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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37화 (37/100)

37화

저녁놀이 어둠에 자리를 내어주고, 수많은 별이 촘촘히 하늘을 메울 무렵.

결의 군대는 장정 끝에 무사히 강계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장 경계선 근처까지 올라간 그들은 압록 바로 근처에 진을 쳤다.

함경과 평안 등지에서 남은 군사들이 집결할 때까지 주둔할 예정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얼마 전까지 며칠 내리 비가 내렸단 걸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맑았다.

비가 온 만큼 강이 혼탁해졌을 테니, 압록을 건너야 하는 결에겐 참으로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쟁을 하루 앞둔 밤.

수백 채의 막사가 세워진 가운데, 한 조그만 막사에서 단이가 나왔다.

새벽에 결을 배웅하려면 지금 잠을 청해도 늦은 시각이건만.

가만히 누워 있자니 온갖 걱정이 가슴을 짓눌러 잠이 오지 않았다.

바람이라도 쐬면 조금 나아질까 싶어 단이는 밤공기를 억지로 폐부에 집어넣었다.

주위를 보니 끝도 없이 세워진 크고 작은 가죽 막사들 위로 붉은 깃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별이 반짝이는 하늘 아래 펄럭이는 깃발들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기분이 묘해졌다.

저 멀리 압록강 너머엔 심 다점이 있었던 치원도 있을 터.

지금은 얼어붙었던 눈들이 다 녹아 황량한 벌판이 되었으리라.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왔는데, 지금은 꼭 낯선 땅을 보는 것처럼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한양이 고향인 것처럼.

‘그래 봤자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적응이란 게 이리도 무서운 건가 보다.

잠시 흘러가는 대로 생각하던 단이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잊고 있던 걱정이 다시금 밀려든 까닭이었다.

행군을 할 때만 해도 사실 별생각이 없었건만.

막상 압록 유역에 도착하고 나니 새삼 전쟁을 앞두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난 것이었다.

가장 걱정이 되는 건 역시 결의 안전이었다.

그의 무예 실력이 출중하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전쟁터가 덜 위험해지는 건 아닐 테니.

사방에서 날아오는 적의 공격에 행여 다치진 않을까 몹시 걱정이 되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그랬다간 더 큰일이 나겠지만…….’그만큼 결이 안전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단이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뜬 둥근 달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휘영청 밝은 달이라면 제 소원 하나쯤은 들어줄 것 같았다.

‘달님, 부디 나리께서 무사히 정벌을 마치실 수 있게 해주시어요.’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모은 단이가 진심을 다해 기도하였다.

결에게 아무 일도 없게 해달라고.

함께 무사히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천천히 눈꺼풀을 올리니 달님이 전보다 더 환하게 달무리를 뻗치고 있었다.

마치 기도를 들어주겠다는 달님의 약속인 것만 같아 단이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달만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목소리 하나가 그녀의 귓가에 감겼다.

“왜 나와 있는 것이냐.”

“나리.”

바로 옆에 위치한 막사에서 나온 결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갑옷을 벗은 그의 몸은 여전히 거대하여, 그림자만으로 단이에게 또 다른 어둠을 드리웠다.

막막하기만 한 어둠이 아닌 안락을 주는 어둠이었다.

“잠이 안 와서 잠시 하늘을 보고 있었습니다.”

“혹 어디가 불편한 것이냐.”

“아니어요. 그냥 전쟁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싱숭생숭하여서…….”

단이는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싸우러 나가지도 않는 사람이 장수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다니.

그가 속으로 우습게 여길 것 같아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결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지 오히려 단이를 위로하였다.

“이곳까진 여진족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가더라도 군사 몇이 이곳에 남아 군영을 지킬 것이고.”

그 말에 단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걸 걱정하는 것이 아니어요.”

“그럼 무엇이 두렵단 말이냐.”

우물쭈물하던 단이가 흐려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나리께서 장군이신 것이 두렵습니다.”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결이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자신이 장군인 게 두렵다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가 무섭다고 말하려는 걸까.

하지만 이어진 단이의 말은 뜻밖이었다.

“제가 알지 못할 곳에서, 제가 가지 못할 곳에서…… 나리께서 다치시게 될까 두렵습니다.”

결의 눈빛이 옅게 흔들렸다.

그 일렁이는 눈동자 속에 단이의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내일,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곳에 안전하게 있을 동안 나리께서는 제가 상상도 하지 못할 위험 속에서 싸우고 계시겠지요.”

“…….”

“그걸 알면서도,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는 게 두렵고 또 무섭습니다.”

조용한 말씨로 흘러드는 단어들이 모두 진심이어서.

“나리께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게…… 너무도 무섭습니다.”

그 진심들이 그의 가슴을 거세게 두드려서.

“그건, 제가 죽는 것보다 더 무서워요.”

만약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서럽고 속상한 걸까.

그녀의 눈시울은 어느새 옅게 붉어져 있었다.

“나리께서 다치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늘 죽음을 각오하며 전쟁터를 전전하던 그였다.

부상은 일상이었고 동료의 죽음은 숙명이었다.

저주에 걸려 온전치 않은 몸으로 적진을 종횡무진하다 보면, 이깟 목숨 하나 부지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것이 당연한 삶이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오히려 죽음을 향해 매일 뛰어드는.

버려진 황무지 같은 그런 삶.

“무사히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삶을 위해, 기도해주는 아이가 나타났다.

진창을 구르는 나에게 한없이 여리고도 어여쁜 손을 건네주는 아이가.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달님께 비는 것뿐이라……. 하여 이리 나와 있었습니다.”

“…….”

“부디 나리를 무사히 지켜달라고요.”

