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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31화 (31/100)

31화

긴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경칩이 다가왔다.

한양의 물을 얼어붙게 만들던 엄동설한의 삭풍이 힘을 잃고, 겨우내 잠을 자던 개구리가 언 땅을 비집고 나와 울음을 놓기 시작하였다.

한층 더 단단해진 봄 햇살에 여기저기 꽃향기가 그윽해져 온갖 나비들이 팔랑팔랑 날갯짓을 해댔다.

경칩을 맞아 병조에서도 중대한 제사를 지냈다.

바로 국가의 군력과 한 해의 안녕을 비는 둑제였다.

둑제는 병조에서 중히 여기는 연례 중 하나로, 3일간 성대하게 치러졌다.

오늘은 둑제의 마지막 날이라.

이날만은 병조의 관원뿐만 아니라 왕실과 그의 종친들까지 함께 참석하여, 단이는 따라갈 수 없게 되었다.

‘오늘 나리께서 무예제를 하신다고 들었는데…….’그것을 못 보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높으신 분들이 죄 모이는 곳에 한낱 다비인 그녀가 함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단이는 둑제가 끝날 때까지 소다옥에서 결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조심히 다녀오시어요, 나리.”

시무룩해 보이는 그녀가 마음에 걸린 걸까.

돌아서려던 결이 다시 단이를 보며 물었다.

“혹 가보고 싶은 곳은 없느냐.”

“가보고 싶은 곳이요?”

“경칩이라 도성 곳곳에 볼거리가 많을 것이다. 심심하면 기다리는 동안 구경을 다녀와도 좋다.”

결은 먹을거리를 사 먹을 수 있는 돈까지 함께 챙겨주었다.

그때, 단이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결이 준 용돈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나리. 그럼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결이 무엇이냐 눈짓으로 물으니, 볼을 발그레 물들인 단이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금일 저녁에 연목교 앞에서 고리수먹기도 하고, 또 달밤에 풍등을 올리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붉은 주머니를 쥔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바닥을 배회하던 눈동자가 결에게로 향했다.

“그곳에, 나리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그 안에 담긴 결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비쳤다.

예상치 못한 청에 조금 놀란 듯하였다.

그 미미한 변화를 알아챈 단이가 금세 기대를 감추고 빠르게 말을 갈무리했다.

“그런데 나리께서 그런 곳에 가시기엔 역시 힘드시겠지요?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그냥 나리께서 둑제 올리시는 동안 혼자…….”

“같이 가지.”

횡설수설하는 말꼬리를 결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눌렀다.

그의 수락에 단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같이 가주실 수 있으시어요?”

“안 될 게 무어 있겠느냐.”

그 말에 작게 벌어졌던 입가에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보는 이의 마음까지 부드럽게 만드는 미소였다.

결은 저도 모르는 사이 따라 피어난 미소를 머금으며 말하였다.

“퇴청하고 곧장 가도록 하지.”

“예, 나리.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시어요.”

꾸벅 허리를 숙이는 단이를 마지막까지 눈에 담은 결이 이내 소다옥을 나섰다.

지루하게 버텨야 할 하루 중, 유일하게 반짝이는 기대가 그에게도 생겼다.

***

홍색과 적색의 깃발 두 개가 바람을 타며 하늘 높이 흔들렸다.

제단 위 타오르는 불길이 하늘까지 닿을 듯 몸집을 부풀리던 즈음.

“하암…….”

선정 옹주는 몰래 고개를 돌려 손바닥 뒤로 하품을 숨겼다.

제사라 하여 볼거리라도 있을 줄 알고 신나게 왔는데.

차라리 화선당에 갇혀 있는 것이 낫겠다 싶을 만큼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일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꾀병이라도 부려서 화선당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저 하나 때문에 괜히 분위기를 망칠 순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기를 한참.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단 근처로 군사들 수십이 자리를 잡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선정은 제 뒤에 서 있는 천 상궁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천 상궁,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가?”

“훈련원에서 무예제를 준비했다고 하옵니다.”

무예제라. 늘어지듯 지루한 시간 속에서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었다.

선정은 흥미를 보이며 정렬한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웅장한 풍악과 함께 여러 군사들이 한 몸인 것처럼 무예를 펼치기 시작했다.

자로 잰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선정이 신기해했다.

검과 창이 둥둥 북소리에 맞춰 허공을 가르고, 물결치듯 멀어졌다 모이는 행렬이 나발의 힘센 음률 위를 넘나들었다.

무예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군사들이 썰물 빠지듯 양옆으로 빠지더니, 이윽고 그 가운데로 갑옷을 입은 장수가 나타나 독무를 이어갔다.

결이었다.

그는 수십 명의 군사들이 메웠던 공간을 홀로 채우면서도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웅대한 움직임에 제단이 좁아 보일 정도였다.

