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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33화 (33/100)

33화

두 입술 사이에서 얕은 숨들이 빠르게 오갔다.

내뱉은 숨결이 붉은 입술 새로 들어가고, 새어 나온 숨이 다시 폐부로 스며들길 한참.

“…….”

옭아매듯 단이의 두 눈을 바라보던 결의 눈동자가 서서히 아래로 향했다.

앵두처럼 붉디붉은 입술 위를 그의 눈길이 배회하였다.

단이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단이 역시 제 몸을 단단히 끌어안은 팔과 맞닿은 가슴, 얽힌 다리에 많이 당황한 얼굴이었다.

훈련의 여파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설까.

찹쌀떡같이 하얗던 두 뺨이 붉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저 뺨에 입을 대어 보고 싶었다.

‘……제정신이 아니군.’은연중 비집고 들어온 생각에 결이 속으로 헛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신호가 되고 만 걸까.

단이의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전부 빨려들듯이 그의 눈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숱으로 그린 듯 짙고 선 고운 아미와 투명하리만치 맑은 눈동자, 나비의 날개처럼 길게 드리운 속눈썹, 앙증맞게 솟은 콧대, 보얀 피부.

그리고 다시, 입술.

순간 설명 못할 이상한 감정이 결의 가슴속에 휘몰아쳤다.

경직되는 몸과 다르게 혈관을 달리는 피가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어찌할 줄을 몰라 가슴만 세차게 뛰었다.

놓아주기 싫다.

그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지배하듯 점령해 나갔다.

결은 갈증이 이는 목에 힘을 주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입이 갈증을 해소할 무언가를 찾아 나설 것만 같았다.

“적을 제압하고도 이리 가만히 있으면, 역으로 공격을 당할 터인데.”

예컨대, 단침이 고인 단이의 입술 같은.

“어찌하겠느냐.”

그 말에 단이의 동공이 옅게 떨려왔다.

그녀가 곧장 저를 밀치고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어진 그녀의 행동은 뜻밖이었다.

“이리 제압할 것이어요.”

찰나 간 생긴 틈을 타 단이가 작은 목검으로 결의 어깨 쪽을 콕 찌른 것이다.

조금 전 그가 가르쳐준 급소 중 한 부분이었다.

“저, 잘하였습니까?”

예상치 못한 공격은 어깨가 아니라 심장을 겨눈 것 같았다.

그 간질거리는 역습에 한순간 몸의 경직이 풀린 결은 저도 모르게 작은 실소를 흘렸다.

한곳으로 몰리던 피가 일시에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단이도 눈가를 곱게 휘며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잘하였다.”

단이의 뒷머리를 쓰다듬은 결은 그녀를 안은 상태 그대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단이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아쉬운 손끝이 그녀의 어깨를 한번 꾹 쥐었다가 미련처럼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득 시선을 내리니, 단이의 목에 둘러놓았던 광목천이 흐트러진 게 보였다.

그 바람에 드러난 짙은 흉터가 결의 시야를 헤집어 놓았다.

겨우 딱지가 떨어진 흉터는 그날의 참상을 여실히 떠올리게 만들었다.

결이 손을 뻗어 그 흉터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흠칫 어깨를 떤 단이가 커다란 눈을 들어 결을 올려다보았다.

“만일을 대비하여 훈련은 계속하겠지만…….”

결은 느슨해진 광목천의 매듭을 느릿하게 조여 주었다.

“최대한 너에게 위험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군사를 여럿 붙여줄 것이다.”

그의 손끝에서 상처가 다시 광목천 뒤로 사라졌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진 말거라.”

그럼에도 상처가 보이는 듯 결의 눈빛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가만히 그런 결을 바라보던 단이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답하였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

“나리께서 함께 계시는데, 불안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검은 눈동자에 비친 단이의 얼굴엔 거짓이라곤 일절 없었다.

진심으로 그를 믿는 얼굴이었다.

“나리께서 저를 걱정하여 주시는 그 마음 하나면, 저는 충분합니다.”

그리 말하는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방금 보시었잖아요. 저, 이래 봬도 나름 검 잘 씁니다. 한 번 더 보여드릴까요?”

목검을 잡고 앞으로 쭉 뻗은 팔이 제법 야무졌다.

