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단이를 배웅한다는 핑계로 선정 역시 옹주방을 떠났다.
그리 꾸중을 듣고도 바깥 공기가 또 쐬고 싶었는지, 그녀는 따갑게 쳐다보는 천 상궁을 미소로 달래며 단이를 데리고 궐내를 가로질렀다.
“옹주 아기씨, 이곳까진 어쩐 일이시옵니까.”
그때, 낮게 목을 긁는 듯한 쉰 목소리가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준백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무리와 함께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상.”
선정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며 준백 무리를 마주했다.
단이와 있을 때와는 달리 사뭇 근엄해진 목소리.
뜻하지 않게 마주친 준백이 그녀는 조금도 달갑지 않은 듯했다.
준백과의 만남이 불편한 건 단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꿈에 나왔던 그 사람이야…….’단이는 숨듯이 선정의 뒤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두근거렸다.
괜스레 불안하여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일전에 시장터에서 처음 준백을 만났을 때와 꼭 같은 순간이었다.
겨우 멀리서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왜 이리 몸이 경직되는 걸까.
내용도 잘 기억 안 나는 악몽 때문에?
하지만 고작 악몽 때문이라기엔 지금 느끼는 감정은 훨씬 더 깊었다.
어쩐지, 조금 더 본능적인 감각.
‘저 사람…… 왠지 모르게 무서워.’두려움. 지금 단이의 가슴을 헤집고 있는 건 분명 두려움이었다.
마치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느 순간에 그를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그것도, 지독한 악연으로.
‘저 계집……. 왠지 얼굴이 낯이 익은데.’그런 단이를 보는 준백의 눈가 역시 가늘어졌다.
하나 지금은 태평하게 계집 얼굴이나 뜯어볼 때가 아니었다.
준백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거두며 선정을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디 나들이라도 가시는 모양입니다. 처음 보는 나인까지 대동하고서.”
단이의 옷차림이 궁중의 복식과 전혀 다르다는 걸 모르지 않는 바.
준백은 부러 그리 말하며 낯선 이에 대해 물었다.
조정의 대신들이 결을 눈엣가시로 여긴다는 건 선정도 천 상궁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결의 다비에 대해 저들에게 소상히 말하여 봤자 좋을 것 없다는 뜻이었다.
하여 선정은 가타부타 긴말할 것 없이 짧게 단이를 소개하였다.
“제 차벗입니다.”
“차벗이라……. 사대부가의 여식처럼 보이진 않사온데.”
준백이 단이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출신은 확실한 자이옵니까?”
그 말에 선정의 낯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지금 감히, 영상께서 나의 사람을 욕보이려 하는 겁니까.”
주위를 얼어붙게 할 만큼 냉랭한 목소리였다.
선정은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적나라한 경계에 준백의 눈에도 언뜻 언짢음이 스쳤다.
온실 속 화초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얌전히 지내야 할 옹주가 감히 자신을 향해 적대를 보인 것이다.
평소에도 제 앞에서 콧대를 세우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던 차였다.
‘건방진 것.’그러나 이 자리에서 옹주를 짓누르기엔 보는 눈이 많은 터라.
준백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저 옹주 아기씨의 곁에 늘 좋은 이들만 머물렀으면 하는 신의 작은 바람이니, 너무 노엽게 듣지 마시옵소서.”
“마음은 고맙게 받지요. 그럼.”
선정은 찬바람을 날리며 준백 무리를 지나쳤다.
곧 천 상궁과 단이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깊이 허리를 숙이길 잠시.
천천히 고개를 든 준백은 멀어지는 그들을 굳은 눈으로 가만히 응시하였다.
종종걸음으로 선정을 따라가는 단이의 뒷모습에 날카로운 시선이 꽂혔다.
‘저 계집인가. 북귀의 다비가.’소문 속 미색의 여인이라기엔 조금 앳된 듯했지만, 그녀를 보았다던 이들의 말과 얼추 들어맞는 외양이었다.
무엇보다 선정 옹주가 차벗이라 하였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옹주와 북귀의 다비라…….’두 사람을 담은 준백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한 빛을 띠었다.
