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각.
수용소 안에 있던 라이콴족 포로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앞을 지키던 군사들은 교대를 위해서인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주위를 살핀 수장이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움직이자.”
그들은 미리 준비해 놓았던 작은 돌조각으로 손발에 묶인 밧줄을 빠르게 잘라냈다.
그러곤 긴 쇠꼬챙이로 손쉽게 수용소 앞 자물쇠를 열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군.”
“그러게 말입니다. 겨우 이런 걸로 저희를 가둬 놓으려 했다니.”
“처음부터 고분고분 잘 따라주니 저들도 방심을 했겠지요.”
“자, 지체하지 말고 얼른 가자. 동이 트기 전에 임무를 마치고 우리 군으로 돌아가야지.”
“예!”
그들은 빠르게 수용소를 나와 식량이 있는 곳을 찾기 시작하였다.
다들 곤하게 잠에 빠진 것인지 사방이 고요하였다.
‘조선의 군대는 막상 싸울 때를 제외하곤 전부 물러 터졌군.’라이콴족의 수장은 속으로 그들을 비웃으며 빠르게 주변을 탐색하였다.
“자이란님. 저곳인 것 같습니다.”
수하 중 한 명이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엔 제법 규모가 큰 목조 건물이 있었는데, 곡식을 담은 듯한 포대가 곳곳에 가득 쌓여 있었다.
주변에 감자 같은 작물들도 있는 것을 보니 필시 저곳이 식량 창고인 듯하였다.
라이콴족 포로들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식량 창고 가까이로 다가갔다.
밖에 쌓인 포대 중 하나를 열어보니 말린 보리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하가 부싯돌 두 개로 빠르게 불을 피웠다.
마른 나뭇가지에 피어오른 불은 곧 포대자루로 옮겨붙었다.
활활 매서운 기세로 타오르는 불을 보며 라이콴족 수장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됐다. 이제 놈들이 깨기 전에 우리는 빠르게 이곳을 탈출…….”
그때였다.
휘익, 탁!
“윽!”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수장 옆에 있던 포로 한 명이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뭐야?!”
당황한 수장이 빠르게 전투태세를 갖추었지만, 뭔가를 할 새도 없이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윽!”
“아악!”
화살은 단숨에 포로들의 급소를 꿰뚫었다.
결국 십여 명의 라이콴족 포로들 중 수장만 남게 되었다.
“젠장……. 벌써 알아챈 건가.”
수하들이 모두 죽어나간 상황에서도 수장은 형형한 눈빛을 지우지 않았다.
그의 뒤로 몸집을 불린 화마가 맹렬한 기세로 곡식 창고를 삼키며 타올랐다.
그 뜨거운 불길이 수장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너희들은 이미 늦었다.’불이 거세지자 곳곳에 숨어 있던 군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수십 명의 군사들 가운데, 결 또한 수장에게 활을 겨눈 채 서 있었다.
수장은 날름거리는 화마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기세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북귀.”
전쟁에서 식량이란 군사의 수만큼이나 중요한 것.
그런 식량을 죄 불태웠으니, 이 척박한 땅에서 조선의 군대가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살아 돌아가지 못하는 건 유감이었지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였으니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과연 그럴까.”
결이 말한 여진어에 수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피식 조소를 내뱉은 그는 더 이상 남은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여유를 부렸다.
“곧 죽을 사람 앞에서까지 쓸데없는 패기를 보일 필요는 없다. 너희의 패배는 이미 예정되어 있어.”
“그건 마지막까지 가봐야 알 수 있겠지.”
“식량까지 모조리 불탄 상황에서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닌가? 뭘 믿고 그리 여유로운 거지?”
그때였다.
“저건 식량 창고가 아니니까요.”
유약하게 귀를 사로잡은 목소리에 수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장은 굳은 고개를 움직여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엔 단이가 서 있었다.
잔뜩 겁먹은 얼굴을 하면서도 단이는 수장을 향하여 또박또박 말하였다.
“식량 창고가 아니라고요. 당신들이 불태운 건.”
단이가 한 말의 내용만큼이나 놀라운 건, 바로 그녀가 구사하는 언어였다.
라이콴족의 언어.
멸족한 민족의 언어를 그녀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
수장은 믿기 힘든 사실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전날 밤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라이콴족은 오래전 여진에게 멸망당한 족속이라, 남은 사람이라곤 여기 있는 포로들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동족을 배신한 대가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라이콴족의 언어를 알고 있다는 건 조금이라도 이쪽 핏줄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행여 우리 외에 살아 있는 라이콴족이 있다 하더라도 이제는 노인들밖에 없을진대…….’살기 어린 눈동자가 단이에게로 향했다.
“정체가 무엇이냐.”
“…….”
“설마, 너도 라이콴족의 후예인 것이냐?”
