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단이가 결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위해 슬며시 고개를 든 그때.
“으아……!”
갑자기 이마에 닿은 손과 함께 순식간에 결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장군.”
진위가 단이의 이마를 손으로 밀어내며 결에게서 떼어낸 것이다.
고개가 꺾이며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입을 꾹 앙다문 단이가 씩씩거리며 진위를 보았다.
왜, 뭐.
마주한 진위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순간 눈물이 쏙 들어간 단이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진위의 말이 틀린 건 아닌 터라.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단이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눈물을 닦아내었다.
다행히 결은 조금 전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인지, 마저 닦지 못한 눈물을 손수 닦아주었다.
“이만 가자. 늦기 전에 진영을 모두 옮겨야 하니.”
그 작은 손길에 단이는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래. 다른 눈들이 무어 중요할까.
나리께서, 나의 세상이, 나의 전부가.
이리 무사히 돌아오셨는데.
“네, 나리.”
코를 훌쩍인 단이가 배시시 웃어 보이고는 얼른 짐을 싸기 시작했다.
빠르게 진영을 철거한 군대는 곧바로 압록으로 향하였다.
단이 역시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결과 함께 흑마에 올랐다.
한참을 내달려 도착한 압록은 이미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황해와 가까운 데다 요 며칠 내리 쏟아진 비로 인해 많이 탁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가까이 가서 보면 어느 정도 아래가 비칠 정도였다.
한쪽에는 압록을 건너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긴 다리가 보였다.
언뜻 보면 두툼한 뗏목 같기도 하였는데, 물에 반쯤 잠겨 역시 몸이 젖는 걸 피할 순 없어 보였다.
‘나리께선 강을 어찌 건너시지?’투명한 물이라면 보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결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강을 건너고 또 건너왔던 건지 걱정하던 찰나.
결이 품에서 검은 끈 하나를 꺼내어 스스로 눈을 가렸다.
그러곤 진위에게 명하여 밧줄로 단이와 제 몸을 묶으라 하였다.
곧 단이와 결의 허리에 밧줄이 단단히 엮이었다.
“말이 조금 거칠게 갈 것이니 고삐를 잘 잡고 있거라. 몸을 묶어 떨어질 일은 없겠다만, 자칫 잘못하면 네가 다칠 수 있으니.”
귓가로 나직이 들려온 목소리는 언뜻 굳어 있었다.
결은 이 번거로운 과정을 굳이 감수하며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녀를 직접 데려오기 위해.
괜스레 마음이 아릿해진 단이는 부러 목에 힘을 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였다.
“네, 나리. 걱정 마시어요.”
그러곤 결의 말대로 고삐를 힘껏 잡았다.
곧 그녀의 손등 위로 결의 커다란 손이 덮였다.
“이랴!”
결이 박차를 가하자 흑마가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말에 단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첨벙!
엄청난 물보라와 함께 말이 뗏목을 발판 삼아 힘차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결은 눈을 가리고도 마치 앞이 보이는 사람처럼 흑마를 몰았다.
그의 말대로 말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거칠었지만, 그는 감각만으로 능숙하게 고삐를 당겨 방향을 잡았다.
“으읏……!”
이 와중에 단이는 몸이 이리저리 뒤흔들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까딱 잘못하면 순식간에 물살에 휩쓸릴 것 같아 자꾸만 몸이 굳었다.
그나마 허리에 단단히 묶인 밧줄과 손등을 덮은 결의 손이 그녀의 불안을 억누르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무사히 건너편 육지로 올라올 수 있었다.
“푸하, 하……!”
마지막에 물을 제대로 맞은 단이가 푸 물을 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순간적으로 어찌나 몸에 힘을 주었는지 손끝이 다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팔이 아픈 것보다, 눈을 떴을 때 물을 보고 거북해 할 결이 더 걱정되었다.
“나리, 잠시만 기다려주시어요.”
단이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팔을 뻗어 결의 얼굴에 묻은 물기부터 닦아주었다.
그나마 덜 젖은 소매로 닦으니 묻어 있던 물기가 말끔히 사라졌다.
“되었습니다, 나리. 이제 천을 푸셔도 됩니다.”
그 말에 결이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풀어내었다.
“…….”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라는 건, 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서로의 몸을 틈 없이 조이고 있는 밧줄을 간과한 탓이었다.
예상치 못한 거리에 당황하긴 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의 당황은 단이와 다르게 불과도 같았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시선의 밀도.
붉은 입술 사이를 넘나드는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그때.
푸르르!
흑마가 갑자기 머리를 들어 갈기에 묻은 흙탕물을 세차게 털어내었다.