두 여인의 뒤로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따라갔다.
***
선정이 함께할 수 있는 길은 한정적인 터라.
그녀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 단이는 천 상궁의 배웅을 받아 무사히 훈련원으로 올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천 상궁님. 조심히 돌아가시어요.”
천 상궁은 지친 듯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곤 다시 궁으로 향했다.
“휴, 그 무서운 분 마주치는 바람에 괜히 진 빠졌네.”
폭 한숨을 내쉰 단이도 훈련원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직 정오시까진 시간이 남은 듯했다.
놀란 마음이라도 가라앉힐까 하여 단이는 지난번에 못다 읽은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한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멍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
‘네가 북방 귀신의 저주를 녹일 춘풍 꽃물이라 하던데.’ 선정의 말이 귓가에 맴돈 탓이었다.
내가 나리의 저주를 녹일 춘풍 꽃물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단이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엔 자연히 결과 함께했던 지난 순간들이 떠올랐다.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주고, 함께 말을 타고, 제 상처보다 그녀의 상처를 더 아파하던.
그녀의 위로에 옅게 웃어 보이던 순간들이.
‘잊지 말거라. 너는 나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의 사람’이라 말해주던, 그 가슴 떨리던 순간까지.
돌이켜 생각해 본 결의 모습들은 하나같이 단이의 가슴에 깊은 파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꼭, 그녀를 특별하게 여긴다고 생각될 만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단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애써 생각들을 털어냈다.
혼자만의 망상에 달아오른 열이 더욱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리 앉아 있다간 해선 안 될 생각까지 할 지경이라.
단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곧 정오시가 되니, 잡생각을 떨칠 겸 다구들을 한 번 더 씻어 정리해둘 생각이었다.
소다옥을 나서니 저 멀리서 군사들의 기합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 가운데 결은 군사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훈련을 주관하고 있었다.
‘아직 훈련이 안 끝났구나. 나리께서 오시기 전에 얼른 물을 길어 와야겠다.’우물로 가려면 훈련장을 빙 둘러서 가야 하는 터라.
움푹 팬 함지박을 챙긴 단이는 훈련장 가장자리를 따라 우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몇 번이고 물을 길어 올리자 함지박이 말간 물로 가득 채워졌다.
“읏차.”
물이 가득 든 함지박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겨우 함지박을 들어 올린 단이는 낑낑거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행여 물을 든 상태로 결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걸음을 재촉하며 서둘러 소다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어, 어어! 조심해!”
난데없는 경고와 함께 어디선가 긴 목검 하나가 허공을 빙빙 돌며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일촉즉발의 순간.
“읏……!”
놀란 단이는 차마 피할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퍽!
둔탁한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머리든 몸이든 맞을 것 같았는데.
아픔은커녕 온몸에 따스한 온기만 느껴진다.
거기에 축축한 느낌까지…….
‘축축?’슬그머니 눈을 뜬 단이는 또 한 번 숨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눈앞엔 다름 아닌 결이 있었다.
그것도 저를 끌어안은 채, 온몸이 물에 젖은 상태로.
목검이 날아온 순간 그가 단이를 품에 안고서 몸으로 목검을 막아줬던 것이다.
그 바람에 함지박에 담겨 있던 물이 죄 흘러넘쳐 단이와 결의 몸을 적시고 말았다.
‘하아, 헉……! 치우거라!’
순간, 단이의 머릿속에 오래전 물을 보고 경기를 일으키던 결이 떠올랐다.
탈수가 되어 위급했던 상태에서도 한사코 물을 거부하던 그가 아닌가.
마음이 다급해졌다.
‘안 돼!’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허리를 끌어안은 결의 팔에 의지한 채, 단이는 재빨리 까치발을 들어 그의 눈을 두 손으로 가렸다.
“차입니다!”
“…….”
“지금 나리의 몸에 묻은 것은, 차입니다.”
말 그대로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한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런데도 단이는 거짓말을 하였다.
어떻게든 물을 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또다시 물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제가 얼른 닦아드릴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시어요.”
