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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32화 (32/100)

32화

편전에는 여느 때보다 삼엄한 기운이 감돌았다.

북방 경계선의 오랑캐 약탈 건으로 대신들 간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국경선 후퇴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전하.”

“하오나 전하. 이대로 국경을 고수하였다간 힘없는 백성들만 죽어 나갈 뿐이옵니다. 차라리 국경선을 후퇴하여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것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후퇴는 동족방뇨일 뿐이오. 후퇴한 경계선으로 오랑캐가 또 넘어오지 않을 거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소? 그렇게 야금야금 내어주다간 끝도 없을 것이오.”

“옳소. 차라리 군사력 보강에 더 힘을 쓰는 것이…….”

“이미 병력 증가와 성벽 재건으로 어마어마한 돈이 나갔소. 이대로 가다간 국고가 남아나지 않을 것임을 정녕 모르는 것이오?”

팽팽한 대립에 이선은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양측의 의견 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나, 무엇 하나 선뜻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선대로부터 지켜온 땅을 내어주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

하나 국경을 지키자고 천문학적인 돈을 계속 들이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쉬이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서결 장군이 여연에 있었더라면 큰 시름은 덜었을 것인데…….’애초에 결의 부재를 알아챈 여진족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니.

이 모든 건 서결이 여연으로 돌아가면 깔끔히 해결될 일이었다.

하나 서결을 다시 북방으로 보내는 것은 과거의 일을 바로잡겠다는 뜻을 꺾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선의 확고한 뜻을 알고 있었기에, 대신들 역시 선뜻 서결의 여연행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런 이선의 고민을 파악한 것일까.

“전하, 하오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떻겠사옵니까.”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준백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서결 장군으로 하여금 군대를 꾸리게 하여 토벌군을 보내시옵소서.”

“……토벌군이라.”

“예. 지금 일어나는 일은 모두 서결 장군이 여연을 떠나 생긴 일. 오랑캐들로 하여금 언제든 서결 장군이 다시 여연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알게 한다면, 지금처럼 섣불리 국경을 넘어오는 일은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옵니다.”

이선을 향한 준백의 눈가가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졌다.

“정벌이 끝나면 서결 장군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될 터이니, 그때 마땅한 상을 내리면 서결 장군 또한 크게 기뻐할 것이옵니다.”

확실히 이제껏 나온 의견 중에선 가장 현실적이고도 실리적인 제안이었다.

문제는 그 안에 숨겨진 준백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서결과 관련된 문제라면 허투루 나설 이가 아니었으니.

하지만 오래지 않아 다른 대신들이 준백의 의견에 힘을 싣기 시작하였다.

“전하, 서결 장군으로 하여금 오랑캐 무리를 정벌하게 하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대신들이 입을 모아 이선을 재촉하였다.

다른 뾰족한 대안을 찾기엔 시간적으로도 부족한 상황.

무엇보다 북방의 오랑캐는 오로지 결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이선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좋다.”

이선은 고심 끝에 준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 시간부로 서결 장군을 임시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는 바.”

부디 이번 임무가 그대에게 힘을 실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기를.

나의 뜻을 저들에게 확고히 심을 수 있기를.

“압록강 이북으로의 출정을, 명한다.”

이선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어명을 내렸다.

***

출정 어명이 훈련원까지 오는 데엔 고작 반 시진도 걸리지 않았다.

한양으로 온 지 겨우 두 달도 되지 않아 다시 북방으로 가라니.

이는 분명 결을 향한 조정의 축객이나 다름없었다.

소식을 들은 진위는 가감 없이 불쾌감을 내비쳤다.

“어찌 장군께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아무리 오랑캐의 침입이 잦다 한들 장군을 다시 그곳으로 보내다니요! 필시 영상 대감의 흉계임이 분명합니다.”

“검이 필요한 곳에 검을 보내는 것을 어찌 그르다 말할 수 있겠느냐.”

“하오나 장군!”

“장수는 그저 주인의 명령을 따를 뿐이다.”

주인이 결정을 내렸다면 마땅히 그 뜻이 있을 터.

사지에 내모는 것이 이선의 뜻이라면, 신하된 자로서 그 뜻을 따를 수밖에.

