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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42화 (42/100)

42화

흑마가 맹렬하게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내달렸다.

앞질러 나가는 결의 뒤를 적들이 무서운 기세로 따라붙었다.

그 뒤로 결의 군사들 또한 어떻게든 결을 지키려 꼬리를 물었다.

뒤엉키는 적군과 아군의 혼돈 속.

결은 단이를 지켜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최대한 말에 박차를 가했다.

거친 산세를 헤집고 나아가느라 저들을 따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절벽이 나온다. 그전에 어떻게든 몸을 숨겨야 해.’

결은 빠르게 스치는 지형들을 눈으로 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구불구불 굽이진 길과 흑마의 빠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이들이 하나둘 뒤처지기 시작하였다.

꼬리를 문 아군의 공격 역시 한몫하였다.

그러나 허락된 운은 딱 거기까지였을까.

어느 순간 눈앞에 보이는 절벽에 결이 고삐를 세게 끌어당겼다.

몸을 비튼 흑마의 울음소리가 사납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결은 옅게 숨을 몰아 내쉬며 뒤를 살폈다.

처음보다 수가 많이 줄어 있었지만, 여전히 수십의 적군이 이쪽을 향해 활과 창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따라오던 아군 역시 그 사이 방향을 잃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만일 혼자라면 크게 어려움이 없을지도 모른다.

베이고 찢길지언정 저들을 모두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이가 함께였다.

이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지키면서 수십의 적들을 모두 상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대체 어찌해야…….’순간 단이를 안은 팔 밑으로 가는 떨림이 느껴졌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것인지 내쉬는 숨결 역시 파르르 떨려왔다.

두려운 것이겠지.

이미 칼날의 서늘함을 알아버린 이 아이에게 저들이 쥔 검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녀를 다른 이에게 맡겼을 텐데.

하지만 후회한들 이미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은 단이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 아이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고 싶었다.

나 하나쯤 죽더라도.

“단도를 꺼내거라.”

“다, 단도요……? 네!”

결은 적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안고 있던 팔을 풀어 단이를 말 등에 바짝 엎드리게끔 하였다.

그러곤 그녀의 손에 단도와 고삐를 쥐여 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진 절대로 고개를 들지 말거라.”

“나리……!”

“여의치 않다 싶으면 발로 말의 옆구리를 차거라. 영민한 놈이니 안전한 곳으로 달아날 것이다. 놈들이 가까이 다가오면 단도를 아무렇게나 휘두르고.”

“저 혼자 어찌 가요. 나리는요……!”

단이는 울먹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결은 그런 단이의 손을 힘 있게 잡아주었다.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듯.

“너 하난 내 반드시 지켜내마.”

“…….”

“무슨 일이 있어도.”

“나리!”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마지막 목소리를 흘린 결이 홀로 말에서 내렸다.

스릉.

등에서 적운검을 빼어든 그가 단이 앞을 막아선 채 적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날 서린 눈매가 당장이라도 적들을 벨 듯 노려보았다.

무사들 역시 말에서 내려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제대로 훈련을 받은 자들이다.’검을 쥐는 자세만 봐도 한눈에 그들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적들 가운데 우두머리처럼 있는 사내에게로 향했다.

“사주를 받은 것이냐.”

우두머리가 짧게 헛웃음을 쳤다.

한쪽 뺨을 길게 가로지른 흉터가 말려 올라간 입꼬리로 인해 어그러졌다.

“살아생전 원한 받을 일이 많았나 보군 그래. 그런 것부터 묻는 걸 보면.”

“지은 죄가 무서워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는 있지.”

“…….”

“너의 주인처럼 말이다.”

그 말에 우두머리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다.

배후가 누구인지 이미 아는 듯한 말이었다.

우두머리는 목을 모로 기울이며 말하였다.

“그저 얌전히, 있어야 할 곳에 머물며 살았으면 가늘게나마 명줄을 이었을 것을.”

“여기서 나를 죽일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시리게 빛났다.

“감히, 건방지게.”

한순간 달라진 공기의 흐름에 무사들이 더욱 긴장하였다.

우두머리 역시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네가 내 얼굴을 본 이상, 너는 절대로 이곳을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말이 길다.”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것 없는 싸움이었다.

결은 적운검을 다시 고쳐 잡으며 자세를 취하였다.

“덤벼라. 내 오늘 너희들에게 한 수 가르쳐줄 터이니.”

함부로 내뱉은 자신감이 아니라는 건 평생 검을 쥐어온 자들이기에 곧장 알 수 있었다.

이미 죽음까지 각오한 이들이라.

“죽여라!”

우두머리의 명령에 무사들이 한꺼번에 결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챙, 촤악!

맞부딪치는 검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사방에서 거칠게 날아오는 공격엔 일말의 틈도 없었다.

하지만 결은 뛰어난 실력으로 공격들을 막아내며 도리어 반격을 가했다.

아무리 수적으로 열세라 하더라도 실력으론 절대 뒤지지 않는 터라.

“으악!”

적운검은 무서운 기세로 피를 흩뿌리며 적들을 하나둘 쓰러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득달같이 덤비던 그들도 어느 순간 결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우두머리까지 합세하였으나 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촤악!

그때, 적운검이 아슬아슬하게 우두머리의 가슴팍을 스쳐 지나갔다.

“……!”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인 낯익은 문신에 결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칼날 같은 톱니, 그 가운데 자리한 용.

분명 일전에 자신을 습격했던 자객의 것과 똑같은 문신이었다.

결의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챈 우두머리가 재빨리 문신을 가렸다.

“저 계집을 노려! 틈을 만들란 말이다!”

그 명령에 무사들이 단이가 있는 흑마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앞을 쉽게 내어줄 결이 아니었다.