그 탓에 단이가 애써 닦아준 얼굴이 다시 젖고 말았다.
“아…….”
단이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축 처졌다.
그 표정이 꼭 열심히 파놓은 구덩이가 다시 메꿔진 것을 본 강아지와 같더라.
가슴을 툭 치고 지나가는 귀여움에 결의 입술 새로 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심장을 옥죄이다가도 한순간 탁 풀리게 만드는, 참으로 엉뚱한 여인이었다.
그만큼, 더 귀하고 어여쁜.
“되었다. 이 정도는 괜찮으니.”
마른 세수로 얼굴을 닦아낸 결은 굳이 미소를 감추지 않으며 허리에 묶은 밧줄을 풀었다.
고삐를 바로잡자 그 안으로 작은 손이 맞춘 듯 쏙 들어왔다.
가슴에 살짝 맞닿은 작은 머리통에 심장 박동이 한층 더 세졌다.
갑옷에 가려져 너에겐 차마 닿지 않겠지만.
“이랴!”
새 진영으로 가는 길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별것 아닌 순간조차, 그에겐 붙잡고 싶은 간절한 삶의 한 자락이었다.
***
첫날의 대승에 너무 많은 운을 썼던 것일까.
전쟁은 생각보다 쉽게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압록 이북으로 일부러 유인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여진족은 첫날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진족이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한들, 결과 성조가 이끄는 부대 앞에선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전세에 지칠 법도 하건만.
결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군사들의 사기와 기강을 잡으며 승기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몇몇 전투에선 여진족의 여러 부락들을 함락하여 무기와 식량 등을 가져올 수 있었다.
잡아온 십여 명의 포로들 역시 모두 협조적이었다.
그들이 여진 부대의 몇몇 주요한 군사 기밀까지 알려주었던 것이다.
이들을 잘 포섭한다면 지금보다 더 수월히 적진을 함락할 수 있으리라.
성조가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이곳 대녕을 넘어 시라무렌강 아래의 부락을 치면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걸세.”
결의 곁에서 성조 역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매 전투에서 숱한 고비를 겪긴 하였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뛰어난 전술로써 메꾸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열등감은 필사적으로 외면하면서.
“식량은 얼마나 남았지.”
“이번에 가져온 전리품까지 합하면 한 달 정도 버틸 양은 남아 있네. 그 안에 최대한 담판을 지어야 해.”
“장군, 날씨 때문인지 중상인 병사들의 상태가 악화하고 있습니다. 평안에 지원군을 더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진위, 자네의 말도 옳지만, 이 이상의 증원은 너무 위험해.”
“그래. 국경을 더 비울 수는 없다. 일단 지금의 군력으로 최대한 버텨볼 수밖에.”
한창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
막사 밖에서 단이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차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거라.”
결의 허락에 단이가 차제구를 들고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때때로 결이 긴 전투나 전략 논의로 인해 아예 차를 잊을 때도 많은 터라.
이곳에서 차는 오롯이 단이가 책임지고 챙겨야 할 영역이 되었다.
“잠시 쉬도록 하지.”
결이 차를 마시는 동안에는 나머지 장수들도 잠시나마 쉴 수 있었다.
평소와 같이 차를 우려 결에게 올린 단이는 막사에 함께 있는 장수들에게도 남은 차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모두가 지치고 힘든 가운데 결에게만 차를 올리는 것이 미안했던 탓이었다.
하여 그녀는 직접 결에게 청을 올려, 성조뿐만 아니라 다른 장수들에게도 차를 나눠줄 수 있게끔 하였다.
성조는 잠깐이나마 갖게 된 휴식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나중에 한양으로 돌아가면 이 차 맛이 제일 먼저 생각날 것 같군. 안 그런가, 진위?”
“저는 차 맛을 잘 모릅니다. 그냥 쓰고 텁텁하고. 이런 걸 무슨 맛으로 즐기는지…….”
“자네 벌써 두 잔째네.”
“목말라서 마십니다, 목말라서.”
진위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두 번째 잔까지 깔끔하게 비운 입은 어찌 저리 표리부동한지.
입술은 거짓말을 해도 혀는 솔직한 까닭이라.
또 한 번 빈 잔을 툭 앞으로 내미는 그의 행동에 단이는 헛웃음을 치면서도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말로는 괜찮다 하면서 남기는 것보단 차라리 다 마셔주는 게 더 좋았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면 다시 다음 전투를 대비해야 하는 터라.
단이는 조용히 차제구들을 정리하여 막사 밖으로 나왔다.
“얼른 씻고 나도 자러 가야겠다.”
