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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41화 (41/100)

41화

라이콴족의 작전이 여진족의 마지막 일격이었던 걸까.

그들의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전세는 빠르게 꺾이기 시작했다.

연일 대승을 거두는 조선군에 여진족은 빠르게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파저강 일대를 모두 점령한 결의 군대는 여진족 적장을 끝까지 추격하였다.

그 결과.

“와아아아!”

드디어 여진족의 본거지까지 침투하는 데 성공한 그들은 이틀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목숨을 바쳐 얻어낸 값진 승리에 군사들은 한목소리로 함성을 내지르며 자축하였다.

“서결, 서결, 서결!”

한 군사가 결의 이름을 외치자, 곧 사방에 그의 이름이 들불처럼 번져가기 시작했다.

성조가 다가와 결의 손을 잡고 높이 들어 올렸다.

하늘에 닿도록 울려 퍼지는 함성이 드넓은 벌판까지 가득 채웠다.

그날 밤.

결은 수고한 군사들을 위해 노획한 가축과 식량을 풀어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덕분에 몇 날 며칠 생사를 넘나들며 싸워왔던 군사들은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결과 성조, 진위 역시 한곳에 모여 길고 긴 싸움의 끝을 축하하였다.

진위가 새삼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내일이면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겠군요.”

“고작 두어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참 오래 떠난 것 같아.”

“저도 좌랑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그곳이 당연히 돌아가야 할 곳처럼 느껴집니다.”

“자네도 한양 사람 다 됐으이.”

진위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던 성조는 말없이 앉아 있는 결을 향해서도 잔을 들어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허공만 보던 결이 성조가 내민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네도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좀 더 팍팍 들게나. 이럴 때 마음껏 즐겨야지, 아꼈다 무엇 하겠는가?”

성조가 손수 결의 손에 잔을 쥐여 주었다.

힐긋 바라본 그의 곁엔 술병 대신 단이가 올리고 간 짙은 차가 놓여 있었다.

결을 위해 일부러 색이 짙은 막걸리만 들고 왔는데도 그는 한사코 차만 고집하였다.

아마 예기치 못한 일을 대비하기 위해 절제하고 있는 듯하였다.

성조는 술 따르듯 차를 잔에 그득하게 채워 주며 말했다.

“본장이 마음껏 즐겨야 아랫사람도 눈치 안 보고 더 신나게 퍼먹을 것 아닌가. 안 그런가, 진위?”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너스레에 피식 웃은 결이 못 이기는 척 잔과 음식을 들었다.

성조의 말대로 무거운 생각들은 이 순간 잠시 미뤄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술 대신 차를 입안으로 흘려 넘긴 그는 성조의 잔에도 술을 채워주었다.

“고생 많았다.”

“고생은 모두가 하였지.”

“이번 전투에서 네가 없었다면 고전을 치렀을 것이다. 네 전략 덕분에 수월히 끝낼 수 있었어.”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하나 새삼스럽게 밀려든 이 쓸쓸한 감정이란 무엇인가.

“뭐, 전략이라도 도움이 되어 다행이지.”

성조는 쓴웃음을 술잔과 함께 입안으로 삼켰다.

이번 전투를 겪으며 확실하게 깨달은 한 가지.

‘나는 앞으로도 절대로…… 결을 뛰어넘을 수 없을 테지.’

한평생 전장에서 구른 이를 무슨 수로 따라잡겠느냐마는, 그는 감히 벗과의 동등함을 원하였다.

하지만 결과 제 사이의 차이를 피부로 느낀 그 숱한 순간들 속에서.

‘무예로는 장군께서 좌랑보다 한 수 위시지.’

‘당연한 소리. 실력을 논함에 있어선 감히 좌랑과 비교하는 것조차 장군께 실례되는 일일세.’

‘아무리 오랫동안 무예를 익히셨다 해도, 어찌 좌랑께서 장군과 같으실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신과 결을 대놓고 비교하는 군사들의 숱한 말들 속에서.

경외와 무력감, 그리고 무수한 열등감이 동시에 성조를 찾아왔다.

평생을 이리 살아왔다.

결이 있는 곳에서도.

결이 없는 곳에서도.

아버지도, 주변 사람들도, 그리고 자신조차 은연중에 결과 비교를 해대었다.

하지만 성조가 진실로 원하는 건 결이라는 벽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란히 어깨를 견주고 싶었다.

하여 결이 짊어진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함께 지고 싶었다.

끝없는 죄책감과 같잖은 자만심이 그런 꿈을 꾸게 만들었다.

감히, 어쭙잖은 실력과 힘으로.

“뭔 생각을 그리 해.”

자괴에 빠져들던 성조를 결의 목소리가 현실로 불러들였다.