그나마 대신들이 이천 단위의 군사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선이 만 명 이하로는 결코 불가하다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니.

이선도 나름 결을 지키기 위한 방어를 한 셈이었다.

“우리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준비를 끝내, 봄이 지나기 전에 출진한다.”

“……명 받잡겠나이다, 장군.”

진위는 더 이상 말을 더하지 않고 결에게 고개를 숙였다.

진위가 나간 후.

홀로 남은 결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정벌을 간다는 것은 단순히 국경선을 지키는 것과는 달랐다.

때에 따라선 대규모의 전투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어느 때보다 만발의 준비가 필요할 터.

주어진 시간이 짧으니 그 안에 최대한 많은 준비를 해야만 했다.

‘저 아이가 가장 문제인데…….’밖으로 나온 결의 시선 끝에 단이가 닿았다.

오도카니 주저앉은 단이는 차제구를 씻다 말고 입을 작게 벌린 채 나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흰 나비가 팔랑팔랑 궤도를 그릴 때마다 그녀의 작은 머리도 곡선을 그리며 나비를 따라다녔다.

정벌에는 당연히 단이도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위험한 전쟁터에 무방비로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

매 시간 자신이 그녀를 지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전쟁터에서 제 곁은 가장 안전한 곳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곳이 될 것이다.

하여 교전 중에는 군영에서 단이 홀로 기다려야 할 터.

군사 몇을 붙여줄 생각이지만, 그것만으론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 같았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스스로 빠져나갈 힘도 있는 것이 좋겠지.’지금껏 그 어떤 전쟁 앞에서도 이토록 다비를 생각해본 적이 없거늘.

이제 단이는 그에게 보통의 다비가 아니었기에, 생각 또한 자연히 그녀를 향하게 되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었다.

그녀가 나의 곁에 있어도 안전하기를 바라기에.

그렇게 오래, 나의 곁에 있기를 바라기에.

***

그날 저녁.

아직 다시(茶時)가 되지 않았는데 웬일로 결에게서 호출이 왔다.

그것도 품이 넉넉한 저고리와 바지까지 주면서 말이다.

“이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려무나. 도련님께서 기다리신단다.”

“어디로 가는 것이어요, 덕원 할아버지?”

“글쎄다……. 밖으로 나가시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덕원 역시 이유는 모르는 눈치라.

의아한 마음을 접어 두고 단이는 옷을 갈아입었다.

끈으로 질끈 머리를 동여매고 바지와 저고리에 제 몸을 집어넣었다.

이렇게 입고 나니 영락없이 소년의 모습이라.

어색하게 제 모습을 내려다보던 단이는 곧 덕원을 따라 결에게로 향했다.

사랑채에 다다르니, 결이 마당에 십자 모양을 한 나무 기둥을 세운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역시 평상복이 아닌 무복(武服)을 입고 있었다.

덕원이 인사를 하고 떠나자 마당엔 결과 단이만 남게 되었다.

“가까이 오거라.”

단이는 자박자박 흙길을 가로질러 결에게 다가갔다.

무엇을 하려고 이런 옷차림으로 부른 건지 아직 감이 오질 않았다.

결은 그런 단이를 내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린 곧 압록강 이북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압록강 이북이라면…… 심 다점이 있던 치원 쪽 아니어요?”

“그래. 요 사이 여진족의 침탈이 심해진 까닭에 그들을 정벌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 말에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왔다.

여진족 침탈, 정벌.

거기까지만 들어도 결이 위험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곁을 항시 따라야 하는 자신 역시도.

두려움보다 더 먼저 찾아온 것은 죄책감이었다.

자신과 같은 여진족 때문에 결이 위험을 감수하고 정벌에 나서게 되었으니.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자책이 단이의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전쟁이 시작되면 내가 너를 지켜주는 데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전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네게 닥칠 수도 있겠지.”

“…….”

“하여 지금이라도 너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고자 한다.”

방황하던 눈동자가 결에게 향했다.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요?”

“지난번에는 운 좋게 네 공격이 먹혔다지만, 전쟁터에서 요행을 바라는 건 곧 죽음을 앞당기는 것과 같다.”

결이 옆에 세워둔 나무 기둥을 짚었다.

