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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34화 (34/100)

34화

톡.

결에게서 떨어진 물방울 하나가 단이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음…….”

그 간지러운 촉감에 곧게 뻗어 있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이내 천천히 올라간 눈꺼풀 밑으로 다갈색 말간 눈동자가 드러났다.

깜빡, 깜빡.

단이는 잠기운 가득한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멍하니 앞을 보았다.

꿈을 꾸는 건가.

왜 나리께서 내 앞에 계시는 거지.

그런데 이리 가까이서 보니, 우리 나리 참으로 잘 생기시었다.

“헤, 나리이…….”

단이는 제 뺨을 감싼 결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나리 손은 꿈에서도 이리 따듯하구나.

포근하고 다정해.

“나리 손, 따듯하여요…….”

찹쌀떡 같은 뺨이 손바닥 위에서 눌리다 펴지길 몇 번.

곧 단이의 입에서 다시 새근새근 고른 숨이 새어 나왔다.

“…….”

결은 그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단이만 바라보았다.

나쁜 짓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건만.

괜스레 가슴이 세차게 뛰며 근육이 긴장되었다.

제 안의 은밀한 욕망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마른침을 삼키는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다행히 단이는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흘리고선 전보다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하…….”

작게 한숨을 내쉰 결은 착잡한 눈으로 손바닥에 기대어 자는 단이를 보았다.

굳게 눈을 감은 채 잠에 곯아떨어진 것이, 그만큼 요 며칠이 고되었던 모양이다.

이런 모습을 다른 이들이 본다면 분명 뒷말이 돌 터.

가만히 잠든 단이의 모습을 보던 결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한 손으로 수건을 집어 든 그는 대충 가슴과 어깨 등에 묻은 물기를 훔치고 도포를 걸쳤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단이를 안아 들었다.

등청까진 시간이 아직 남았으니 그 시간만큼이라도 눈을 붙이게 해주고 싶었다.

어찌나 깊게 잠들었는지, 이리 움직일 동안 단이는 뒤척임 한번 없이 색색 고른 숨만 내쉬었다.

“움…….”

순간 단이가 고개를 돌려 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 탓에 말랑한 뺨이 그의 가슴팍에 완전히 밀착되었다.

둥둥 울리는 심장의 고동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리라.

품에 꼭 안겨 자는 단이의 모습에 결은 다시금 피가 빠르게 돌았다.

간질거리고, 괜히 헛기침이 나올 것 같고.

무언가 참을 수 없이 요동을 쳐 가슴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 해소할 길 없는 감정이라.

그저 단이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이성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결은 단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정방 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서늘한 새벽 공기가 마르지 않은 몸을 차갑게 휘감았다.

“……나오셨습니까, 도련님.”

고개를 돌리니 정방 옆에 보선 어멈이 서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보선 어멈은 결의 품에서 잠이 든 단이를 힐긋 보고는 조금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이 방에는 미리 요를 깔아 두었습니다.”

마치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제가 업고 가겠습니다.”

“괜찮네.”

“고뿔에 드실까 염려됩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

보선 어멈은 뜻 모를 시선으로 결을 보았다.

그러다 이내 뜻대로 하라는 듯 입을 다물고 발길을 돌렸다.

그녀는 들고 있는 호롱불로 앞을 밝히며 단이의 방까지 길을 안내했다.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 위엔 어떠한 생각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단이의 방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걷기만 하였다.

결이 요 위에 조심스럽게 단이를 누였다.

수건으로 물기를 훔치긴 했어도 온전히 닦지는 못한 터라.

젖은 옷과 몸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방바닥을 어지럽혔다.

“이곳 정리는 제가 할 터이니, 도련님께서는 이만 돌아가셔서 의관을 정제하십시오.”

이제 곧 다른 가노들이 일어나 돌아다닐 터.

행여 단이의 방에서 이런 차림으로 나오는 것을 보인다면 분명 이런저런 말들이 오갈 것이다.

자신을 향해서는 무어라 떠들든 결은 상관없었다.

하나 단이를 두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부탁하네.”

결국 결은 자고 있는 단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 문이 닫히자 보선 어멈은 작게 숨을 내쉬며 마른 수건으로 방바닥을 닦았다.

물기를 닦는 얼굴엔 여전히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이윽고 바닥을 말끔히 닦은 보선 어멈이 곤히 잠든 단이를 내려다보았다.

단꿈을 꾸는가.

