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뒤덮은 새벽.
맹렬히 타오르는 수많은 횃불이 별 대신 밤하늘을 밝혔다.
수천의 군대가 자로 잰 듯 정렬하여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근정전에선 정벌군을 위한 제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선 앞에 두 명의 사내가 나란히 서서 어명을 받았다.
“이에 어모장군 서결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보내어 조선의 국경을 수호하고…….”
한 명은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받은 서결.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또한 병조 좌랑 한성조를 도진무로 임명하여 어모장군 서결을 보필케 하니,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여진족 정벌에 온 힘을 쏟길 바라는 바다.”
바로 병조 좌랑, 한성조였다.
성조가 결보다 더 낮은 관직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에 초반부터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다.
대개 좌의정 한정회의 눈치를 살핀 이들이었다.
하지만 품계로 보아도 결이 성조보다 높은 데다 이선의 뜻이 무엇보다 큰 터라.
결국 결에게 더 높은 직책이 가게 되었다.
그것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은 오로지 본인들만 아는 일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결과 성조는 동시에 이선에게 절을 올리곤 몸을 돌렸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문무백관의 눈길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각각을 향한 차이가 극명한 시선들이었으나, 누구 하나 그것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적은 오로지 오랑캐뿐이어야만 했으니까.
앞을 향해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인 성조가 결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하였다.
“난 자네와 함께 갈 수 있어 영광이네.”
“…….”
“진심일세.”
힐긋 옆을 보니 성조가 편안한 미소로 그를 보고 있었다.
늙은이들이 어찌 보든 신경 쓰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누구보다 그 시선들을 신경 쓰는 주제에.
“잘 부탁한다.”
결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마주 응대하였다.
그래야 이 마음 여린 벗이 죄책감을 덜 거라는 것을 알기에.
숙였던 허리를 들자 여전히 싸늘한 대신들의 눈초리가 날아들었다.
죽음의 땅으로 한시라도 빨리 내몰고 싶은 눈빛들.
그러나 전과 달리 마냥 숨 막히지만은 않았다.
아무래도 성조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도 큰 힘이 되는 모양이다.
결과 성조는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한양에서 출발하는 군사의 수는 정확히 삼천.
남은 칠천은 후에 평안과 함경에서 강계부로 집결할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성조의 지략은 장수인 결도 본받고 싶을 만큼 으뜸이었다.
성조의 지략과 총 1만의 군사, 거기에 본장이 서결이니.
이변만 없다면 이번 정벌은 큰 어려움 없이 무사히 끝낼 수 있으리라.
결은 성조와 함께 군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성벽 밖으로 향하였다.
곧이어 밤하늘을 밝히는 횃불과 장엄하게 휘날리는 깃발이 멀리서부터 보였다.
하지만 이 살벌하고도 엄중한 분위기 가운데, 가장 이질적인 이가 하나 있었으니.
“오시었어요, 나리.”
진위와 함께 결을 기다리던 단이가 그를 보며 맑게 웃었다.
훈련할 때나 입던 바지 차림에 위로 쫑 틀어 묶은 머리.
등에는 보따리장수나 들 법한 커다란 봇짐을 멘 그녀는 누가 보아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상 결이 아니었다면 정벌군에 낄 일조차 없었으리라.
하여 결에게는 이번 정벌에서 반드시 이뤄야 할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
첫째는 두 번 다시 조선 국토를 넘보지 못하게끔 여진족을 확실히 토벌하는 것.
둘째는 한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단이를 무사히 지키는 것.
지난 며칠간 그녀에게 기본적인 무예를 가르쳤다곤 하나 전장은 실전이었다.
까딱 방심하였다간 그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해하는 족속들을 상대하기에 단이는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으니.
고작 체력 조금 단련하고 단도 몇 번 휘두르는 걸로는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자신으로 인하여 가게 된 길인 만큼, 그녀의 안전은 전적으로 그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결은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단이를 보며 어느 때보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천을 두르지 않아 훤히 드러난 목의 흉터가 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결은 단이의 작은 어깨에서 봇짐을 가져가 군수품을 쌓은 수레에 놓으며 말했다.
“한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너는 내가 전장에 나갈 때를 제외하곤 항시 내 곁에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예, 나리. 명심하겠습니다.”
내 몸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아이를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오리라.
결은 속으로 굳게 다짐하였다.
“너무 걱정 말게나. 나도 있으니.”
성조가 결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단이의 안전을 함께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 번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성조라.
새삼 느껴지는 벗의 든든함에 결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이만 출발하지.”
