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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28화 (28/100)

28화

달마저 구름에 가려진 칠흑 같은 밤.

압록을 건너기 전 의주에 위치한 마지막 객잔에선 명나라로 향하는 상단이 머물고 있었다.

한곳에는 인삼과 비단부터 시작해 각종 상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상인들은 좁은 객방에 다닥다닥 붙어 겨우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떠나야 하는 길.

모두가 초저녁부터 잠이 든 터라 사위는 코 고는 소리를 제외하곤 일찍이 고요하였다.

“하암…….”

객잔 앞을 지키고 있던 상단 소속의 호위 무사가 길게 하품을 하였다.

동이 틀 때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 무료했던지라.

어차피 저 말고도 객잔을 지키는 이들이 많아, 잠시 눈이라도 붙일까 생각하던 그때였다.

“윽……!”

난데없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눈앞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천으로 두른 이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다른 장정들은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비명 한 번 지를 틈 없이 그대로 숨이 끊기고 말았다.

“…….”

사내가 어둠 속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와 똑같은 복장을 한 십수 명의 도적들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 없이 객잔으로 들어간 그들은 상단이 가져온 물품들을 죄 꺼내 가져온 수레에 담기 시작했다.

기척에 잠시 객방을 나왔던 상인 몇은 쥐도 새도 모르게 바깥 장정들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됐다. 이제 가지.”

도적들은 상품들을 모조리 챙겨 객잔을 떠났다.

지금 훔친 물건들이 상단의 1년 치 밑천이라는 건 그들이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마침내 객잔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숲에 다다른 그들은 약탈한 물건들을 살폈다.

“좋아. 이번 물건들도 나쁘지 않군.”

도적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그중 절반을 가리켰다.

“여기서 저기까지 모두 배에 실어.”

“나머지는 역시…….”

“그래. 모두 따로 나누어 하나씩 그곳으로 보내.”

“예!”

그의 부하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향이 갈리는 물품들을 보며 우두머리는 날카로운 눈을 빛냈다.

그의 눈 밑으로 언뜻 드러난 흉터가 다시 복면 뒤로 숨겨졌다.

***

새벽같이 채비를 마친 단이가 결과 함께 길을 나섰다.

고요한 새벽길 위로 말발굽과 단이의 발소리만 자박자박 울려 퍼졌다.

‘오늘도 별말씀 없으시려나…….’아, 원래도 등청할 땐 말씀이 없으셨지.

힐긋 결의 얼굴을 살피던 단이가 풀 죽어 고개를 숙였다.

요 며칠간 결의 태도가 또 예전처럼 무뚝뚝해진 탓이었다.

차를 올릴 때에도, 목욕 시중 때에도, 그는 단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콕 집어 설명할 순 없었지만 묘하게 피하는 느낌이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따금 마주치는 눈빛의 뜻이 언짢음이 아닌 처연함이라는 것이었다.

태산같이 단단하신 나리가 어찌 그런 눈빛을 하실까.

하지만 그 연유를 알 수 없고, 무엇 때문이냐 물을 수는 더더욱 없으니.

단이는 그저 결의 눈치만 살필 수밖에 없었다.

여태 겨울에 머무르는 듯한 나리께서 다시 봄 햇살처럼 웃어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

그런데 막 육조거리에 다다랐을 때쯤.

저 멀리 훈련원 앞에 웬 낯선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녹색의 단배자에 가체를 쓴 여인은 언뜻 보기에도 보통 인물이 아닌 듯 눈빛이 단단하였다.

주변을 조용히 살피던 그녀가 마침내 결과 단이를 발견하였다.

그녀는 예와 격식을 차려 이쪽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결은 단숨에 말에서 내려 단이의 앞부터 가로막았다.

마치 그녀를 지키듯이.

덕분에 단이의 작은 몸이 그의 커다란 등 뒤로 숨겨졌다.

“누구시오.”

“선정 옹주 아기씨를 뫼시고 있는 천 상궁이라 하옵니다.”

옹주란 단어에 결의 눈썹이 비틀어졌다.

옹주의 사람이 훈련원에 올 이유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다.

천 상궁은 결의 뒤에 숨겨진 단이를 힐긋 보곤 말을 이었다.

“옹주 아기씨께서 장군의 다비를 찾으시어, 결례를 무릅쓰고 이리 뫼시러 왔사옵니다.”

그 말에 뒤에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단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옹주라면 조선 임금의 딸이 아닌가.