부러 결을 웃기기 위해 한 행동이라.

낮게 웃음을 흘린 결은 그 자세 또한 세심하게 고쳐 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단하구나.”

짧은 칭찬에 단이가 씨익 입가를 늘이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 환한 미소에 결의 가슴속으로 또 한 번 파동이 일었다.

혼란도, 부정도 없는.

언제든 흘러넘쳐도 이상하지 않을.

부드러우나 확실한 마음이었다.

그녀, 단이를 향한.

***

깊은 밤.

사랑방에 켜 놓은 초가 조용히 타오르고, 그 아래 종이 넘기는 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준백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으로 무언가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각종 물품들과 수량이 적힌 서책은 언뜻 보면 장부처럼 보이기도 했다.

목록을 꼼꼼히 살피는 눈동자는 단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겠다는 듯 예리하였다.

그렇게 장부를 들여다보길 한참.

“대감.”

준백에게만 겨우 들릴 목소리와 함께 창호지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탁, 장부를 덮은 준백은 그것을 서탁의 비밀 공간에 넣고 자세를 바로 하였다.

“들어와.”

문 여는 소리조차 어둠에 감춘 객이 그림자처럼, 안개처럼 사랑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사내는 딱 어둠이 허용하는 공간까지만 걸어 들어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르셨습니까.”

어눌한 조선말이 사내의 입에서 나왔다.

언뜻 들으면 그저 특이한 억양이다 싶었지만, 자세히 살피면 분명 이방인의 말투였다.

“준비는 끝난 것이냐.”

“그렇습니다, 대감.”

들어 올린 얼굴 위로 언뜻 시린 달빛이 스쳤다.

사내의 한쪽 뺨엔 눈 아래부터 턱 끝까지 가로지르는 흉터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칼을 잡아온 이라는 걸 여실히 알려주는 흉터.

그러나 흉터 진 얼굴은 어둠으로 빠르게 되돌아갔다.

준백은 사내를 똑바로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만간 사람을 꾸려 북쪽으로 가야겠다.”

“여연입니까.”

“압록을 다시 건너기 전이면 더욱 좋고.”

준백은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춰 거의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곳에서 눈치껏 여진족 군사로 둔갑하였다가 놈을 쳐라.”

어차피 둔갑은 하나마나겠지만.

준백은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작게 헛기침을 하였다.

“주변은 어찌할까요.”

“주변이라…….”

주변이란 말에 준백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독사의 그것처럼 바짝 조여졌다.

그의 입술 끝이 의미심장한 뜻을 품으며 말려 올라갔다.

“방해되면 함께 죽여 버려. 그게 누구든.”

“알겠습니다.”

사내는 짤막하게 대답하곤 사랑방을 나갔다.

그의 흔적은 곧 초 끝의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내가 사라진 방향을 보던 준백의 눈동자가 서늘한 미소를 띠었다.

“서결…….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생겼구나.”

그러게, 제 숙부를 따라 조용히 북방에 남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리하였다면 적어도 내 손으로 너의 목숨을 끊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어찌하랴. 너의 운명이 그러한 것을.”

죽음을 자초하는 것도 제 아비와 꼭 닮은 놈.

“어리석은 부자 같으니라고.”

기억인가. 혹은 제 상상인가.

어디선가 한 사내의 절망적인 절규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배신감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의 부르짖음이.

“푸흐흐……. 너도 곧 그곳으로 보내 주마, 서결.”

준백의 입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게 흘러나왔다.

***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

단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보선 어멈을 따라 정방으로 향했다.

밤늦게까지 차 연구와 더불어 결과 함께 훈련까지 한 탓일까.

피곤이 축적된 것인지 오늘따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하여도 목욕 시중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단이는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눈을 억지로 뜨며 차 주머니를 커다란 욕조 안에 넣었다.

뜨거운 수증기와 일정한 간격을 따라 향이 피어오르는 정방에 곧 향긋한 차 내음이 퍼져 나갔다.

“하암…….”

말간 목욕물이 찻물로 붉게 물드는 것을 보던 단이가 또다시 길게 하품을 하였다.

아무리 버티려 해도 하품은 좀처럼 참을 수가 없었다.

요 며칠 계속 훈련을 하여서 그런가.

차 연구만 하고 잠에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몸이 고단하였다.