앞을 보니 결이 그에게 술병을 내밀고 있었다.

“한 잔쯤은, 함께 마시고 싶어서.”

결이 술병 든 손을 조금 더 앞으로 뻗었다.

그 역시 성조의 복잡한 심정을 어느 정도 눈치챈 까닭이라.

차마 한 가지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이 순간 두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내색할 수 없는 건.

“엎드려 절 받아도 좋긴 좋네. 진즉에 좀 마시지.”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벗의 존재가 소중하기에.

생각이 많은 건 그만큼 서로를 지키기 위함이기에.

결과 성조는 시끄러운 속을 잠시 웃음으로 누르며 함께 술잔을 부딪쳤다.

“그나저나 자네 다동은 무얼 하고 있는가? 아까부터 보이질 않던데.”

“혼자서 편히 쉬라고 놔두었다. 음식은 따로 챙겨주었고.”

“에이, 이런 날은 다 함께 시끌벅적하게 놀아야지!”

성조는 말릴 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막사 밖으로 몸을 쭉 빼었다.

그러곤 바로 옆 단이의 막사를 향해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어이, 다동! 자는 게냐?”

잠시 후, 단이가 막사 밖으로 쏙 고개를 빼내었다.

“무슨 일이시어요?”

포로 사건 이후 며칠 주눅이 들어 있던 그녀는 근래에 들어서야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성조는 싱긋 웃으며 이쪽으로 오라 고갯짓을 하였다.

“혼자 거기 있지 말고 얼른 나오너라. 함께 놀자!”

“저는 괜찮습니다.”

“너 그리 놔두면 우리가 괜찮지 않다. 괘념치 말고 오너라.”

그러잖아도 여기저기 시끌시끌한 가운데 홀로 막사에 있어 조금 적적하던 차라.

잠시 고민하던 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음식이 아직 남았으니, 이것도 가지고 가겠습니다.”

눈치를 보던 단이가 음식 그릇을 챙겨 건너편 막사로 들어갔다.

그녀가 가져온 그릇엔 군사 셋이 먹어도 남을 것 같은 양의 음식들이 쌓여 있었다.

수북하게 쌓인 음식들에 성조와 진위가 두 눈을 끔뻑였다.

“어찌…… 네 것만 이리 많은 것이냐?”

“나리께서 가져다주시었어요.”

그 말에 두 사내의 눈이 동시에 결을 향했다.

결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였다.

“……혹여 부족할까 봐.”

“도적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니었구먼.”

낮게 읊조린 소리가 결의 양심을 쿡쿡 찔러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단이만 방싯방싯 웃으며 음식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잖아도 저 혼자 먹기엔 양이 너무 많아 어찌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여기서 함께 먹으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다 같이 먹어도 남을 양이겠는데. 하하하!”

성조의 웃음이 호쾌하게 터져 나왔다.

그 웃음소리에 잠시나마 어색했던 공기도 곧 유하게 풀어졌다.

“써라. 새 거다.”

단이가 그들 곁에 자리를 잡자, 웬일로 진위가 그녀 몫의 잔을 놓아주었다.

단이가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니 진위는 짐짓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라이콴족의 흉계를 막았던 일로 그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걸까.

늘 찬바람만 날리던 진위가 처음으로 자신을 챙겨주니, 단이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감사합니다, 진위 나리.”

“……별걸 다.”

말투는 여전히 퉁명스럽긴 했지만 이전처럼 아니꼬워하는 빛은 아니었다.

그저 이것이 그의 성격이라, 단이는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지금은 결의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였으니.

“피곤하면 언제든 돌아가도 되니, 억지로 있지는 말고.”

술 대신 차를 잔에 따라주는 결을 보며 단이는 해맑게 웃었다.

“네, 나리. 걱정 마시어요.”

이 순간은 신분의 고하도, 남녀의 유별도 중요치 않았다.

네 사람은 함께 음식과 차를 나누며 모처럼 평온한 시간을 즐겼다.

이런 날이 다시 올까 싶을 만큼 무척이나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

파저강 일대에 설치하였던 진영을 모두 철거한 뒤.

결의 군대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에 올랐다.

값진 승리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라 그런지 군사들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당당하게 앞을 향해 걸었다.

함께 싸우지는 못했어도 그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단이에게까지 느껴지는 터라.

함께 기운이 넘치는 것만 같아 괜스레 흑마의 고삐를 꽉 잡아보았다.

“그리 세게 쥐면 말이 놀란다.”

손바닥 안에서 미약한 꼬물거림을 느낀 결이 귓속말하듯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결이 자신의 손과 고삐를 함께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간과했던 것이다.

“송구하옵니다, 나리. 집으로 간다는 생각에 괜히 들떠서…….”

단이는 귀 끝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얼른 느슨하게 손힘을 풀었다.