단이는 자신의 손과 결의 손, 그리고 얼굴에 묻은 투명한 물기를 옷소매로 서둘러 닦아내었다.
그러면서도 행여 결이 조금이라도 눈을 뜰까, 남은 한 손으론 그의 눈을 계속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모두가 놀란 가운데.
“…….”
결은 단이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채 굳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 아이가 우물가에서 오고 있었다는 것을.
들고 있던 함지박에 말간 물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저도 모르게 눈짓으로 그녀를 좇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대련을 하던 군사의 목검이 그녀에게로 날아간 순간, 이성적인 사고는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물을 뒤집어쓴 뒤였다.
이미 다 보았는데도, 제가 보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을 텐데도.
이 아이는 어떻게든 숨기려 하고 있다.
물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위해서.
‘너는, 대체…….’일순 가슴에 이상한 감정이 안개처럼 번져나갔다.
분명 물이었음을 아는데, 이상하게 몸이 떨리지 않는다.
두렵지 않다. 거부감 또한 없다.
단이의 말대로 정말 차였던 걸까.
‘아니……. 이건 차가 아니야.’그러나 차가 아닌 것을 단이는 신기하게도 차로 만들어주었다.
그녀의 손으로, 그녀의 목소리로, 그녀의 온기로.
지금 내 폐부를 가득 채우는, 그녀의 향으로.
단이의 손끝에서 흘러내린 물 한 방울이 결의 입술을 적셨다.
그것을 삼키자 툭 불거진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여전히,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저주가 풀린 것처럼.
“네 말이 맞구나.”
결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리 향이 짙은 것을 보니…… 차가 맞나 보구나.”
아무 맛도,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는 맹물이거늘.
결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 말하였다.
자신을 세뇌하듯.
혹은 단이를 안심시키듯.
어쩌면 자신이 뱉은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 넘어간 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지금 그에겐 단이의 말이 곧 법이고 절대복종할 명이었다.
천천히 단이의 한쪽 손목을 잡은 결이 느릿하게 팔을 내렸다.
젖은 눈이 오롯이 단이에게로 향했다.
묘한 이채가 검은 눈동자를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열망과 함께.
“다치진 않았느냐.”
나직이 흘려보낸 목소리에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왔다.
걱정 가득한 눈으로 결의 안색을 빠르게 살핀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되었다.”
결은 품에 안고 있던 단이의 자그마한 몸을 미련처럼 천천히 놓아주었다.
뒤늦게 다가온 군사 하나가 몸을 납작 엎드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장군!”
“전장에서 검을 놓치는 것은 곧 목을 내어놓는 것과 같은 의미다. 악력을 더 키우도록 해라.”
“예, 장군!”
그는 군사에게 단이가 진정할 수 있게끔 소다옥으로 데려가라 명했다.
“나리, 그럼 차는…….”
“방금 마신 걸로 하지.”
그 말에 단이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입으로 차라 하였으니 반박할 수도 없을 터였다.
곧 군사와 함께 멀어지는 단이를 결은 말없이 눈에 담았다.
가슴이 뻐근하였다.
뒤늦게 물에 대한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가.
……아니. 이건 그런 종류의 갑갑증이 아니었다.
열망이었다.
멀어지는 너를 다시 끌어안고 싶다는.
가슴은 너무도 혼란스러운데, 너를 안으면 다 잊힐 것만 같아서.
결은 천천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품 안에 맞춘 듯 꼭 들어오던 작은 몸의 여운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파동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너는, 잠시 잠깐 지나가는 그런 파동이 아닌 모양이다.
깨달은 사실은 걷잡을 수 없이 결의 마음을 잠식해나갔다.
어쩌면 이제껏 부러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주하면, 그때부턴 억누를 수 없게 되어서.
억누르지 않을 것을 알아서.
결은 마지막까지 단이를 바라보다 이내 발길을 돌렸다.
몰려들었던 병사들도 하나둘 흩어지고, 곧 훈련장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
그 모든 순간을 지켜보던 성조는 어쩐지 흐려진 얼굴로 조용히 훈련원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