여전히 세상모르게 잠든 그녀는 이 순간에도 아물아물 입술을 움직이며 웃을 듯 말 듯 하고 있었다.

“나리이…….”

여린 음성이 어렴풋하게 흘러나왔다.

그 유약한 부름을 들은 보선 어멈의 눈동자에 흐린 빛이 어렸다.

이불을 단이의 목 아래까지 끌어당긴 보선 어멈이 흐트러진 머리를 가만가만 넘겨주었다.

“……어찌하려고.”

잠든 단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어쩐지 짙은 안쓰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네가 걸어야 할 길은 순탄치 않은 길이거늘.

어찌하여 도련님께서 널 자꾸 눈에 담으시는 건지.

어찌하여, 너 또한 도련님을 부르고 있는 건지.

천한 노비의 처지, 아무리 양반의 귀염을 받은들 첩 자리가 고작이었다.

언제나 음지에 가려 떳떳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도 없는.

사랑 하나에 모든 것을 내걸기엔 시작점부터가 진창인 것이다.

독한 것들이야 어떻게든 제 자리를 사수하겠지만, 이 아이는 아니었다.

그 생각에 보선 어멈의 눈빛이 더욱 씁쓸해졌다.

“그 마음, 거둘 수는 없겠느냐.”

그저 한순간 흔드는 바람이라 생각하고 잊을 수는 없겠느냐.

“그래야…… 네가 안전할 수 있을 텐데.”

네가 상처받을 일이 없을 텐데.

하여 보선 어멈은 한참이고 단이의 곁을 지키며 그녀의 평안을 빌었다.

첫째는 싹싹하고 매사에 열심인 단이를 어느 순간부터 점점 귀히 여기게 된 까닭이요,

“그 아이처럼, 그리 다 내던지지 말고…….”

둘째는, 자꾸만 이 아이에게서 자신이 알던 누군가가 보이는 까닭이었다.

****

결이 임지(任地)로 갈 날은 하루하루 빠르게 다가왔다.

단이 역시 그를 따라 한양을 떠나야 하는 터라.

소식을 들은 선정이 천 상궁에게 일러 단이를 데려오도록 하였다.

“옹주 아기씨, 단이를 데려왔나이다.”

“어서 들이거라.”

곧이어 문이 열리고 단이가 화선당 안으로 들어왔다.

단이가 절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 선정은 여지없이 반가움과 아쉬움을 함께 드러내었다.

“네가 곧 도성 밖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히 가야만 하는 것이냐?”

그녀의 아쉬움 속엔 결에 대한 마음도 함께였으나, 단이가 그것까진 알 리 없었다.

“예. 나리께서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을 받으시어, 저 또한 함께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자주 너를 부를 것을……. 우리가 교류하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 금방 떠나는 것이냐.”

선정은 잔뜩 속상한 표정으로 단이의 손을 잡았다.

겨우 얻게 된 차벗을 멀리 떠나보낸다는 생각에 퍽 속상한 듯했다.

단이는 함께 아쉬워하며 선정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그래도 일이 끝나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것이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어요.”

“그럼…… 그때 서결 장군도 함께 돌아오는 것이냐?”

조심스럽게 묻는 선정의 말에 단이는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리께서 가는 곳이 곧 제가 가는 곳이니, 제가 한양으로 돌아온다면 나리께서도 돌아오셨다는 뜻이어요.”

“그래……. 그렇구나.”

남몰래 졸이던 가슴에 안도가 스며들었다.

옹주의 신분으로 차마 외간 사내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을 수는 없는 노릇.

그건 결의 다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춘풍 꽃물이라는 소문 때문에 단이에게는 더욱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내가 괜한 입방정을 떨었지, 그때.’한사코 아니라던 단이의 말을 믿고 싶어서.

행여 그사이 마음이 바뀌었을까 걱정되어서.

하여 선정은 그날 이후로 홀로 애태우며 다시 결을 만나게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가는 곳은 많이 위험한 곳이라 들었다. 가서 꼭 몸조심하여야 한다. 장군께도 조심하라 일러주고.”

“예, 옹주 아기씨. 꼭 몸 조심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나와 약조하는 거다.”

“예, 옹주 아기씨.”

선정이 단이의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두 여인은 서로 마주 보며 편안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함께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길 잠시.

“참, 혹시 단이 너는 글을 읽을 줄 아느냐?”

“예. 어릴 적 할아버지께 한문과 언문 모두 배웠습니다.”