수장의 질문에 단이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결의 뒤에 숨은 채 겁먹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단순히 죽고 죽이는 현장에 대한 두려움인가.
아니면 역사에서 사라진 이방 민족의 언어를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가.
정확히 그 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이 일에 나서기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각오한 듯 보였다.
그 희생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어리석은 것……. 결국 너 또한 우리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제 선택이니까요.”
“…….”
“그리고 전, 라이콴족은 아닙니다. 오해하는 것 같아서.”
그 말에 묘한 표정을 짓던 수장이 곧 실성한 것처럼 소름 끼치는 웃음을 흘렸다.
‘라이콴족은 아니다’의 다른 뜻은, 결국 조선인도 아니라는 뜻.
한참을 웃던 그가 결을 향해 비릿하게 입술을 비틀며 여진어로 말했다.
“위험한 것을 거두었군, 북귀.”
“…….”
“네 다비가 어찌 우리 라이콴족의 말을 알고 있을까?”
그 말에 단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설마 방금 했던 대화를 모두 말하려는 생각일까.
아랫입술을 꾹 깨문 단이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그만……!”
“저 계집이 어떤 계집인지 알기나 하고 곁에 두느냔…….”
그러나 수장의 마지막 말은 채 끝맺어질 수 없었다.
결이 쏜 화살이 그의 목을 단숨에 꿰뚫은 까닭이었다.
거품처럼 끓는 피를 내뿜던 수장은 마지막까지 결과 단이를 노려보다 끝내 수하들 곁에 쓰러졌다.
그를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결이 시선을 들어 앞을 보았다.
가짜 식량 창고는 그 사이 화마에게 완전히 먹혀 반쯤 쓰러진 상태였다.
포로들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진짜 곡식 포대와 작물들을 조금 놓아두고, 나머지는 전부 풀과 나뭇가지 등을 채워놓은 포대들이었다.
덕분에 창고는 더 빨리 타올랐다.
거센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이 포로까지 잡아먹을 듯 팔을 뻗었다.
“시신은 처리해라.”
“예, 장군.”
결의 명령에 군사 몇이 포로들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마지막으로 옮겨지는 수장을 보던 결의 시야에 단이가 들어왔다.
처음 이곳으로 올 때만 해도 비장하게 서 있던 그녀의 얼굴이 지금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엇 때문에 저리 겁을 먹었는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수장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저 계집이 어떤 계집인지 알기나 하고 곁에 두느냔…….’
“…….”
그녀를 향한 결의 시선이 한층 짙어졌다.
결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단이는 하늘로 치솟은 불길만 바라보았다.
화마 속으로 사라지는 수장의 모습에 그녀의 눈동자 역시 붉은빛으로 일렁였다.
‘……괜찮아. 잘한 거야.’
손끝이 잘게 떨려와 두 손을 맞잡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나리를 위한 일을 한 것뿐인데.
이상하게 발목을 감싸며 올라오는 불안을 잠재우기가 힘들었다.
마치 들키면 안 될 것을 들킨 것처럼.
포로들이 라이콴족이란 것을 알았을 땐 그녀도 깜짝 놀랐었다.
그녀를 거두고 키워 주었던 왕 노인이 바로 라이콴족이었으니까.
언어에 특별한 두각을 드러내는 단이에게 왕 노인이 라이콴족의 말까지 가르쳤던 것이다.
그 딴에는 사라진 민족을 기억해 주는 이가 하나라도 더 있길 바란 것이었으리라.
결과적으론 그것이 결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의심의 눈초리까지 얻고 말았다.
아까부터 그녀를 바라보는 몇 군사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은 게 그 증거였다.
분명 라이콴족의 수장이 죽기 전 했던 여진어를 알아들은 이가 있음이라.
모두가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다.
‘저 계집은 조선인이 아니다.’
‘방금 죽은 놈들과 같은, 함부로 조선 땅을 밟은 이방인이다!’
실재할 리 없는 환청이 그녀의 귀를 괴롭혔다.
두려움이 가슴을 감고 올라와 턱 끝까지 손을 뻗쳐오던 그때.
“잘하였다.”
결의 낮은 목소리에 햇살에 안개 사라지듯 환청이 멈추었다.
“덕분에 저들의 계획을 미리 알고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어. 네 공이 크다.”
그 말에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어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어요?
어찌 저를 의심하지 않으시어요?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단이는 결국 시선을 떨어트리며 형식적인 답을 내놓았다.
“제가……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어요.”
그러나 머릿속은 라이콴족의 언어를 아는 것에 대해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무리 심 다점을 운영하며 여러 손님들을 상대하였다지만,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민족의 언어까지 알고 있는 것은 충분히 의심을 살 만한 일이었다.
‘왕 할아버지가 라이콴족이셨다고 말씀드리면…… 믿어주실까.’
그런 왕 할아버지의 손에 길러진 나를, 과연 믿어주실까.