결의 몸짓은 물이 흐르듯 유려하면서도 거센 파도처럼 힘 있고 단단하였다.

그가 몸을 돌리면 태풍이 일어날 것 같았고, 검을 휘두르면 하늘이 갈라질 것 같았다.

선정은 내내 등받이에 붙어 있던 상체까지 꼿꼿이 세우며 결의 독무에 빠져들었다.

결이 또 한 번 허공을 가르며 검을 내질렀다.

그 순간 투구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였다.

전장을 누빈 장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린 듯 수려한 외모.

그 가운데 그녀의 시선을 잡아끄는, 한겨울 언 호수 같은 서늘한 두 눈동자.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선정은 가슴 한가운데가 얼어붙은 듯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기이한 감정.

선정은 묘한 기분에 휩싸여 가슴 언저리에 손을 대었다.

쿵, 쿵, 쿵.

마치 저 자리에서 결과 함께 제단을 누비는 것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와 동시에 두 뺨 위로 홧홧한 열기까지 느껴졌다.

아직 여름은 오지도 않았는데 더위부터 먹었는가.

낯선 반응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선정의 눈은 줄곧 결을 향해 있었다.

긴 겨울이 가고 찾아온, 그녀의 첫 연정이었다.

***

“아직 끝나시려면 멀었나.”

소다옥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단이가 하늘을 보았다.

해님이 얼른 서산으로 가셔야 기다리는 나리도 오실 텐데.

오늘따라 세상 구경을 오래 하고 싶으신지, 해님은 아직도 중천에 계신다.

폭 한숨을 내쉰 단이는 도로 소다옥으로 들어와 탁자 앞에 앉았다.

턱을 괴고 가만히 넋을 놓고 있길 잠시.

다시금 그녀의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결과 함께 이곳저곳을 구경할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 것이다.

사실 연목교 나들이는 선정에게 경칩 풍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부터 내내 생각해오던 것이었다.

고로쇠나무의 수액은 특히 속병에 특효라.

종일 물 대신 차만 마시는 결의 속을 다스리는 데에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밤하늘을 수놓은 풍등은 꼭 별을 가까이서 보는 것 같다 하였으니.

사방이 반짝반짝 빛나는 풍경을 가까이서 본다면 너무도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결과 함께여서, 더욱 좋을 것 같고.

“나리께서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무의식중에 옆꽂이를 어루만지던 단이가 다시금 턱을 괴며 발을 놀렸다.

헤헤,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밑으로 허공에 뜬 두 발이 까딱까딱 흥겹게 놀아났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눈에 들어오지 않는 책장만 넘겼다 되짚길 반복하던 단이의 귓가에 드디어 훈련원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셨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단이가 얼른 밖으로 나갔다.

과연 저 멀리서 군사들과 함께 들어오는 결이 보였다.

갑옷으로 무장한 그를 보자 새삼 묘한 기분이 밀려왔다.

세상 무엇보다 든든한 나의 주인.

태산과도 같은 나의 나리.

단이는 가슴이 뻐근하리만치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길게 입가를 늘였다.

진위와 무언가를 얘기하며 들어오던 결이 고개를 들어 그런 단이를 발견하였다.

소다옥 앞에서 이쪽을 향해 방싯 방싯 웃는 것이, 꼭 온종일 자신만 기다렸던 것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내가 돌아오기를 저렇게나 바라는 사람이 있다.

내가 돌아온 것을 저렇게나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도 아닌 아이가,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연목교 구경 가는 걸 기다린 거겠지만.’결은 한순간 부푼 가슴을 이성으로 억눌렀다.

헛된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이제 연목교로 가는 것이어요?”

가까이 다가가자 저를 보며 활짝 웃는 얼굴에 마음이 또 제멋대로 동하였다.

감정을 깨닫고 나니 더욱 조절하기 어려워진 탓이었다.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닌 기분이라니.

스스로도 제어가 안 되는 상황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면 어느 순간 감정에 잔뜩 휩쓸려 이 아이만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결은 낮은 숨으로 동요하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옷만 갈아입고 바로 오지.”

“예, 나리. 얼른 다녀오시어요.”

단이는 당장이라도 연목교로 향하고 싶은지 발을 동동거렸다.

그 앙증맞은 발재간이 공연히 결의 마음까지 퐁당퐁당 재촉하는 터라.

그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는 단이를 데리고 곧장 연목교로 향했다.

“임실에서 종자를 받은 고로쇠나무의 수액이오! 경칩에 고리수먹기를 해야 여름 더위를 피하고 뼈가 튼튼해지며 무병장수하게 되니, 경칩이 지나기 전에 속히 받아 마시시오!”

장사꾼이 큰 목소리로 손님들을 이끌었다.

몰려드는 손님과 남은 물량을 보니 서둘러야 할 판이라.

“나리,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주시어요. 제가 얼른 가서 나리 것까지 받아올게요!”

