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30화 (30/100)

30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흑마 뒤를 졸졸졸 따라가던 단이는 또 한 번 결을 힐끔 쳐다보았다.

낮에 있었던 물 사건으로 인해 그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었다.

다행히 결의 표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였다.

‘휴…….’

그 표정에 단이가 또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몇 번이고 쳐다본 얼굴이건만.

행여 조금이라도 그의 안색이 안 좋아질까 봐 자꾸만 확인하게 되는 것이었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춘풍 꽃물…….’

선정이 불어넣은 요상한 바람 한 줄기가 자꾸만 가슴을 간질인 까닭이었다.

소다옥에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핀 것이 부끄러웠고, 저잣거리에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도 걱정되었다.

혹시나 결의 귀에 들어가면 그가 불쾌해할까 싶어서였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결의 근사했던 모습들을 떠올리게 되니.

무슨 연유로 이러는지 단이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 한눈을 팔다간 넘어질 텐데.”

“……예?”

넋을 놓고 결을 쳐다보던 단이는 뒤늦게 그가 이쪽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흠칫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결과 눈이 마주친 뒤.

“으앗……!”

하필 그 순간 돌부리에 걸려 크게 휘청거리기까지 하고 말았다.

다행히 재빠르게 땅을 디뎌 볼썽사납게 자빠지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결이 말을 멈추어 그녀를 살폈다.

“괜찮느냐.”

“괘, 괜찮습니다, 나리. 저 돌부리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헤헤…….”

민망해진 단이는 멋쩍게 웃으며 결로부터 두어 발짝 멀어졌다.

“아야…….”

하지만 땅을 세게 디디며 무리가 갔는지, 순간 발목이 살짝 시큰거렸다.

그 미세한 반응에 결이 곧장 말에서 내렸다.

“이리 내보이거라.”

“아, 아니어요. 이 정도는 괜찮은데…….”

결이 말에서 내린 게 무색할 정도로 발목은 금방 괜찮아졌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결은 단이를 근처 바위에 앉힌 뒤,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곤 그녀의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녀린 발목이 그의 커다란 손 안에 온전히 감겼다.

‘기분이 이상해…….’

길고 곧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발목을 만질 때마다 가슴인지 뱃속인지 모를 곳이 간지러웠다.

이미 해는 서쪽으로 넘어갔는데 볼은 봄볕을 쬐듯 뜨거웠고, 뜀박질을 한 것처럼 숨이 차는데 그 숨을 마음껏 내뱉을 수도 없었다.

쿵, 쿵, 쿵, 쿵.

가슴은 어찌 또 이리 널을 뛸까.

너무 가까워 결에게까지 이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어떠하냐.”

고개를 든 결이 단이를 올려다보았다.

그윽한 눈매 속, 밤하늘을 담은 듯한 눈동자를 본 순간.

주변의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단이의 눈엔 오로지 결만 보였다.

세상 빛이 전부 그에게로만 몰린 듯.

세상에, 이 사내 하나만 남은 듯.

이 모든 게 결이 발목을 잡아 일어난 일이니.

“괘, 괜찮아요. 정말이어요.”

단이는 당황한 나머지 결의 어깨를 짚어 뒤로 밀었다.

“이만 일어나시어요……. 누가 볼까 걱정됩니다.”

태산의 바위처럼 단단한 어깨가 겨우 그 힘에 밀릴 리 없었지만, 단이는 조금 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숨이 꼴깍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만큼 가슴이 세차게 뛰고 머릿속이 새하얘진 탓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결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녀의 발목을 살피다 뒤늦게 몸을 일으켰다.

붉어진 단이의 얼굴 위로 눈길이 스쳤으나, 그저 제 앞에서 넘어질 뻔한 것을 부끄러워하나 생각할 뿐이었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이만 가자.”

“예……. 나리.”

그런데 금방이라도 말에 오를 듯하던 결이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잡고 있던 안장을 놓고 고삐를 아래로 쥐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걸어가는 것이 좋겠구나.”

“말에 안 오르시고요?”

결은 대답 대신 걸음을 떼었다.

아직 집에 도착하려면 한참은 더 가야 하거늘.

언제나 말을 타고 이동하시는 분이 어찌 집까지 걸어가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의아해하는 단이를 향해 결이 얼른 옆으로 오라 눈짓하였다.

“안 오고 무엇 하느냐.”

“아…… 네! 갑니다, 나리.”

단이는 서둘러 결의 뒤를 따라갔다.

한 발 뒤에서 열심히 발을 놀리는 그녀를 힐긋 본 결이 서서히 보폭을 좁혔다.

그러자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던 단이의 다리도 한결 편해질 수 있었다.

말에서 내려온 덕에 낮아진 눈높이도 그녀를 편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결은 다시 앞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얼음장같이 굳어 있던 그의 눈가에 눈 녹듯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었다.

***

한양에서 가장 큰 기루라는 화은루.

