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단이야?”
“……아, 네?”
단이는 선정의 부름에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선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얼굴이 어찌 그리 붉어졌느냐?”
“네, 네?”
“혹 열이 나는 것이야? 안색도 갑자기 안 좋아 보이는데.”
“아,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단이는 손으로 두 뺨을 감쌌다.
손바닥 안에 열이 뜨끈하게 고일 정도로 얼굴에 열이 돌고 있었다.
그 열기가 단이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대체 어찌 이러는가.
질문을 떠올리기 무섭게 단이의 시선이 다시 애정 소설로 향했다.
삽화 속 주인공들의 얼굴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돌아왔다 한들,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결과 애틋하게 마주 보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두 뺨의 열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눈에 띄게 허둥거리던 단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벌써 차를 올릴 시간이 되었나 보구나. 그럼 어서 가보아야지. 오늘도 천 상궁이 훈련원까지 데려다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옹주 아기씨.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찾아뵙고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럼…….”
단이는 선정을 향해 절을 하곤 허둥지둥 화선방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 따사로운 햇살 속 스며든 꽃향기가 그녀의 마음을 더욱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신을 신었으나 발은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냉큼 나왔건만.
막상 훈련원으로 돌아가려니 몸이 절로 경직된 까닭이었다.
‘연모…….’다시 떠오른 두 글자에 가슴이 쿵쿵 두방망이질을 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던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은 죄 사라지고, 오로지 결의 얼굴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쿵쿵쿵. 뻐근할 만큼 뛰어오르는 가슴에 단이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래도 연심은 벌써 제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렸나 보다.
깨달음과 동시에 이리도 온몸을 얽매는 것을 보면.
“음?”
앞서 걷던 천 상궁이 허전한 뒤를 돌아보았다.
서둘러 나와 놓고선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으니.
천 상궁이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재촉하였다.
“안 오고 무얼 하느냐. 그리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얼른 따라오너라.”
“아, 송구하옵니다.”
단이는 마음을 다잡고서 천 상궁의 뒤를 따랐다.
훈련원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심장은 더욱 세차게 뛰어올랐다.
하지만 긴장과는 별개로 이상하게 기대가 차올랐다.
동시에 두둥실 떠오르는 설렘까지도.
미적거리던 단이의 발걸음은 어느새 천 상궁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정도로 속도를 높여갔다.
얼른 나리를 보고 싶었다.
나의 세상, 나의 전부인 나리를.
***
하지만 막상 연모의 마음을 깨달았다 하여 단이와 결 사이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결을 연모하게 되었다 하여 다비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나마 바뀐 것이 있다면…….
“……무어 할 말이라도 있느냐.”
바로 결을 바라보는 시선의 빈도와 눈빛의 농도였다.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뚫어져라 쳐다보는 단이에 결이 견디다 못해 물었다.
멍하니 결을 쳐다보던 단이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냥 잘…….”
“잘?”
“잘…… 못 자서요오!”
“…….”
“헉.”
돌연 버럭 소리를 지른 단이가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나리의 얼굴에 넋을 잃어도 그렇지.
하마터면 ‘잘생기셔서 쳐다보고 있었다’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입에 담을 뻔하였다.
거기다 놀란 나머지 감히 소리까지 지르고 말았으니.
어쩌면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훈련에 대한 항변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이 요망한 입술.
단이는 속으로 제 입술을 마구 탓하며 결의 눈치를 살폈다.
“……방해 안 할 테니 좀 자거라. 퇴청할 때 깨워줄 테니.”
결은 방해 안 하겠단 말을 지키는 것처럼 마지막 잔을 내려놓고 그대로 소다옥을 나가주었다.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언뜻 서운함이 보인 것은 제 착각일까.
“힝…….”
최대한 오래 그를 마주하고 싶었던 단이는 되레 시무룩해져서 사용한 다구들을 정리하였다.
누군가를 연모하게 된 것도, 또 그 감정을 직면하게 된 것도 모두 처음인지라.
하여 단이는 결 앞에서 어찌 행동해야 할지, 또 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지금은 가슴을 쿵쿵 두드리기도 하고, 또 저릿저릿하게 만들기도 하는 감정의 파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이리저리 휩쓸릴 뿐이었다.
‘내가 이런 마음인 걸 나리께서 아신다면…… 어찌하실까.’부담스러워하실까.
