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하루가 원래 이토록 길었던가.
체감상 이제 저녁이 다가올 것만 같은데, 조금 전 샛별이 사라진 하늘엔 이제 겨우 동이 터오고 있었다.
밤사이 잠을 설친 데다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 몸이 쉽게 지쳤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편히 쉬며 기다릴 수도 없는 터라.
단이는 따가운 눈을 비비며 저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불안에 떠는 것보다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더 나았다.
그녀의 앞엔 맑은 물을 떠 놓은 작은 사기그릇이 놓여 있었다.
큰 대목을 앞두고 있을 적마다 왕 노인이 이렇게 물그릇을 두고 짧게 기도를 드리는 걸 본 적이 있는 터라.
기억을 되짚어 물그릇을 뜨고, 어제의 달님 대신 해님에게 간절히 비는 중이었다.
부디 나리께서 무사히 돌아오시게 해달라고.
물그릇 옆에 놓아둔 결의 가죽 부대는 그녀의 불안을 잠재우는 부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밥이라도 먹고 해.”
배식을 하러 온 군사가 그녀 앞에 보리쌀 뭉친 것을 놓아주었다.
일전에 여연에서 체탐자로 있던 군사라 단이의 눈에도 낯익은 사내였다.
주위를 보니 다른 군사들도 모두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는데도 오히려 속이 더부룩하였다.
단이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의 뜻을 보였다.
“감사하지만, 저는 나중에 나리께서 돌아오시면 먹을게요.”
“장군께선 언제 돌아오실지 모른다. 싸움이 길어진다면 며칠이 걸릴 수도 있어.”
“그래도, 지금은 못 먹겠어요.”
결은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 있는데, 어찌 편히 밥을 먹는단 말인가.
그가 돌아올 때까진 쌀 한 톨도 제대로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장군께서 네게 제때 밥을 먹이지 않으면, 제일 먼저 나를 벌할 것이라 하셨다.”
“나리께서요……?”
“그래.”
생각지 못한 군사의 말에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떨렸다.
군사는 단이를 억지로 일으켜 편히 앉도록 하였다.
지친 몸은 쉽게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이곳은 첫째도 기력이고, 둘째도 기력이고, 셋째도 기력인 곳이다. 괜한 고집으로 힘 빼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짐만 돼.”
곧 그녀의 앞에 주먹밥이 담긴 그릇이 가까이 놓였다.
“그러니 뭘 하든 일단 든든히 먹고 나서 해라. 나를 일부러 골로 보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군사가 무뚝뚝한 어투로 나름 농이랍시고 말하였다.
불안해하는 단이를 조금이나마 편하게 만들어주려는 생각이었다.
거친 사내들만 득실한 전쟁터에서 툭 치면 날아갈 것 같은 그녀가 밥도 안 먹고 홀로 이러고 있으니,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던 것이었다.
그는 어색한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치곤 저만치 멀어졌다.
단이는 군사와 보리 주먹밥을 번갈아 보다 이내 결심한 듯 주먹밥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기력이 떨어지면 괜히 폐만 끼칠 것 같았다.
결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 그전까지는 기력을 잘 관리하여 버텨야 했다.
‘나리께 걱정 끼칠 만한 일은 만들면 안 되니까.’내가 무사히 있는 것이 곧 나리를 돕는 일이라.
단이는 억지로라도 주먹밥을 꼭꼭 씹어 삼키며 흐트러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
지독한 죽음의 냄새가 사방을 둘러쌌다.
도처에서 비명인지 기합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어지럽게 난무하였다.
눈앞의 적을 해치우고 나면 또 다른 적들이 두 배 세 배로 밀려들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힘겨운 상황 속에서, 조선의 군사들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활을 쏘아댔다.
그 아비규환의 한가운데.
결은 흑마 위에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빠르게 여진족 군사들을 무찔러 나갔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적들은 남김없이 쓰러졌고 메마른 땅은 붉은빛으로 젖어 들었다.
온 얼굴은 피로 범벅이고 형형하게 번뜩이는 두 눈은 살기로 가득 차 있으니, 저것이 야차가 아니고 또 무엇일까.
가뜩이나 서결이 왔다는 소식에 초전부터 공황에 빠졌던 여진족이라.
북방 귀신을 눈앞에 둔 그들은 점점 길어지는 싸움에 지옥문을 앞둔 것처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본장의 위풍당당한 진격에 군사들 역시 더욱 사기를 드높이며 결의 뒤를 따랐다.