그런 높으신 분께서 어찌 자신을 찾는지 알 수가 없으니.

눈짓으로 묻는 결에게 단이 역시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때, 문득 한 장면이 결의 머리를 스쳤다.

‘그럼 전하께서 내 다시(茶時)를 하문하셨던 것이…….’잠시 고민하던 결은 어쩔 수 없이 단이에게 앞길을 비켜주었다.

제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오시가 되기 전까지 돌아오되, 혹 일이 있어 제시간에 올 수 없거든 사람을 보낼 테니 그 자에게 알리거라.”

“예……. 나리.”

단이는 결도 없이 높으신 분을 뵈러 가야 한다는 것이 사뭇 걱정되었다.

하지만 바쁜 그에게 함께 가 달라 칭얼거릴 수도 없는 노릇.

결국 단이는 미적거리다 천 상궁의 곁으로 갔다.

“옹주 아기씨께서도 말씀하신 시간 전에는 돌려보내실 것이옵니다.”

천 상궁은 결을 향해 한 번 더 허리를 숙이곤 몸을 돌렸다.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나리. 늦지 않게 돌아올 터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어요!”

단이는 마지막까지 불안한 눈으로 결을 바라보다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결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서 단이를 바라보았다.

***

경복궁 궐문을 지난 단이는 행여 길이라도 잃을까 싶어 천 상궁의 뒤에 바짝 붙었다.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라 그럴까.

땅을 딛고 서 있는 것마저 감히 황송하여 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특히나 중간중간 돌로 만들어진 신수들이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꾸짖는 것만 같아 단이의 어깨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마침내 커다란 별당이 눈앞에 나타났다.

화선당(花仙堂). 현판에 멋스러운 필체로 새겨진 글씨가 이곳의 주인을 알렸다.

“옹주 아기씨를 뵈면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절대 고개를 들지 말아야 한다.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천 상궁은 이외에도 옹주 앞에서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해 빠르게 읊었다.

그러곤 지체 없이 화선당 안으로 단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이윽고 어느 문 앞에 선 천 상궁이 허리를 숙이며 고하였다.

“옹주 아기씨. 서결 장군의 다비를 데리고 왔사옵니다.”

“안으로 들이게.”

천 상궁을 따라 고개를 바짝 숙이고 있던 단이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온갖 걱정이 한데 뭉쳐 머릿속이 새하얘질 지경이었다.

“이리 가까이 오거라.”

옹주의 부름에 단이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어 그 앞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앉으니, 옹주의 가녀린 목소리가 웃음을 띠며 이어졌다.

“고개를 들거라.”

단이는 큰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옹주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어……! 그때 그 이상한 아씨?!”

단이는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선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말았다.

눈앞에 앉은 이는 분명 일전에 만났던 그 아씨였다.

귀한 댁 여식인 줄은 알았으나 설마 옹주였을 줄이야.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분을 만났던 건지 뒤늦게 실감이 났다.

“어허,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옹주 아기씨를 가리키느냐!”

한낱 다비가 옹주를 향해 삿대질을 하니, 노한 천 상궁이 대뜸 호통부터 쳤다.

그러나 선정이 웃으며 그녀를 말렸다.

“그냥 두게. 놀라서 그런 것일 테니.”

선정은 단이를 향해 다정히 말하였다.

“일찍이 너를 부르고 싶었으나, 내 근신을 해야 할 일이 있어 조금 늦었구나.”

콧잔등을 찡긋하며 웃는 것이, 아무래도 그날 궁을 빠져나간 일로 혼이 났던 모양이다.

단이는 여전히 얼떨떨하였다.

무어라 답해야 좋을지 몰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니, 선정이 그녀의 곤란함을 읽곤 또 한 번 낮게 웃음을 흘렸다.

“겁낼 것 없다. 내 일전에 네게 말했던 대로 보답을 하려 부른 것이니.”

그러곤 천 상궁을 향해 나직이 일렀다.

“천 상궁, 찻상을 가져다주게.”

“예, 옹주 아기씨.”

천 상궁이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옹주방을 나섰다.

다시 돌아온 그녀가 선정 앞에 찻상을 놓았다.

찻상 위에는 곱게 갈린 산차와 차제구,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다식이 놓여 있었다.

“내 너에게 보답을 할 겸, 함께 차라도 마시면 좋겠다 싶어 이리 불렀다.”

“아…… 송구하오나, 저는 서결 나리의 허락이 없으면 함부로 차를 우려선 안 되는 터라…….”