“그럴까.”
고개를 끄덕인 성조가 먼저 말에 올라탔다.
결도 단이를 가볍게 안아들어 흑마에 태우고 그 뒤에 올라탔다.
잠시나마 느슨해졌던 공기가 일순 팽팽해졌다.
단이의 손과 함께 고삐를 단단히 잡은 결이 결연한 눈으로 앞을 보았다.
“전군, 행군한다.”
“행군!”
진위의 후창에 나팔소리가 웅장하게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이랴!”
결이 박차를 가하자 흑마도 위풍당당한 기세를 떨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뒤따르는 보병들의 발소리 역시 둥둥 땅을 울려댔다.
드디어, 정벌군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
그 시각.
정회는 멀어지는 군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뒷짐을 진 모습은 언뜻 여유로워 보였지만 두 눈동자는 근심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고심 끝에 허락한 출전이었다.
마음 같아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성조를 말리고 싶었으나, 그는 끝내 아들을 막지 못하였다.
이번 정벌의 시작이 준백의 입에서 나온 만큼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건만.
아들은 기어이 결을 따라 저 험난한 길에 오르고야 말았다.
제 손으로 아들을 사지에 보낸 것만 같아 가슴이 철근을 달아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부디, 마수가 너에게까지 닿지 않아야 할 텐데…….’착잡한 생각에 묵직한 한숨을 내쉬던 그때.
“좌상 대감.”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정회는 표정을 갈무리하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준백이 묘한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어찌 이리 혼자 계십니까. 파루가 치기 전에 차나 한잔하자며 다들 모여 계시거늘.”
“……자식 놈 뒷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을까 하여 있었습니다.”
정회는 굳이 숨기지 않고 걱정을 드러내었다.
행여 뒷일을 꾸몄거든 아들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란 뜻을 은근히 내비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백은 그저 가면 같은 미소만 지으며 멀어지는 결의 군대를 응시하였다.
말아 올린 입꼬리가 묘하게 께름칙한 얼굴이었다.
“참으로 든든하지 않습니까. 갑옷을 입은 북귀를 보니, 새삼 풍기는 기백만으로도 장수는 장수이다 싶더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 결을 칭찬하는가.
준백이 이리 나오니 괜스레 더 마음이 심란한 정회였다.
하여 정회는 동조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모른 척 한발 물러섰다.
“이번 정벌의 결과가 그의 진가를 알려주겠지요. 여연에서의 과장된 소문일지, 추앙받을 명장일지.”
“저도 그게 참으로 궁금합니다.”
정회의 눈동자가 조용히 준백에게로 향했다.
그는 어쩐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마치 덫을 설치해 놓고 어떤 짐승이 걸릴지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준백이 독사 같은 얼굴로 정회를 마주 보았다.
“저 군대가 얼마나 되돌아올지도 말입니다.”
폭이 얇은 그의 입술이 더욱 긴 호선을 그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웃음이었다.
“모쪼록, 대감의 아드님께선 무사히 돌아오시길 비는 바입니다.”
안 좋은 예감이 예리하게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언가 잘못되었단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
행군은 몇 날 며칠 계속되었다.
거대한 행렬은 발이 닿기 전부터 길을 만들고 이목을 끌었다.
마을을 지날 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구경을 하거나 그들을 향해 환호를 보냈고, 또 음식이나 필요한 물품 등을 보태주기도 하였다.
각각으로 보면 작은 손길이었지만, 그것들이 모여 군사들의 사기를 든든히 채워주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밤이 되면 진을 치고 그곳에서 동이 틀 때까지 쉬었다 갔다.
“나리, 차를 올리겠습니다.”
단이는 집에서와 달리 하루에 두 번씩만 결에게 차를 올렸다.
물과 시간을 마음껏 쓸 수 없는 까닭이었다.
횟수가 줄어든 만큼 단이는 더욱 정성을 들여 차를 우려내었다.
그 정성을 알아서인지, 결은 매번 단이가 올린 차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마셨다.
또한 고된 행군으로 인해 그녀가 힘들어하진 않을지 세심히 살폈다.
“밤사이 장작이 일찍 꺼진 것 같던데. 괜찮았느냐.”
“예, 나리. 봄이 완연하여서 그런지 새벽에도 춥지 않았어요.”
“또 불이 꺼지거든 그땐 내 막사에서 불을 가져가거라. 아직은 밤이 차다.”
“예, 그러겠습니다. 걱정 마시어요, 나리.”