나의 부상이 본인의 죽음보다 더 무섭다 하는 이 아이를.

나의 안위를 위하여 밤잠을 마다하고 기도한다는 이 아이를.

삶과 목숨을 온전히 나에게 맡기는 이 아이를.

어찌, 마음에 품지 않을 수 있을까.

“……나리?”

단이의 눈동자가 일시에 커다래졌다.

결이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은 것이다.

그는 단이의 작은 몸을 틈 없이 감싸 안았다.

“나리…….”

“잠시만.”

“…….”

“잠시만 이리 있어다오.”

단이의 미약한 움직임이 결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잠겨 들었다.

그녀를 향한 연민인가.

스스로를 향한 연민인가.

뜻을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이 단이의 마음까지 젖게 만들었다.

가슴이 미어질 만큼.

쿵, 쿵, 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이 단이의 가슴을 울렸다.

울림이 거세어질수록 그녀를 안은 팔에도 더욱 힘이 들어갔다.

가죽 막사가 사라지고, 검은 밤하늘이 사라지고, 소원을 빌던 달님도 사라졌다.

그와 함께 파도처럼 밀려들던 걱정도 사라졌다.

떨치려 해도 쉬이 잊을 수 없던 걱정들이었건만.

휘영청 밝은 달님이 소원으로 가져가주셨는가.

태산과도 같은 나리의 몸이 든든함으로 덮어주셨는가.

마음은 언제 불안했냐는 듯 편안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하여 단이에겐 오로지 결 하나만 남게 되었다.

이 순간 단이에겐 결이 달님이고, 하늘이고, 세상이었다.

“…….”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팔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옷깃을 간지럽게 만지작거리던 손끝이 이내 결의 등을 마주 안았다.

토닥, 토닥.

여린 손길이 부드럽게 그의 등을 다독였다.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당신은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듯.

그 작은 울림이 결의 가슴속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약조하마.”

그 파동을 느끼며 결이 나지막이 말하였다.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

“네가 기다리고 있는 이곳으로.”

귓가로 흘러들어온 그 목소리가 단이의 가슴속에도 짙은 향을 풍기며 스며들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자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이, 꼭 그녀가 안식처라는 말처럼 들려서.

그녀가 그의 지표가 된 것 같아서.

“네.”

단이는 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리만 믿을 것이어요.”

겨울을 닮은 나리의 품은 그 안에 봄 햇살을 숨겨놓은 것처럼 따스하였다.

***

둥, 둥, 둥, 둥.

샛별이 가장 밝게 빛나는 시각.

북을 두드리는 세찬 고동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온 땅을 뒤덮을 것 같은 일만의 군사들이 용맹한 기상을 떨치며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두려운 기색이란 보이지 않았다.

“전군, 주목!”

진위의 호령과 함께 그들의 앞으로 드디어 본장, 서결이 흑마를 타고 나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그가 정렬한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일만의 군사들을 모두 압도할 만한 위압감이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그의 양옆으로 진위와 성조까지 서니, 마치 도원의 세 장수가 살아 돌아온 듯 장엄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모두들 듣거라!”

천하를 호령할 듯한 결의 목소리가 군사들을 뒤덮었다.

“나는 지난 십수 년 동안 이곳 북방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왔다. 비로소 이 땅이 안정되었다 생각하여 한양으로 돌아갔으나, 무도하고 잔악한 오랑캐 무리들이 다시 우리 땅을 침탈하고 백성들을 괴롭혀 병들게 하고 있다. 하여 나는 다시 한번 이 땅을 수호코자 싸우려 한다.”

밤하늘을 담은 듯한 검은 눈동자가 불처럼 뜨거웠다.

창검을 든 군사들의 눈빛 역시 본장을 따라 맹렬히 타올랐다.

“오늘로써 이 땅에 만군의 피를 뿌리고자 하니, 그대들은 목숨을 아끼지 말고 적진을 향해 나아가라!”

“와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하늘까지 닿을 듯 터져 나왔다.

발을 구르자 땅이 울렸고, 공기마저 그들의 기백에 팽창하여 지천을 뒤흔들었다.

담대하고 정한한 일만의 군대가 있는데 무엇이 두려우리오.

결은 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그때, 아득히 먼 시선 끝에 단이가 보였다.

그녀는 진영을 지킬 수십의 군사와 함께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이의 얼굴은 근심과 염려로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

결국 밤사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하였다.

결은 품속에서 가죽으로 된 부대를 꺼내었다.

그 안엔 단이가 우린 차가 가득 담겨 있었다.

부대 주머니를 연 결은 그 안에 든 차를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반 정도 차를 비운 결이 흑마를 몰아 단이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차가 남은 부대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남은 건 다녀와서 마시도록 하지.”

무사히 돌아오겠단 약속이었다.

가죽 부대를 두 손으로 꼭 감싸 쥔 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더 결을 담고 싶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서.

“조심히 다녀오시어요, 나리. 기다리고 있을게요.”

결은 그런 단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다시 말에 올라 군사들 앞에 섰다.

그녀를 두고 떠나는 것이 쉽진 않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늦출 수 없다면, 서둘러 끝내고 돌아오는 쪽을 택하리라.

결은 단이에게로 향하려는 눈길을 애써 앞으로 묶어두며 큰소리로 외쳤다.

“전군, 출진하라!”

그의 명령에 소라 나각이 거대한 소리를 하늘 높이 뿜어댔다.

세 번 연속으로 이어진 고동에 기병은 말에 올랐고 보병들은 무기를 단단히 쥐었다.

“이랴!”

결 역시 말에 박차를 가하여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거대한 군사 행렬이 적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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