“걱정 말거라. 나도 그런 것쯤은 아느니.”

선정은 익숙하게 차부에 미리 끓인 물과 차를 넣었다.

그러곤 잔잔히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싱긋이 웃었다.

보는 이를 편하게 만들어주는 미소였다.

“이곳에선 모두가 내가 우린 차를 마신다. 그러니 너도 개의치 말고 내가 주는 차를 마셔다오.”

“……예, 옹주 아기씨.”

단이는 두 눈을 깜빡이며 선정이 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제법 차를 즐기는 모양인지, 차제구를 쓰는 것이 무척 능숙해 보였다.

두 찻잔에 차를 따른 선정이 그중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곤 단이가 찻잔에 입을 대기 무섭게 한껏 기대하는 눈으로 물었다.

“어떠하냐. 내 차도 제법 마실 만하느냐?”

차를 한 모금 마신 단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향이 무척이나 그윽합니다. 떫은맛 뒤에 단맛이 이뿌리에 남는데, 그런데도 입안이 개운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차 맛에 대해 잘 알지 못하여 무조건 좋다고만 하거늘.

진심이 담긴 단이의 칭찬에 선정이 더욱 환하게 웃었다.

“다비가 되기 전부터 다점을 운영하였다고 들었다. 그곳에선 어떤 차를 다루었는지 얘기를 듣고 싶구나.”

두 사람 사이에 차를 주제로 한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긴장하여 쭈뼛거렸으나, 단이는 곧 제가 더 신이 나서 재잘재잘 말을 이어나갔다.

보선 어멈만큼은 아니어도 선정 역시 차에 대한 조예가 깊어 이런저런 나눌 이야기가 많았던 것이다.

차에 대한 생각이나 취향이 서로 맞춘 듯 같으니, 이만한 차벗은 둘도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차에 곁들이는 다식도 무척이나 맛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달짝지근한 것이 입안에 착 감겨 깔끔한 차의 맛이 더욱 돋보였다.

이제껏 먹어본 다식 중 단연코 별미 중의 별미였다.

그렇게 한창 대화를 이어가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선정이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너에 대해 새로운 소문이 돌고 있더구나.”

“소문이요?”

“네가 북방 귀신의 저주를 녹일 춘풍 꽃물이라 하던데.”

그 말에 진달래꽃이 핀 것처럼 단이의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나리의 저주를 녹일 춘풍 꽃물이라니.

다른 건 몰라도 춘풍 꽃물이 남녀 간의 애정, 특히 사내의 마음에 생긴 연정을 은근히 일컫는 말임을 단이도 모르지 않았다.

생각지 못한 풍문에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 그런 것은 절대 아니어요! 제가 어찌 감히…….”

“원래 저잣거리 소문은 그리 도는 것이다. 그저 눈길 한 번 준 것만으로 어느 순간 연모하는 사이가 되어 있지.”

단이의 뺨이 한층 더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옆꽂이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결에게 선물을 받은 뒤로, 그를 생각할 때마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 순진무구한 반응에 선정이 설핏 웃음을 흘렸다.

남우세스러워 저러는 것인지, 아니면 속마음을 들켜서 저러는 것인지.

연모라는 한 단어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저 아이가 선정의 눈엔 참으로 순수해 보였다.

마치 제 막냇동생 같기도 하여 더욱 귀여웠다.

“서결 장군에 대하여선 소문만 익히 들었는데. 너를 보니 왠지 그렇게 무섭기만 한 자는 아닌 것 같구나.”

“네. 나리께선 조금 무뚝뚝하시지만, 그래도 참으로 좋으신 분이어요.”

물론 그 속을 너무 모르겠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뭐, 본래도 그리 살가운 성격은 아니셨으니까.’그저 언제 또 그때와 같은 미소를 보여주시려나, 단이는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선정은 그런 단이를 어여삐 바라보며 말하였다.

“앞으로도 종종 이리 부를 터이니, 오늘처럼 함께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자꾸나. 내 그러잖아도 옹주방에만 있어 적적하던 차에 너 같은 차벗이 생기면 참으로 좋을 것 같구나.”

“언제든 불러주시어요. 옹주 아기씨께서 부르시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오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좋구나. 그 약조, 꼭 지켜야 한다?”

“예, 옹주 아기씨.”

단이와 선정이 서로 마주 보며 말간 미소를 주고받았다.

향긋한 차 내음이 두 여인의 주위에 짙게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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