어쩌면 가당찮은 일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조선에서의 다비는 그저 미천한 종일 뿐.
그런 종이 감히 상전을 마음에 품는다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욕심을 지녔다며 언짢게 보실 것이리라.
그러니 숨겨야 한다.
내가 이방인임을 숨겼던 것처럼 이 마음 역시 철저히 숨겨야 한다.
그래야, 나리 곁에 오래도록 함께 있을 수 있기에.
***
하나 세상엔 감출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나리. 나리이!”
첫째는 기침이요, 둘째는 가난.
그리고 셋째는 바로…….
“나리, 같이 가요!”
결을 향한 단이의 마음이렷다.
철저히 연심을 숨기겠다고 다짐한 지 채 한 시각이 지나질 않았건만.
단이는 애정 어린 눈빛을 뚝뚝 흘리며 결의 주위를 맴돌았다.
“잠시 대장간에 다녀오는 것이래도.”
“저도 함께 가고 싶어요. 데려가 주시어요.”
퇴청까진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까치발을 들며 소다옥 밖을 기웃거리던 단이였다.
이렇게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더 결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림자만이라도 보길 오매불망 바라던 그녀 앞에 정말로 결이 나타났던 것이다.
어딜 가려는 모양인지 발걸음 향하는 방향이 훈련원 대문이라.
행여 놓칠세라, 단이는 얼른 결의 뒤를 따라갔더랬다.
“나리 옆에 얌전히 있을 것이어요.”
마음을 숨기기는 개뿔.
연심의 노예가 된 단이는 그저 헤벌쭉 웃으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정직하게 움직였다.
세상 모든 빛이 결에게서 나오는가.
아니면 그 모든 빛이 단이의 눈에 담겼는가.
결을 향한 두 눈동자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하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맡은 일에 늘 최선을 다하는 단이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단이의 차이점을 찾기란 결에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눈치 빠른 사람이야 눈빛만 보아도 척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결은 남녀 간의 일이라곤 단이만큼 모르는 사내라.
‘……많이 심심했던 모양이군.’결은 반짝거리는 단이의 눈을 보며 그리 생각하였다.
차를 우릴 때를 제외하곤 종일 소다옥에서 혼자 지내니 좀이 쑤실 만도 하겠지.
오죽하면 덥고 시끄럽고 재미도 없는 대장간까지 따라가려 할까.
이런 아이를 두고 혼자 가는 것도 안 될 짓인 것 같았다.
결국 결은 단이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잘 따라오거라. 한눈팔지 말고.”
“예, 나리!”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저리도 좋은가.
고작 훈련원 근처로 가는 것인데도 마치 꽃놀이를 가는 양 단이의 발이 가볍다.
보는 사람까지 미소가 돌 만큼 말간 웃음이라.
‘한 번씩 데리고 나와야겠군.’결은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흑마를 몰았다.
“그럼 말씀 주신 기한까지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게.”
대장간에서의 볼일은 빠르게 끝이 났다.
그때까지 대장간 안을 이리저리 구경하던 단이는 결이 대화를 끝내기 무섭게 냉큼 그의 곁으로 왔다.
“나리, 이제 훈련원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요?”
“그래.”
꼭 온 신경이 결에게 집중된 것처럼.
세상의 중심이 결인 것처럼.
“철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불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걸 깡깡 쳐대니까 그대로 모양이 달라지는 것 있지요? 저는 너무 뜨거워서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겠던데, 대장장이 아저씨들은 어찌 그리 잘 다루시는지 신기하여요.”
평소보다 말수도 많아진 것이, 밖으로 나온 게 그리도 좋은가 보다.
당장엔 급한 일도 없는 터라.
결은 곧장 훈련원으로 향하는 대신 조금 빙 둘러 가기로 하였다.
때마침 연희패가 한바탕 놀이판을 벌였는지 길목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우와, 나리. 저것 보시어요! 사람이 긴 막대 위에 올라가 있어요!”
단이가 잔뜩 커다래진 눈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얼굴을 보니 호기심이 가득한 터라.
잠시 근처에 말을 매어둔 결은 단이를 데리고 놀이판이 벌어진 곳으로 다가갔다.
어깨춤이 절로 나는 흥겨운 풍악과 입이 쩍 벌어지는 온갖 신기한 재주에 여기저기서 웃음과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 연희패를 처음 보는 단이도 연신 감탄을 흘리며 공연에 빠져들었다.
