선정은 당황하면서도 깐깐한 천 상궁이 귀 끝을 붉히는 것을 보곤 몰래 미소를 지었다.
궁중 여인이 천한 잡서를 읽는 것은 엄히 꾸중해야 할 일이건만. 이선은 그저 어린 딸의 귀여운 유희라고만 생각하며 조용히 눈감아주었다.
이윽고 선정이 차를 옅게 우려 잔을 채웠다.
차를 마시는 이선을 보며 그녀가 염려를 담아 물었다.
“또 속병이 드셨사옵니까. 근자에 소녀의 차를 찾지 않으시어 어심이 평안하신 줄로만 알았사옵니다.”
“체기가 단단히 들었는지, 요즘은 산채만 먹어도 기름진 고기를 먹은 듯 속이 더부룩하구나.”
이선은 힘없이 실소를 내비치며 차를 마셨다.
그나마 뜨거운 향이 몸속에 퍼지니 내내 긴장되었던 근육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결이 떠올랐다.
조금 전과 같이 골치 아픈 문제로서가 아닌, 그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곳곳에서 서결 장군의 다비 이야기가 한창이라지.”
“북방 귀신의 저주를 춘풍 꽃물로 녹인다던 그 다비 말입니까.”
“그래. 그 다비.”
혼잣말처럼 흘린 말에 선정이 풍문을 더하였다.
그 다비가 탈진하여 쓰러진 결을 구하였다는 것은 이미 궐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또한 장터에서 머리꽂이를 사준 일 역시 온 도성에 퍼져 있었다.
저주에 걸려 물을 마시지 못하는 그가 다비의 차는 마실 수 있다 하니, 이보다 신이한 일이 또 있을까.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쉬이 믿기 힘든 일이긴 했다.
하여 이선 또한 그 다비가 궁금하던 차였다.
“좋은 아이 같았습니다.”
선정의 웃음 띤 목소리에 이선이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그걸 옹주가 어찌 아느냐.”
“일전에 제가 몰래 궐 밖을 나섰던 일을 기억하시옵니까?”
“지금 생각해도 눈앞이 아찔하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벌이지 말라.”
“그때 일은 소녀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앞으로는 절대 아바마마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을 것이옵니다.”
다짐에 다짐을 더한 선정이 이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날 그 다비를 만났사옵니다. 말을 나눈 시간은 짧았으나, 참으로 어진 아이였사옵니다.”
그 조그만 것이 어찌 그리 눈치가 빠른지.
아직도 군사들 앞에서 저를 아씨라 부르며 이끌던 것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왔다.
앳된 얼굴과 달리 말이며 행동이며 야무진 것도 퍽 마음에 들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던가.
그러잖아도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선정은 말이 나온 김에 이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내비쳤다.
“하여 소녀, 아바마마께 작은 청이 하나 있사옵니다.”
“옹주의 청인데 내 마다할 리가. 말해보아라.”
“조만간 그 아이를 소녀의 처소에 불러 함께 차를 마시고 싶사옵니다.”
“그건 옹주의 뜻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
“듣자 하니, 서결 장군의 다비는 주인의 허락 없이 아무 곳도 가지 못한다고 들어서…….”
그 말인 즉, 함부로 서결을 만날 수 없는 저 대신 결에게 허락을 구해달란 뜻이었다.
왕의 청을 감히 거역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이선은 옹주의 수줍은 청이 귀여워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톡, 톡. 찻잔을 가볍게 건드리던 그가 곧 간단한 해답을 알려주었다.
“서결 장군에겐 차를 마시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그 사이 시간을 알아내어 잠시 다비를 빌리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을 듯싶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환히 웃으며 좋아하는 선정의 모습에 이선 또한 기꺼웠다.
대체 어떤 아이기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옹주가 저리 좋아할까.
단이에 대한 궁금증이 한층 더 깊어졌다.
‘저주를 푸는 아이라…….’
이선은 남은 차를 조용히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부디 그 다비가 한겨울 얼어붙은 연못 같은 결에게 한 떨기 봄꽃이 되어주길, 하여 따스한 봄바람을 함께 안겨다 주길.
이선은 진심으로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