일평생 몸을 가장 많이 움직인 일이라곤 차밭에서 일창일기 여린 찻잎 따는 일이 전부였으니.

결을 따라 마당을 뛰고 무예를 익히는 것이 퍽 힘들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따스한 수증기까지 온몸을 감싸니, 더욱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제도 이리 졸다가 향을 건드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목욕물을 더럽힐 뻔하지 않았는가.

‘오늘은 그러면 안 돼. 정신 차리자, 단이야.’단이는 두 뺨을 찹찹 손바닥으로 때리곤 다시 목욕물에 차를 우려내었다.

그렇게 두 번째 차 주머니를 넣었을 때쯤.

드디어 정방 안으로 결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보선 어멈을 따라 단이와 다른 종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단이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까닭에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하였다.

곧 결이 하얀 도포를 벗고 욕조 안으로 발을 들였다.

결의 등장과 찰방거리는 물소리에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던 졸음도 잠시나마 달아났다.

‘목욕이 끝나면 다시(茶時) 전까지 조금 시간이 있으니, 그때 눈을 붙여야겠다.’단이는 두 눈에 힘을 주며 도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목욕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한 적막 속에서 이루어졌다.

들리는 소리라곤 물줄기가 결의 몸을 타고 흐르는 소리와 종들의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사방이 조용한 데다 따듯한 수증기와 향기로운 향까지 온몸을 노곤하게 만드니.

억지로 버티고 있던 단이의 눈꺼풀이 다시 깜빡깜빡 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랫입술도 꾹꾹 깨물어 보고 허벅지도 꼬집어 보았지만 영 소용이 없었다.

졸음 앞에서는 장사 없다는 말이 딱 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

결국 단이는 차 주머니를 손에 쥔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

그 모습을 바로 맞은편에 앉은 결이 못 볼 리 없었다.

행여 주머니를 놓칠까, 꼭 쥐고 있던 작은 손에 점차 힘이 빠지고 있었다.

구석에 웅크린 채 까무룩 선잠에 든 모습이 퍽 안쓰러운지라.

“나리, 이제 벚꽃 가루를…….”

결이 손을 들어 보선 어멈의 말을 막았다.

보선 어멈이 의아한 눈으로 보았으나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 자리를 떠나란 손짓만 할 뿐이었다.

보선 어멈의 시야에 그제야 구석에서 졸고 있는 단이가 보였다.

설마, 하는 생각이 두 눈에 어렸다.

결의 침묵에 곧 제 생각이 옳았음을 깨닫게 되었지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보선 어멈이 곧 고개를 조아렸다.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그녀는 결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하곤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다른 할 일이 있다며 종들을 모두 데리고 정방을 떠났다.

구석에서 졸고 있는 다비의 존재는 애초부터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으므로.

나뭇결이 맞물리는 소리가 느른하게 이어지다 곧 문이 닫혔다.

들리는 소리라곤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전부인 공간.

결은 여전히 단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눈에 담았다.

작게 벌어진 입술 새로 옅은 숨결이 드나들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지척의 거리.

결은 물속에서 팔을 뻗었다.

그녀가 쥔 차 주머니를 살며시 감싸니, 잠결에도 놓치지 않으려는지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 잠에서 깨었나.

시선을 드니 굳게 감긴 눈은 미동조차 없었다.

오히려 까딱이는 고갯짓만 점점 커지고 있었다.

깨워서 방으로 돌려보내도 되건만.

이리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건, 이 아이의 얼굴을 조금 더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싶은 까닭이라.

결은 금방이라도 옆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단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 짧은 새에 깊이도 잠이 들었는지 뺨에 닿은 온기에도 단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으음…….”

여린 신음이 그의 손바닥에 물과 함께 고일 뿐이었다.

뚝, 뚝.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고요한 물 위로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 소리에 반응하는지 길게 뻗은 속눈썹이 잘게 떨리며 손바닥을 간질였다.

손안에 폭 감긴 작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묘한 감정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물에 잠겼는데도 지독하게 퍼지는 이 갈증이란.

결은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다부진 몸에 물이 크게 일렁이며 물살을 뻗어 내었다.

곧 짙은 그림자가 단이를 물들였다.

그녀를 단숨에 삼켜버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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