그 안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방에선 연신 풍악과 기생들의 노랫소리, 그리고 춤사위를 벌이는 발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넓은 기방을 홀로 차지한 성조는 평소와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으리, 술만 드시지 마시고 이것도 드셔 보시어요.”

기생 하나가 손수 육전 하나를 들어 성조에게 내밀었다.

아, 하며 교태를 부리는 목소리가 감주처럼 귀에 달라붙었다.

한데도 성조의 무감한 눈빛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다른 때 같았으면 봄 햇살 같은 미소로 여럿 기생을 자극하였을 그가 목각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니.

기생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며 흥을 돋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었다.

이 순간이 답답하기는 성조도 마찬가지였다.

화은루에서 제일가는 아이들을 죄 불러놓았건만.

‘어찌 이리 기분이 가라앉는지…….’

즐겁기는커녕 작은 흥미조차 일지 않는다.

오히려 한없이 지루할 뿐.

혼자 비운 술잔이 몇이나 되는데도 취기조차 오르지 않았다.

“참, 나으리. 그 소문 들으시었어요?”

그때, 기생 하나가 뭐 재미난 얘기라도 꺼내려는지 눈을 빛내며 말하였다.

“북방 귀신…… 그러니까 서결 장군 말이어요. 나으리께서 가장 절친하시다는 친우분. 그분께 춘풍 꽃물이 들었대요.”

“어머, 그게 정말이야? 누군데?”

“그분의 다비요.”

순간 술잔을 들어 올리던 성조의 팔이 우뚝 멈췄다.

그의 눈빛이 굳은 줄도 모르고 기생들은 신나게 말을 이었다.

“운종가에서 다비에게 옆꽂이를 사주시는 걸 보았단 소문이 파다해요. 함께 말에도 오르고요.”

“세상에, 다정하셔라.”

“소문으론 다비가 꽤나 어여쁘다던데. 혹 그 미색에 장군께서 넘어가신 거 아니야?”

“어떤 것 같아요, 나으리? 나으리께선 장군과 친하시잖아요.”

이번엔 기생들의 시선이 죄 성조에게로 몰렸다.

쏟아지는 시선이 마치 바늘처럼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

성조는 뜻 모를 눈으로 그네들을 바라보다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탁, 소리 나게 놓인 술잔에서 채 마시지 않은 술이 넘쳐흘렀다.

“내 오늘은 이만 가야겠다.”

“어머, 벌써 가시어요?”

성조는 빠르게 일어나 기방을 나섰다.

기생들이 아쉽다 우는 소리에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내던진 화대 값으로 그녀들을 잠잠하게 만들 뿐이었다.

성조는 곧장 말에 올라타 기루 앞을 떠났다.

‘춘풍 꽃물……. 서결에게, 춘풍 꽃물이라.’

기분을 풀러 왔던 기루에서 오히려 더 기분을 망치게 될 줄이야.

고삐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성조는 억지로 그 말을 흘려보내며 머릿속을 비워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눈빛은 어느 순간 서서히 어둠을 닮기 시작했다.

문득 낮에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여느 때처럼 훈련원을 찾은 날이었다.

결을 만나도 좋고, 단이를 만나도 좋다 생각하며 다다른 그곳.

생각지 못하게 두 사람을 한꺼번에 찾아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어이, 거기 둘…….’

하나 두 사람을 부르려던 입술은 곧 말을 잃고 말았다.

흠뻑 젖은 결. 그런 결의 눈을 가린 단이.

그리고 그런 단이를, 틈 없이 꼭 안은 결.

그것을 본 순간 성조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먹구름처럼 빠르게 뒤덮인 그것은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제 가슴을 가득 메웠다.

마치 원하던 무언가를 눈앞에서 빼앗긴 기분.

‘대체 무엇을?’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빼앗겼다 생각한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결인가.

아니면 단이인가.

“…….”

한쪽 눈썹을 까딱인 성조가 고개를 모로 비틀었다.

지금 이 순간 단이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분명 그의 마음이 기울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녀야 말로 소유한 적도, 소유할 수도 없을진대.

‘어찌 빼앗겼다 생각하는지…….’

스스로 생각해봐도 우스운 감정이었다.

하나 입안에는 자꾸만 쓴침이 고여 왔다.

우습고도 착잡한 감정.

성조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앞에 섰을 때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무거웠다.

그렇게 정처 없이 말을 달리기를 한참.

“하…… 참.”

문득 고개를 든 성조의 입에서 자조적인 헛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눈앞에는 낯익은 대문이 서 있었다.

한때는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결의 집 대문이었다.

‘차나…… 한잔하자 할까.’

술은 이미 지겹도록 마셔 더 입을 대기 싫었다.

이대로 말을 돌려 집으로 가도 되건만.

성조는 기어이 핑계를 만들어 대문을 두드렸다.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니었던, 그 아이가.

“아니……. 도련님께서 이 시각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열린 대문 너머 덕원이 놀란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성조는 싱긋 웃으며 말에서 내렸다.

“밤중에 적적하여 차가 생각나는데, 도성 안에 내가 마음 놓고 차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이곳뿐이라.”