“잘 되었다. 천 상궁, 그것을 가져와 주게.”

“그, 그것을요?”

“그래. 어서.”

선정이 싱긋 웃으며 천 상궁에게 말했다.

당황한 천 상궁이 진심이냐며 눈빛으로 되물었지만, 선정은 도리어 얼른 가져오라며 재촉하였다.

흠흠, 작게 헛기침을 한 천 상궁은 마뜩잖은 얼굴로 미적거리다 이내 서책 하나를 꺼내왔다.

“이게 무엇입니까?”

“소설이다.”

“소설이요?”

“그래. 애정 소설 말이다.”

선정의 눈가가 조금 더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운종가 뒤쪽에 피맛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한 서책방에 아주 유명한 화공 하나가 있다. 그자의 이름이 뭐라 그랬지, 천 상궁?”

“갓 화공이라 하였사옵니다.”

“그래, 맞아. 갓 화공! 그 화공이 삽화를 그려 판 애정 소설이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지.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게 바로 갓 화공의 삽화가 들어간 이 애정 소설이다.”

선정은 잔뜩 신이 나서 서책을 단이에게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문자만 주르륵 나열되어 있는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애정 소설에는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종이에 담은 것처럼 생생한 화법에 단이는 감탄을 하며 서책을 구경하였다.

개중엔 남녀 주인공이 함께 나오는 그림도 더러 있었다.

서로를 향한 애틋한 눈빛과 애절한 마음이 꼭 실제 인물을 보듯 생생하게 느껴지니, 글만 읽을 때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있었다.

과연 사람들이 애타게 이 책을 찾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선정은 삽화 속 남자 주인공을 바라보며 꿈결처럼 말하였다.

“누군가를 연모한다는 것은 이토록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겠지…….”

그녀의 머릿속에 다시금 둑제 때 보았던 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한 번이라도 이리 나란히 마주 볼 수만 있다면.

이루기 힘든 소원이기에 더욱 애틋한 마음이었다.

“연모가 무엇이어요?”

단이가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 말에 바짝 몸을 앞으로 기울인 선정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하였다.

“운명의 상대를 만나 온 마음을 주고, 그 상대를 나의 전부라 생각하는 것이다.”

단이에게 운명이란 그저 삶에만 국한된 말이었다.

하여 선정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상대가 제 운명이라는 건 또 어찌 아는 것이어요?”

“이 소설에서 보면, 운명의 상대를 만난 순간 꼭 얼어붙은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하더구나.”

“…….”

“또 주변의 다른 것들은 죄 사라져서 그 사람만 눈에 들어오고, 눈빛에 사로잡히고, 시간이 곧 멈출 것처럼 아주 느리게 간다고도 하였다.”

선정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단이는 이상하게 결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결을 마주친 순간 얼어붙었던 몸.

심 다점도, 도적들도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시야를 가득 채우던 결의 모습.

온몸을 사로잡던 검은 눈빛. 멈출 듯 느려지던 시간.

무엇 하나 다른 것이 없어 점차 기분이 이상해졌다.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보면 말이다.”

선정이 두 손으로 가슴 한가운데를 짚었다.

“여기 가슴이 쿵쿵쿵, 아주 세게 뛴다고 한다.”

“…….”

“그것이 바로 연심이다. 연모하는 마음.”

“연모하는 마음…….”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왔다.

그저 생각만 하였을 뿐인데.

결을 볼 때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뛰던 심장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쿵쿵쿵, 아주 세차게 뛰며.

처음엔 두려움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소문 속 북방 귀신이어서, 언제든 그의 손에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서 두렵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결을 위하는 마음이 두려움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평안하시기를 바랐고, 미소 지으시기를 바랐고, 행복하시기를 바랐다.

나의 차를 좋아하여 주시길 바랐다.

나를, 어여삐 여겨 주시길 바랐다.

“…….”

단이는 선정이 펼쳐 놓은 서책 속, 서로를 애타게 바라보는 두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순간 두 주인공의 모습 위로 결과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화륵 얼굴이 달아오른 단이가 가슴을 꾹 짚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정 하나가 그 안에서 피어올랐다.

‘나리를…… 연모하고 있어.’

그 생각에 심장 박동이 한층 더 빨라졌다.

연모였나 보다.

이 감정의 이름이.

그분을 나의 운명이라 생각하여서.

그분을…… 나의 전부라 생각하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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