전장에서의 불안은 곧 패배의 지름길이니.
처음엔 엎치락뒤치락하며 아슬아슬하던 전세도 점점 역전이 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군사들은 기세를 몰아 더욱 불같이 적군을 밀어붙였다.
촤악!
“윽……!”
적운검의 날 끝에 또 한 명의 장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일개 졸병들은 물론이고 부대를 이끄는 장수들마저 결의 앞에선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벌써 반나절이 넘도록 이어진 싸움이건만.
결은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검을 휘둘렀다.
무거운 철갑옷을 온몸에 두르고도 그는 번개와 같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싸움을 끝낼 것.
그리하여 무사히 단이의 곁으로 돌아갈 것.
그 아이가 불안에 떨지 않도록.
함부로 약조란 말을 내걸지 않는 그의 입에서 나온 약조였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단이에게 한 약조이므로.
성조 역시 결 못지않게 적들을 무찌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실력으로는 당장 부장을 달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
처음 보는 장수의 맹렬한 공격에 여진족 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결과 대등하다 싶을 만큼 적들을 소탕하던 그때.
“이야아악!”
여진족의 장수 하나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끝을 예감했는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공격을 피하기엔 너무도 짧은 거리였다.
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든 일촉즉발의 순간.
“크윽……!”
성조는 가까스로 검을 들어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생애 첫 전투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잔뼈 굵은 장수를 쉽게 감당하지 못했다.
맞부딪친 살벌한 검이 점점 성조의 목으로 향하던 그때.
“윽!”
검날이 채 성조에게 닿기도 전에 적장이 튕기듯 말에서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 꽂혀 있는 두 발의 화살.
옆을 보니 결이 이쪽을 향해 활을 들고 있었다.
그가 한 번에 쏜 두 개의 화살이 적군에 명중한 것이었다.
앞에 있는 적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전장에서, 결은 성조를 비롯한 아군들을 도울 여유까지 있었다.
“조심해라.”
결은 짧게 걱정을 비추곤 다시 적진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을까.
마침내 패배를 깨달은 여진족 군사들이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라! 전군, 후퇴하라!”
후퇴령에 여진족 군대가 썰물 빠지듯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파저강 유역까지는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 예정보다 더 이른 후퇴였다.
그러나 그들을 쉽게 보내줄 결이 아니었다.
“놓치지 말고 따라가라! 마지막 한 놈까지 전부 쳐라!”
결의 명령에 군사들이 여진족 군대의 뒤를 바짝 쫓았다.
득달같이 따라붙는 공격에 그들은 도망을 치면서도 큰 손해를 입었다.
“와아아아!”
마침내 승기를 잡은 조선의 군사들이 천지가 흔들리도록 환호성을 내질렀다.
첫 전투부터 만족스러운 대승이었다.
“고생했네.”
다가온 성조가 적운검에 자신의 검을 살짝 맞대었다.
난생처음 겪은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약간의 찰과상을 제외하곤 무사한 상태였다.
그가 쓰러트린 적군의 수 또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오늘 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은 성조의 뛰어난 계책 덕분이었다.
결은 공을 치하하는 뜻으로 성조의 손목을 잡아 높이 들어 올렸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또 한 번 두 사람에게로 쏟아졌다.
평소라면 능글맞게 너스레를 피웠을 성조의 표정이 어쩐지 조금 어두워 보였지만.
다들 승리에 취해 아무도 그 어둠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여진족이 완전히 항복하고 더 이상 조선 국경을 침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기 전까진 끝까지 싸워야 했다.
결은 점령한 지역에 새 진영 설치를 명하였다.
이렇게 조금씩 경계를 넓혀서 여진족을 이 일대에서 완전히 몰아낼 생각이었다.
한창 새 진영을 꾸리고 있던 그때, 진위가 다가와 말했다.
“장군, 압록 이남에 남은 군사들을 모두 데리고 오겠습니다.”
“나도 함께 가지.”
“장군께서는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은 지체 없이 다시 흑마에 올랐다.
“단이는 혼자선 말을 못 탄다.”
그 말에 진위가 두 눈을 끔뻑였다.
단이야 자신이나 다른 군사의 말에 태워도 되거늘.
설마 그 작디작은 여인을 혼자 걸어오게 할까 싶다만, 그리 말한들 결이 말에서 내려올 것 같진 않았다.