작게 입가를 늘인 결이 그녀의 손을 직접 고쳐 주었다.

“고삐는 이렇게 손가락 사이에 말아서 쥐는 것이다. 너무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말이 방향을 잡지 못하니, 가고 싶은 방향이 있다면 그쪽으로만 당기면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어요?”

“그래. 허리는 곧게 펴고, 시선은 항상 앞을 보아야 한다.”

결은 한 손으로 단이의 허리를 지그시 밀어주고 부드럽게 턱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지나간 곳마다 오히려 뻣뻣해지며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얼어붙은 듯 굳는데 차갑기는커녕 되레 열이 나니.

단이는 결의 손이 꼭 뜨거운 얼음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몸이 경직되니 당연히 말 또한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다.

“어어, 그쪽이 아닌데! 이쪽이야!”

낯선 데다 서투르기까지 한 손길에 흑마가 슬슬 성이 나는지 고집을 피웠다.

본래도 길들이기 힘들어 결이 아니면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말이라.

결은 다시 단이의 손과 고삐를 함께 잡으며 말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혼자 말을 타려면 한참은 배워야겠구나.”

귓가에 흘러든 목소리엔 어쩐지 부드러운 웃음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나리께서 웃고 계신 걸까.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차마 고개를 돌리기엔 부끄러웠다.

단이는 가슴속이 몽글몽글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그럼…… 배울 때까진 이렇게 나리와 함께 타면 되지요.”

그녀가 용기 내어 던진 말이 조약돌처럼 결의 가슴속에 퐁당 빠졌다.

동그란 파동은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그의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가르쳐준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묻고 싶었다.

그것이 어떤 뜻인 줄 알고나 말한 것이냐며.

너를 조금이라도 떼어낼 일이라면, 내겐 할 이유가 없었으니.

“그럼 배우지 말까요?”

“…….”

“저는, 나리와 함께 타는 것이 더 좋은데.”

이 순간 묘한 감정이 결과 단이의 마음을 동시에 물들였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맥박이 겹쳐진 손 안에서 느껴졌다.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이냐.

혹……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이냐.

결이 굳은 입술을 움직여 물어보려던 그때였다.

“윽!”

결의 근처에 있던 군사가 난데없이 활을 맞고 쓰러졌다.

무슨 일인지 살필 새도 없이 또 화살이 날아와 다른 군사를 맞혔다.

“전군, 대열을 유지하라!”

혹 여진이 남겨둔 함정일까.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빽빽한 수풀 때문에 적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또 한 번 화살이 날아와 이번엔 결과 단이가 타고 있는 흑마를 노렸다.

발 앞으로 날아온 화살에 놀란 흑마가 마구 날뛰어댔다.

“꺄악!”

결은 한 팔로 단이를 단단히 끌어안으며 남은 손으로 고삐를 세게 당겼다.

“전군, 공격하라!”

결의 명령에 군사들이 활을 들어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반격하였다.

하지만 작정하고 숨어서 공격하는 적들을 잡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나를 노리는 건가.’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을 살피던 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중구난방처럼 보이긴 해도 자세히 보면 화살이 박힌 방향이 전부 그의 동선을 따르고 있었다.

정확히 한 사람만을 노리는, 목적이 분명한 공격.

‘젠장!’

속으로 욕을 뇌까린 결이 말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상대로 숨어 있던 무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어 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여진족의 입성과 비슷하였으나 묘하게 엉성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결뿐이었다.

성조 역시 그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다.

“여진족이 아니야……. 설마.”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성조가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장군을 지켜라! 놈들을 막아!”

하지만 보통 실력들이 아닌지, 그들은 귀신같이 공격을 피하며 집요하게 결의 뒤를 따라갔다.

“윽!”

군사들과 함께 적들을 막던 성조가 일순 오른팔을 움켜쥐었다.

화살 하나가 그의 팔을 스치며 상처를 낸 것이다.

“한성조!”

그 모습을 본 결이 바득 이를 갈았다.

이곳에 계속 있다간 무고한 이들까지 죽거나 다칠 위험이 높았다.

결은 최대한 그들을 유인해내기 위해 군대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리……!”

그러느라 자신의 말에 단이가 함께 타고 있다는 걸 잠시 잊고 말았다.

잔뜩 겁을 먹은 그녀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결의 팔에 의지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수십여 명의 적군들이 말을 타고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단이를 다시 두고 올 수도, 그렇다고 이 위험한 길에 계속 데려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

턱에 세게 힘을 준 결은 단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말하였다.

“아무 걱정 말고 앞만 보거라.”

“나리……!”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내가 지킬 테니.”

결은 자신의 몸으로 최대한 단이를 가리며 말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들의 쫓고 쫓기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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