벌써 사방은 어둠이 짙게 깔려 겨우 한 치 앞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단이는 달빛에 의지하여 개울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포로들이 잡혀 있는 간이 수용소가 보였다.
하필 개울이 수용소 너머에 있어 저 앞을 반드시 지나야 하는 터라.
멀리서 보아도 험악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단이는 절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괜찮아. 어차피 수용소 앞을 지키는 군사님들도 있고, 우리에게 협조적인 사람들이라 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야.’단이는 찻상을 든 팔에 힘을 주며 그 앞으로 걸어갔다.
단이가 수용소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눈빛이 일순 바뀌었다.
전쟁터에서 여인을 보기란 쉽지 않은 터라.
아무리 사내처럼 옷을 입어도 타고난 외모와 태를 가리기란 쉽지 않았다.
음흉한 눈동자들이 단이의 뒤를 따라갔다.
“저년이 북귀의 다비인가 뭔가 하는 계집인가 보군.”
한 사내의 목소리가 단이의 청각을 건드렸다.
그들은 단이가 여진어를 알아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저들끼리 말을 이어갔다.
“꽤 반반하게 생겼는데? 나이는 좀 어려 보이지만.”
“북귀 놈도 사내라 이거지. 원래 저런 계집이…….”
차마 입에 담기도 더러운 말을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냈다.
무시하려 해도 개울과 수용소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쉽지가 않았다.
“조용히 해!”
수용소 앞을 지키는 군사들이 창살을 치며 경고를 줘도 그때뿐.
그들은 금방 다시 시시덕대며 저급한 말을 계속하였다.
저를 두고 나오는 온갖 희롱에 단이는 수치심으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때, 눈치 빠른 포로 하나가 단이의 안색이 급격히 나빠진 것을 보며 수군거렸다.
“저 계집, 우리 말을 알아듣는 거 같은데.”
“뭐? 설마.”
“아무리 북귀가 물을 못 마시는 저주에 걸렸다 해도, 이런 전쟁터에 저런 계집을 그냥 데려올 리는 없잖아. 여진의 말을 할 줄 알아 데려온 것이 분명하다.”
“어이, 계집. 너 여진의 말을 할 줄 아는 거야? 알아들었으면 이쪽 좀 봐 봐! 좋은 것 줄게!”
다른 포로가 단이에게 장난처럼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큰 소리가 날 때만 한 번씩 어깨를 움츠릴 뿐 이곳을 돌아보진 않았다.
그들로선 단이가 단순히 겁을 먹은 건지, 아니면 정말로 말을 알아듣고 굳은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설령 여진의 언어를 알아들었다 한들…….”
잡힌 포로들 중 수장인 사내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 입을 열었다.
“설마 이 말까지 알아들을까.”
뒤이은 말은 여진어가 아닌 라이콴족의 언어였다.
수십 년 전 여진에게 흡수되어 이제는 명맥조차 남지 않은 비운의 민족.
그 마지막 핏줄이 바로 이 포로들이었던 것이다.
라이콴족의 언어는 여진족조차 알아듣는 이가 거의 없는 그들만의 특수한 언어였다.
수장은 단이에게 들릴 만큼 다시 목소리를 높여 라이콴족 언어로 말했다.
“지금부터 너에게 우리 부대의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도록 하겠다. 이것만 알면 너희 조선이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지. 어때, 듣겠느냐?”
모두 단이를 주시하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한 모양인지 단이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우리 모두의 명예와 생명을 걸고 네게 비밀을 말해주겠다 약속하지. 지금 네가 이걸 듣지 않는다면 우린 더 이상 너희 조선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조선이 패하는 것도 모두 네 잘못이 되는 거지.”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조선의 군대를 배신하려는 생각이 아닌 이상, 이걸 듣고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
어떠한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는 단이에 수장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코웃음을 치며 편히 등을 기대었다.
“내일 새벽에 이곳 식량 창고가 모두 불타게 될 거란 말을 해주려 하였는데, 참 안타깝군.”
조롱하는 말투에 옆에 있던 포로들이 쿡쿡거리며 비웃었다.
사실 이들은 일부러 결의 군대에 잡혀온 척했던 것이다.
얌전히 협조를 하는 척 적진을 파악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탈출하여 식량을 모두 불태우고 돌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아무리 멸족이 되었다 해도 한때는 전쟁의 부족이란 말이 있을 만큼 힘과 무예가 뛰어났던 라이콴족이라.
이깟 수용소 탈출쯤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이것이 결국 너희의 운명이니까.”
포로들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기까지, 고작 한 시진도 남지 않은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