“네가 있는 곳까지 적이 내려오지 않기를 바라야겠지만, 뜻하지 않은 위험은 언제든 찾아오는 법이니.”

“…….”

“가르침을 따라올 수 있겠느냐.”

사뭇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 단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일전에는 단순히 칼만 손에 쥐여 주었다면, 이제는 그 칼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뜻이었다.

‘이 가르침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리께선 나를 데려가시지 않겠지.’설령 그 척박한 땅에서 차 한 모금 마시지 못하게 되더라도.

나의 안전을 위하여.

단이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결심을 굳혔다.

결과 함께하려면, 응당 그가 감내해야 할 위험 속으로 함께 뛰어 들어가야 할 터.

단이는 굳은 눈빛으로 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야 나리께서 마음 편히 전장에 나가실 수 있다면, 기꺼이 배우겠습니다.”

당신이 나를 지킬 수 없는 순간에도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나리께서 저를 지켜주시지 않아도, 저 스스로를 지키는 법.”

그런 당신에게 도움이 되진 못할망정 짐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이미 나의 민족이 당신에게 너무도 큰 누를 끼치고 있기에.

그 죄를 대신 갚기 위해서라도 뭐든 해야 했다.

“저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훈련원 군사님들처럼 병법이란 것을 익히면 될까요?”

단이의 또랑또랑한 눈에 의욕이 앞섰다.

그 맹랑하고도 귀여운 모습에 결의 입가에 희미한 실소가 내걸렸다.

“우선 기본적인 것부터.”

결은 단이의 손에 손가락 길이만 한 나무 목검을 쥐여 주었다.

그러곤 그녀의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를 톡톡 다독였다.

“어깨에 너무 많은 힘이 들어가지 않게끔 하거라. 목 위에 힘이 들어가면 그만큼 몸이 경직되어 팔다리를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그의 커다란 손이 어깨에서부터 내려가 단이의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자세를 하나하나 직접 잡아주었다.

그러느라 결의 몸과 단이의 등이 서로 딱 맞붙게 되었다.

“…….”

단이는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손끝이 향한 방향만 애써 노려보았다.

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등 뒤로 그의 단단한 몸이 밀착되어 훈련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맞닿은 그의 배는 어찌 이리 바위처럼 딱딱한 것인지.

자신과는 전혀 다른 그 생소함이 어찌 이리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인지.

너무 가까워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결에게까지 다 전해질 것만 같았다.

거기다 어깨며 팔이며 만지는 손은 한없이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단이는 마치 제 자신이 깨지기 쉬운 도자기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팔은 조금 더 앞으로. 이 동작은 적의 급소를 빠르게 제압하는 것이다.”

결은 십자로 된 나무 기둥을 사람 몸처럼 짚어가며 단이가 공략해야 할 부분을 알려주었다.

그는 행여 작은 동작에도 단이가 불편해할까,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한 동작 한 동작 세심하게 가르쳐 주었다.

“적이 너를 끌어당기려 하거든, 너는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네 몸을 내던지거라.”

“제 몸을 내던지라고요? 그럼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 반동으로 적의 중심이 무너졌을 때 역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자, 해 보거라.”

결이 단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힘이라곤 거의 없이 그저 살짝 당기는 것에 불과했다.

‘끌어당길 때 몸을 내던지기……. 지금이다!’몸을 내던지란 말만 몇 번을 되뇌던 단이가 결의 신호에 힘껏 몸을 내던졌다.

하나 시작부터 너무 의지가 충만했던 탓일까.

아니면 단이의 무게를 너무 과소평가한 결이 몸에 힘을 완전히 푼 탓일까.

“으앗!”

결과 단이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생각지 못하게 뒤집어진 세상에 단이가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풀썩!

바닥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잠잠한 고요가 두 사람 위로 내려앉았다.

“…….”

까슬까슬한 흙바닥 대신 온몸을 감싼 따스한 체온.

단이는 감았던 눈꺼풀을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몸이 굳고 말았다.

눈앞에는 자신을 끌어안은 채 누워 있는 결이 보였다.

제 얼굴을 담은 검은 두 눈동자, 그 아래 곧고 높게 솟은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위험할 만큼 퇴폐적인 빛을 머금은 붉은 입술.

결의 얼굴이 지척에서 그녀의 시선을 옭아매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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