처음 그녀를 만나 한양으로 데리고 올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그녀를 향한 마음에 변화가 생긴 탓이었다.
제 목숨만큼, 아니. 제 목숨보다 먼저 그녀를 지키겠다는.
“추우면 내 불씨 가져가라, 다동. 난 이제 더울 지경이니.”
막사 안으로 들어온 성조가 자연스럽게 그들 가운데 착석하였다.
당연하다는 듯 잔을 내미는 성조를 보며 단이는 이제 자연스럽게 그의 잔도 채워주었다.
정량대로 차를 우리면 늘 한두 잔가량의 차가 남는 터라.
버릴 거면 자신의 입에 버리라는 성조의 끈질긴 청에 결국 남은 차는 그의 몫이 되었다.
“고소한 향이 참으로 그윽한 것이, 오늘 차는 꼭 청천백석차 같구나.”
그나마 한 가지 좋은 점은 그는 늘 차에 대한 감상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차는 향이 어떻게 좋고, 또 이 차는 맛이 어떻게 깔끔하고를 늘 세세하게 말해주는 성조라.
분명 그가 마시던 고급차에 비하면 맛과 향이 현저히 떨어질 텐데도 그는 언제나 칭찬만을 해주었다.
단이가 우린 차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듯이.
지천에 흔한 일창 오기의 잎이라 하더라도 잘만 우리면 이름난 명차에 못지않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
한동안 차를 음미하던 성조가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말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들을 은아암으로 부른다고 해놓고 또 유야무야 넘어가 버렸군.”
은아암이란 말에 단이의 두 눈동자가 금세 초롱초롱해졌다.
그러잖아도 일전에 성조에게서 은아암에 대해 듣고선 그곳에 갈 날을 은근히 기다려온 터라.
그 눈빛을 읽은 성조가 싱긋 입가를 늘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가면 거하게 다연(多宴)을 즐기는 게 어떻겠나? 결 자네라면 분명 이번 정벌을 무사히 성공으로 이끌 테니, 우리끼리 자축할 겸 말일세.”
“이제 첫발을 떼었는데, 벌써 승패를 논하기엔 이르다.”
“에이, 이 친구 또 갑갑하게 굴기는. 본디 큰일을 행할 땐 그에 따른 보상을 생각해야 더 효율이 좋다고 하였네. 금은보화니 뭐니 하는 상은 전하께서 후하게 내려주실 테니, 우린 우리만의 보상을 정해 놓잔 말일세.”
성조는 연회에 들어가는 비용은 자신이 모두 감당하겠다며 결을 부추겼다.
그럼에도 결의 반응이 미적지근하니, 이번엔 공략하기 쉬운 단이를 건드렸다.
“다동, 네 의견은 어떠하냐? 나의 은아암에 한번 놀러 오고 싶지 않으냐?”
귀한 차들이 가득한 데다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차밭이란 설명에서 이미 단이는 홀라당 넘어간 지 오래였다.
꼬드길 필요도 없이 이미 마음이 기울었다는 뜻이었다.
하나 단이는 애써 본심을 숨기며 결의 눈치를 살폈다.
“저는 서결 나리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든 따라갑니다.”
“이것 보게. 자네 다동은 이리 가고 싶어 몸이 달았지 않은가!”
“그 정도는 아니어요.”
“그 정도였는데, 딱.”
두 사람의 아옹다옹하는 소리가 장작 타는 소리에 맞춰 타닥타닥 이어졌다.
매 순간 긴장해야 할 정벌 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간이건만.
결은 어쩐지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 돌아가면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지.”
“생각만 하지 말고 진짜로 오게. 내 다 준비해 놓을 테니. 자, 다연을 약속하는 의미로 잔 한번 부딪치세. 다동, 너도 하나 들고.”
“이건 차부잖습니까. 그리고 누가 찻잔을 부딪친답니까?”
“내가 한다, 요 녀석아. 여분 잔이 없으니 지금은 이게 네 잔이다. 자자, 어서.”
단이의 손에 다 식은 차부를 쥐여 준 성조가 잔을 들었다.
단이와 결은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면서도 그에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우리의 무사 귀환과 다연을 위하여! 짠!”
두 개의 찻잔과 하나의 차부가 허공에서 맑은 소리를 내었다.
다른 두 찻잔에 비해 투박한 차부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스운지라.
결국 단이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간 웃음에 결도 입꼬리를 올렸고, 성조는 더욱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순간만큼은 전쟁의 무게도 잊은 채, 세 사람은 잠시나마 함께 편안한 웃음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