꽹과리에 맞춰 손뼉을 치는가 하면 깡마른 사내가 재주를 넘을 때마다 흠칫 흠칫 어깨를 떨기도 하였다.
입에서 불을 뿜는 사내가 다가왔을 땐 놀라서 재빨리 결의 등 뒤에 숨기도 하였다.
결의 옷깃을 잡고 어깨를 움츠리던 단이가 빼꼼 고개를 빼었다.
“헤헤.”
그러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결과 눈이 마주치곤 멋쩍은 듯 배시시 웃었다.
그 순진한 웃음이 마치 찻잎처럼 결의 눈동자에 담겨 짙게 번져나갔다.
조금 전만 해도 저런 시시한 것을 왜 보고 있어야 하나 싶었는데.
단이의 해맑은 웃음을 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고작, 이 웃음 한 자락 보려고.
이 웃음이 너무도 어여뻐서.
평생을 간직하고 싶을 만큼.
결은 정벌을 가기 전까지 이 웃음을 많이 봐두고 싶었다.
전장에 나갈 때마다 늘 죽음을 각오하고 나가는 그이기에.
생애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 한다면 단연코 지금 이 순간을 택할 것 같았다.
봄 햇살보다 더 따사로운 단이의 미소를 보는, 바로 이 지금.
보고 있으니 자연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 좋으냐.”
“예, 나리. 나리와 함께 구경하니 참으로 좋습니다.”
뭇 여인들은 좋아도 숨기고, 좋지 않아도 숨긴다 하거늘.
단이는 좋지 않은 것은 표정으로 은근히 드러내고, 좋은 것은 온몸으로 표현하였다.
어린아이보다 더 솔직한 그녀는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재주가 있었다.
마치 그녀처럼 솔직하게 행동하고 싶게 만드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도, 신분도,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도록.
“엿 사시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아주 달콤한 엿이오!”
놀이판에 군것질거리가 빠지면 섭섭하기 마련.
어김없이 등장한 엿장수가 투박한 엿가위를 짤랑짤랑 흔들어대며 이목을 끌었다.
그 맛깔스러운 가락에 단이의 군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마에 ‘맛있겠다’란 글자가 보일 정도라.
속으로 미소를 지은 결은 고민 않고 엿장수에게 다가갔다.
값을 지불하는 사이, 옆에서 단이가 잔뜩 기대하는 눈으로 결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아기 새처럼 입을 ‘아’ 벌릴 것 같은 얼굴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자.”
결은 엿장수에게 산 엿가락을 단이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나리!”
헤실거리며 엿을 받아든 단이가 곧장 그것을 입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런데 순간 멈칫한 그녀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엿가락을 반으로 똑 잘라내는 게 아닌가.
가뜩이나 크지 않은 엿가락이 더 작아졌건만.
“여기요! 나리도 드시어요.”
단이는 아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중 하나를 결에게 내밀었다.
꼴깍꼴깍 침을 삼키면서도 결에게 먼저 맛 보이겠다는 생각이 두 눈 가득했다.
그것이 기특하고, 어여쁘고, 또 고마운지라.
“단 거 안 좋아한다.”
단이 입에 하나라도 더 넣어주고 싶어 결은 부러 그리 말하였다.
그럼에도 단이가 머뭇거리니, 결은 조각난 엿을 집어 하나를 그녀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붉고 말랑한 입술 위를 그의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입안에 진득하게 퍼지는 달콤한 맛에 단이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졌다.
“맛있습니다, 나리. 엄청 달아요!”
보름달처럼 커다래졌다가 초승달처럼 곱게 휘는 눈매, 그리고 찹쌀떡 같은 볼에 움푹 팬 보조개가 만족감을 대변하였다.
불룩 튀어나온 볼과 오므린 입술이 먹음직스러울 만큼 탐스러웠다.
한입 베어 물고 싶을 만큼.
그 탐스러운 얼굴을 마음속 깊이 아로새긴 결은 그녀의 입가에 묻은 하얀 가루를 손끝으로 밀어 지워주었다.
종일 이 미소만 보고 있어도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훈련원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이만 가자.”
“네, 나리!”
오물거리는 단이의 입술에서 애써 눈길을 거둔 결이 먼저 발길을 돌렸다.
뒤쫓아 오는 발소리가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에겐 어느 때보다 소중했던 휴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