어차피 고로쇠 수액은 맑은 물이나 진배없어 결은 마시지도 못하거늘.

말릴 틈도 없이 단이는 장사꾼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키가 작은 탓에 단이는 금세 사람들 틈으로 쏙 숨어들었다.

‘다시 나올 수나 있으려나.’걱정스럽게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보던 결은 하는 수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제법 흘러 직접 찾아나서야 하나 싶던 그때.

“나리!”

간신히 사람들 틈을 헤집고 나온 단이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표주박을 내밀었다.

“이렇게 하면 나리께서도 드실 수 있으시지요?”

표주박 안에 든 수액은 뜻밖에도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표주박 안에 잘게 갈린 가루가 잠겨 있었다.

“매화 꽃잎을 갈은 것이어요. 빠르게 색과 향을 입히기엔 이만한 것이 없어서 챙겨왔습니다.”

결을 위해 일부러 챙겨왔다는 뜻이었다.

노란빛을 담은 그의 눈동자가 옅게 일렁였다.

고로쇠 수액에 매화의 꽃잎이 가득 담겨 더욱 짙은 향내를 풍겼다.

그것을 바라보던 결이 시선을 들어 단이를 바라보았다.

“잊었느냐.”

“…….”

“내가 마시는 것은, 모두 다비의 입을 거쳐야 하는데.”

“아, 맞다!”

단이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녀는 얼른 표주박에 입을 대고 노란빛을 띠는 수액을 머금었다.

홍매 같은 붉은 입술 사이로 꿀 같은 노란 수액이 흘러들어 갔다.

그 모습을 본 결의 가슴속에 위험한 폭풍이 일었다.

촉촉이 젖은 입술을 수액 대신 삼키고 싶어서.

그 불같은 충동이 이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 속을 헤집어 놓아서.

“아무 이상 없습니다, 나리.”

반들거리는 입술을 쓱 핥고 지나간 새빨간 혀가 그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결은 그 붉은 것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단이가 내민 표주박을 건네받았다.

그러곤 단이가 색과 향을 입혀준 것을 마시기 시작했다.

목울대가 크게 일렁일 때마다 단이의 숨결이 덧대어진 달콤한 수액이 목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죄 삼켜 버렸다.

그녀를 삼켜 버리고 싶은 만큼.

마지막 일렁임을 마친 목울대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제야 미친 듯이 날뛰던 충동도 조금은 잠잠해졌다.

“어떠시어요? 아주 시원하지요?”

아무것도 모른 채 뿌듯해하는 저 순수한 얼굴이 그의 양심을 찌른 탓도 있었지만.

“그래. 괜찮구나.”

“다행이어요. 혹시나 매화가 고로쇠 물에 잘 풀리지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걱정할 게 무어 있겠느냐. 마시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경칩에 나는 고로쇠 물이 가장 달고 몸에 좋다 하였어요. 하여 꼭 나리께 맛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단이의 얼굴에 헤실헤실 말간 웃음이 번져 나갔다.

“저도 그 맛이 궁금하기도 하였고……. 헤헤.”

그 순수함이 이제는 마음까지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결의 눈빛에 짙은 애틋함이 묻어 나왔다.

이토록 어여쁜 아이가 어찌 나에게로 왔는가.

벅찰 만큼 소중하고, 또 소중한 아이였다.

눈꺼풀로 그 감정들을 조용히 밀어낸 결은 단이를 데리고 풍등을 띄우는 곳으로 향하였다.

풍등 하나를 사고, 휴대용 붓과 먹물 또한 구해 왔다.

“적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

“소원이요? 음…… 나리께서 항상 평안하셨으면 좋겠고, 덕원 할아버지랑 보선 아주머니께서도 건강하셨으면 좋겠고, 또 다신당에 좋은 차가 많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고…….”

단이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소원을 나열하였다.

끝도 없이 나오는 소원에 결이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풍등을 더 사와야 하나.”

“아, 아니어요!”

단이는 얼른 접었던 손가락을 활짝 펴 손을 내저었다.

다 적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생각해 보니 그렇게 욕심을 부리면 하늘도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딱 하나만 적을게요.”

곰곰이 고민하던 단이가 곧 풍등 한 면에 글자 하나를 적었다.

풀 해(解).

‘나리가 안고 계신 문제들과 저주가 꼭 풀려 해결되기를…….’

그것을 본 결 역시 반대편에 글자 하나만 적었다.

지킬 보(保).

단이를,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그 해맑은 미소를 모두 지켜주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걸 걸어서라도.

한쪽은 풀기를 원하고, 한쪽은 지키기를 원하니.

상반된 두 글자가 서로 나란히 등을 맞댄 채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결과 단이도 풍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

풍등은 두 사람의 간절한 소원만큼 가장 오랫동안 하늘에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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