“안으로 드시지요.”

“그럴까, 그럼.”

성조는 기분 좋게 웃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인기척에 기웃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단이의 얼굴도 보였다.

그의 눈매가 조금 더 시원한 호선을 그렸다.

“어이, 다동. 잘 지내었느냐?”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불퉁한 표정을 짓는 단이였다.

그 얼굴마저도 반가워, 내내 막힌 듯하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틔었다.

“내 오늘도 네가 우린 차를 마시러 왔다.”

“어찌 이리 막무가내로 제 차를 찾으십니까?”

“너는 다동이지 않느냐.”

“다동…… 아니! 저는 서결 나리의 다비입니다. 나리의 다비가 아니란 말이어요.”

“결의 다비이면 어떻고, 나의 다비이면 또 어떠하냐? 어차피 차를 우리는 것이 너의 일이거늘.”

그 말에 말문이 막혔는지, 오므린 입술을 비죽이던 단이가 도로 새침하게 대답하였다.

“제 차는 오로지 서결 나리를 위한 것이어요.”

“선심 써서 나까지만 허용하거라. 결도 허락할 테니.”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요. ……그러기도 싫고.”

“지금 내가 관심법을 쓴 것이냐? 마지막에 들리면 안 될 게 들린 것 같은데.”

“귀도 참 밝으십니다.”

시답잖은 주제로 아옹다옹하기도 잠시.

성조의 눈에 곧 하얀 구슬이 알알이 달린 옆꽂이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요즘 볼 때마다 저 옆꽂이를 하고 있었더랬지.

이전까진 굳이 신경 쓰지 않았는데, 기루에서 이것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나니 괜스레 시선이 갔다.

결은 누군가에게, 특히 여인에게 무언가를 선물하는 이가 결코 아니었기에.

성조의 손끝이 스치듯 옆꽂이를 툭 건드렸다.

“이건 어디서 난 것이냐? 요 근래 계속 이것만 하고 있던데.”

모르는 척 물으니, 단이가 두 뺨에 구슬과 정반대의 색을 띠며 시선을 돌렸다.

“서결 나리께서 사주셨습니다.”

“내가 선물을 준다고 할 땐 한사코 거절을 하더니.”

“어찌 비교를 합니까? 서결 나리께선 제 주인이신 것을요.”

단이는 주인이라 말하였지만, 두 눈에 담긴 뜻은 조금 달랐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빛깔.

그것을 본 성조의 입안이 다시금 씁쓸해졌다.

“오늘은 차 대신 술이나 마시지.”

때마침 다가온 결이 성조의 눈길을 가로챘다.

착잡한 기분을 숨긴 성조가 부러 툴툴거리듯 말하였다.

“술은 이미 지겹도록 마셨네.”

“술 냄새가 안 나는데. 네가 어디 취하기 전에 술잔을 꺾는 이였나.”

결은 군소리 말고 따라오라는 뜻으로 먼저 몸을 돌렸다.

정말로 술이 마시고 싶다는 뜻인가.

‘아니면, 저 아이를 나와 한 자리에 두기 싫다는 뜻인가.’공연히 과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밤늦게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마냥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오늘은 네 주인이 허락 안 하시려나 보다. 이만 가서 자거라. 일찍 자야 키 크지.”

“제 키 걱정 마시고 얼른 가시어요.”

“그래.”

성조는 실없이 웃으며 단이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쓰다듬곤 결의 뒤를 따랐다.

곧 결과 성조 사이에 술상이 차려졌다.

붉디붉은 홍주가 두 잔에 가득 채워졌다.

성조는 짙은 주정이 느껴지는 잔을 비우곤 시선을 들어 결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줄곧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낮에 일이 있었다던데.”

그제야 결이 성조를 마주 보며 눈빛으로 무슨 말이냐 물었다.

“누가 자네 몸에 물을 끼얹었다고 말이야.”

결의 눈빛이 한순간 굳어졌다.

일련의 장면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모든 것이 여전히 선명하였으나, 무엇 하나 그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없었다.

두려울 것 또한 없었다.

“차였다, 그건.”

결은 짧은 말로 상황을 설명하고서 술잔을 비웠다.

낮의 일을 모두 지켜보았던 성조는 지금 결의 심정이 어떠한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니. 짐작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더 옳으리라.

그저 은근하게 가슴 저변을 건드리는 이 예감이 맞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성조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결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조만간 은아암에 저 아이 데리고 놀러 오게나. 작년에 부탁했던 일로향이 드디어 왔으니. 내 꼭 자네에게 맛보게 하고 싶네.”

“그러지.”

술잔을 입에 가져다대던 결이 낮게 중얼거렸다.

“데려가면 좋아하겠네.”

성조는 순간 제 귀를 의심하며 결을 보았다.

결이 다른 누군가가 기뻐할 것을 생각하며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있던가.

적어도 ‘그날’ 이후로는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춘풍 꽃물…….’

흘려버리려던 그 말이 또 한 번 성조의 귀를 맴돌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