결은 단이가 다른 사내와 가까이 붙어 있는 것 자체가 싫었던 까닭이므로.
그 사실을 알 듯 말 듯 아리송해진 진위는 애써 깊게 생각지 않고 그냥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던 성조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전장에서의 첫날을 끝마쳤고, 명석한 지략으로 전투 또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결이 수많은 군사들 앞에서 자신의 공 또한 높여주었거늘.
‘한데 어찌 이리 패배감이 드는가…….’성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시간 검을 잡았던 손은 물집이 잡히다 못해 죄 쓸려 볼썽사납게 변해 있었다.
단 하루도 검술을 게을리하였다고 생각지 아니 하였는데.
실전에 나와 보니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손은 그저 서책이나 넘기던 서생의 손이었다는 걸.
제아무리 훈련하고 또 훈련하여도 절대 결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걸.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결과 검을 부딪칠 때마다 수도 없이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전장에서 결의 도움 한 번 받았다는 사실이, 그 수두룩한 깨달음보다 더 날카롭게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한평생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의 끝을 우러러보는 심정이란.
‘이리도 못난 벗이야, 내가.’성조는 주먹을 말아 쥐며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전투가 끝나면 함께 압록 이남으로 가 그 아이를 데려오고 싶었는데.
이런 기분으론 차마 결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감히 품으면 안 될 마음을 품을 것만 같아서.
결을 향해서든.
아니면…… 단이를 향해서든.
***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잔뜩 흐려진 단이의 눈동자에 주홍빛 노을이 물들어갔다.
아까 주먹밥을 주었던 군사의 말대로 전투가 더 길어지는 걸까.
날이 저물어가도록 소식이 없는 결에 단이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무사히 돌아오셔야 할 텐데…….”
단이는 새벽에 떠 놓았던 물그릇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릇에 담긴 물은 그녀의 속도 모르고 한없이 잠잠하기만 하였다.
“왕 할아버지, 순 엉터리.”
단이는 죄 없는 왕 노인을 탓하며 원망스럽게 그릇을 보았다.
그런데 그때.
옅은 진동과 함께 잔잔하던 수면 위로 자잘한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땅 밑에서 편히 쉬고 있는데 엄하게 욕을 먹었다며 왕 노인이 노하였는가.
“아뇨, 할아버지. 그게 아니라……!”
당황한 단이가 뒤늦게 손을 내저은 찰나.
멀리서 말발굽 소리 여럿이 들려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단이는 황급히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살폈다.
그러자 저 멀리 석양을 등진 한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처음엔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이던 그들은 점차 선명하게 얼굴이 드러났다.
수많은 사람들 중, 제일 중앙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한 사람.
“서결 나리……!”
결이 돌아온 것이다.
그녀와 한 약조를 지키기 위해.
단이는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그를 눈에 담았다.
결이 고삐를 잡아당기자 흑마가 곧장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말에서 내려선 그때.
“나리!”
한순간이었다.
단이가 결의 품에 안겨든 것은.
온종일 졸아들다 못해 까맣게 타들어간 가슴이 결을 보자마자 터질 듯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일각이 일 년처럼, 한 시진이 십 년처럼 느껴졌던 단이였다.
고작 하루가 그녀에겐 영원 같았던 것이다.
행여 나리께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까.
위험한 상황에 처하시진 않았을까.
오죽하면 다치셔도 좋으니 부디 살아만 돌아오시길 바랐을까.
돌아오는 모습을 눈으로 보아도 허상일까, 꿈일까 두려운 터라.
하여 미처 생각을 하기도 전에 참지 못하고 그의 품을 파고든 것이다.
양팔을 둘러도 모자란 단단한 몸과 뜨거우리만치 선명한 체온을 느끼니, 그제야 결이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단이는 이미 힘주어 두른 팔에 한 번 더 힘을 주어 결을 껴안았다.
“감사합니다. 이리 무사히 돌아와 주시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꾹 참아왔던 눈물이 단이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갑옷으로 온몸을 둘러도 그 눈물의 온기는 느낄 수 있는 결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맨땅에 덩그러니 놓인 물그릇으로 향하였다.
그 앞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자국은 분명 오늘 하루 동안 단이가 새긴 것이리라.
흙과 피로 얼룩진 손등이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약조하지 않았느냐.”
“…….”
“돌아와서, 남은 차를 마시겠다고.”
오늘 하루 동안 결에겐 그녀와의 약조가 곧 법이자 명령이었다.
목숨같이 지켜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