단이는 흐린 눈빛으로 결을 바라보았다.
표정만으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라이콴족 수장이 남긴 마지막 말에 벌써 의심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조선인이 아닐 거라고.
자신을 속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조마조마한 마음에 맞잡은 손이 하얗게 질릴 무렵.
“많이 놀랐을 텐데 이만 들어가서 쉬거라.”
결은 의외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이가 놀란 빛으로 보아도 그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였다.
일말의 의심조차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잠시 이곳 좀 부탁하지. 막사까지 데려다줘야 할 것 같으니.”
“알았네. 잘 데려다주고 오게나.”
그는 성조에게 활을 맡기고선 먼저 발길을 돌렸다.
오늘 일에 대해선 묻지 않으시려는 걸까.
단이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성조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다동, 오늘은 정말 큰일 하였다.”
그는 단이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뒷일은 아무 걱정 말고. 여긴 내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말뜻을 알아차린 단이가 놀라 작게 입을 벌렸다.
성조 역시 수장의 마지막 말을 알아듣고 술렁이는 분위기를 읽었음이라.
그럼에도 그녀를 위해 기꺼이 상황을 정리해 주겠다 하는 것이었다.
우물쭈물하던 단이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덕분에 중요한 식량을 지켜내었는데.”
성조가 싱긋 웃으며 단이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어서 들어가거라. 많이 놀랐을 텐데 푹 쉬고.”
“네…….”
단이는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곧 결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역시나 남은 군사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장군님의 다비 말일세. 아까 포로랑 뭐라고 대화한 건가?”
“나도 전혀 못 알아들었네. 여진어는 확실히 아니었어. 라이콴족? 뭐 그런 말이 들린 것 같았는데.”
“그 포로 놈, 마지막엔 장군께 저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아냐고 묻더군.”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럼 아까 그 포로들과 장군의 다비가 서로 아는 사이란 말인가?”
“그것까진 모르지. 다만 저 다비를 처음 발견한 게 압록 이북이었다는 게 나는 좀 의심스럽네.”
“나도 마찬가질세. 장군의 다비라 내색하진 않았지만, 사실 치원이면 아무리 버려진 땅이라 하더라도 여진의 영토와 가까운 곳인데…….”
“자, 거기까지.”
“헉.”
한창 심각한 이야기를 하던 와중.
갑자기 끼어든 성조에 군사들이 황급히 입을 다물고 자세를 바로 하였다.
성조는 서늘한 눈으로 군사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오늘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은 모두 기억 속에서 지워줬으면 좋겠는데.”
“…….”
“특히, 결의 다비와 관련된 일은 더더욱.”
날카로운 눈은 부탁이 아닌 경고였다.
“어려우면, 이 자리에서 영영 입 다물게 만들어주고.”
서로 눈치를 살피던 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구를 맹세하였다.
군사들을 철저히 입단속 시킨 성조는 단이가 사라진 방향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포로의 말에 하얗게 질려 가던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결이…… 부디 다른 쪽으로 생각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 어린 시선은 오래도록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막사로 향하는 동안 단이와 결 사이에선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침묵이 주는 두려움은 생각보다 더 깊은 터라.
결국 참지 못한 단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리. 아까 그 사람이 했던 말은…….”
“신경 안 쓴다.”
천천히 멈춰 선 결이 단이를 보았다.
그녀를 향한 눈동자는 뜻을 알 수 없을 만큼 검게 물들어 있었다.
“설마 내가, 너보다 그자를 더 믿을까.”
착잡하였다.
나는 이토록 너로 인하여 애가 타고 있는데.
너는 언제 나에게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객에게 목이 그이던 그날에 여전히 갇혀 있는 것 같아서.
결이 걸음을 옮겨 단이에게 다가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온전히 서로에게 얽매였다.
단이의 얼굴을 새기듯 눈에 담던 결이 팔을 들어 올렸다.
“네가 어떤 아이인지는, 그자보다 내가 더 잘 안다.”
그녀의 눈가에 묻어 있던 회색 재가 결의 손끝에 조심스럽게 닦여 나갔다.
묘한 이채가 그의 눈동자를 더 짙게 물들였다.
“넌 나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그걸 내가 알고 있다.”
“…….”
“그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너의 정체가 무엇이든.
설령, 네가 나를 속였다 할지라도.
“잊지 말거라.”
하얀 살결을 부드럽게 밀어낸 손이 그대로 뺨을 감쌌다.
결은 제 손안에 오롯이 담긴 단이의 얼굴을 응시하며 진심을 담아 말하였다.
“내가 먼저 널 저버릴 일은 없어.”
단어 하나하나를 그녀의 가슴속에 깊숙이 밀어 넣듯.
“절대로.”
결코 잊을 수 없게끔.
네가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는 내가 널 곁에 묶어둘 것이기에.
나를 떠나선 아무 곳도 갈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