그는 단이로 향하는 길에 단 한 걸음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탓에 싸움은 더욱 거세어졌다.

“흐윽, 윽…….”

그 사이, 말 등에 꼭 붙어 엎드린 단이는 결이 쥐여 준 고삐와 단도를 손에 쥔 채 흐느끼고 있었다.

허공을 찢을 듯한 매서운 칼 소리와 비명 소리가 그녀의 귀는 물론이고 마음까지 어지럽히고 있었다.

두려움보다 더 깊은 건 결이 다칠까 걱정되는 마음이었다.

고개를 들어 결이 무사한지 보고 싶었지만, 그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말라 하였으므로 애써 몸을 더 웅크렸다.

지금은 방해가 되지 않도록 쥐 죽은 듯 있어야만 했다.

자신이 그의 약점이 될 것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내가 없었더라면…….’소리만으로도 결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전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에게 큰 짐이 된 것만 같아 괴로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성조와 진위가 군대를 끌고 이쪽으로 와주기를.

결을 지켜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꺄악!”

갑자기 흑마가 심하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버티지 못한 단이가 그만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읏……!”

심한 충격과 함께 눈앞에 보인 건 바닥에 박힌 단도였다.

누군가 이쪽을 향해 단도를 던졌고, 그것에 흑마가 놀라 흥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단이에겐 날뛰는 흑마를 잠재울 만한 능력이 없었다.

한순간 벌어진 틈에 적들이 성난 벌 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윽……!”

황급히 이쪽을 향해 달려온 결이 가까스로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러나 싸움이 지속될수록 그의 몸은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결의 발은 절벽 바로 앞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나리……!”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막아내던 결이 단이의 절박한 외침에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물러날 곳조차 없을 만큼 밀려나 있었다.

그 뒤론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한눈팔 정신이 있나 보지!”

우두머리가 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간신히 적운검으로 공격을 막아낸 결이 양손으로 검을 버텨내었다.

그러나 위태롭게 흔들리던 검은 점점 결 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적들을 홀로 상대하느라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탓이었다.

“나리…….”

뒤에서 흐느끼는 단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이 역시 물러설 곳이 없어 결의 등을 받친 채 겨우 까치발로 버티고 있었다.

결은 최대한 힘으로 버티며 뒤를 살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깎아지른 비탈이 보였다.

만일 떨어진다면 시신조차 수습하기 어려울 만큼 위험할 터.

승리를 예감한 우두머리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잔머리 굴릴 생각 마라. 어차피 다 소용없는 짓거리다.”

검을 거둔 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제안 아닌 제안을 하였다.

“네가 순순히 여기서 죽어준다면, 그 계집만큼은 살려주겠다.”

“…….”

“어찌하겠느냐. 죄 없는 계집은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

결은 제 뒤에 있는 단이의 손을 잡으며 우두머리를 노려보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 버티는 건 저 우두머리의 말대로 헛된 일에 불과했다.

끝까지 버티다 단이와 함께 죽느냐.

아니면 제 목숨을 내어주고 단이를 살리느냐.

“…….”

이를 악다문 결이 적운검을 검집에 꽂았다.

그러곤 등 뒤에 있던 단이를 천천히 앞으로 이끌었다.

그 모습에 우두머리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잘 생각하였다. 너 하나만 죽으면 모든 게 깔끔하게 끝날 일을…….”

하지만 그건 우두머리의 착각이었다.

결은 단이를 끌어당겨 제 품 안에 가두었다.

“너희를 믿느니, 차라리 내 몸으로 이 아이를 지키겠다.”

“뭐?”

결은 두 팔로 단이의 머리와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품에 안긴 그녀의 얼굴을 눈에 깊이 담았다.

‘걱정 말거라. 너를 지키겠단 약조는 변치 않으니.’물빛으로 아른거리는 눈망울을 마주하길 잠시.

그는 몸을 던져 가파른 절벽 아래로 순식간에 떨어졌다.

“이런, 제기랄!”

우두머리가 재빨리 달려와 아래를 보았다.

하지만 결과 단이는 절벽에 난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장, 밑으로 내려가 놈을 찾을까요?”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뼈도 추리기 힘들 것이다.”

우두머리의 눈매가 가늘게 늘어졌다.

“몇 명만 추려서 놈의 시신을 찾게 하고, 우리는 이곳을 정리하고 이만 철수한다. 혹여 군대가 쫓아온다면 지체 말고 숨도록 해라. 뒤를 밟히면 골치만 아파지니.”

“예!”

곧 수하 몇이 절벽 아래로 내려갔다.

우두머리는 결이 떨어진 절벽 아래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무모한 놈…….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렵게 돌아가는구나.”

어차피 검에 죽으나 떨어져 죽으나, 네 운명은 여기까지였겠지만.

흥, 비웃음을 흘린 우두머리도 곧 발길을 돌렸다.

시린 바람이 황량한 절벽 위로 세차게 불어왔다.

***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져라!”

“예!”

성조의 명령에 군사들은 수풀을 전부 헤집어 가며 결과 단이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수천의 군사가 온산을 이 잡듯 돌아다녀도 두 사람은 쉬이 발견되지 않았다.

해는 이미 서산 뒤로 넘어가 사방이 땅거미로 뒤덮이고 있는데, 아직 작은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으니.

수풀을 헤집던 성조의 손안에서 나뭇가지가 힘없이 부러졌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이야……!’

하다못해 결을 쫓던 적들이라도 찾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그들 역시 증발한 듯 죄 보이지 않았다.

점점 더 애가 타는 마음에 이성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분명 결이라면 그깟 놈들을 손쉽게 물리치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하게 불안이 끊이질 않았다.

아마 단이가 결과 함께 있던 탓이리라.

누군가를 지키며 홀로 싸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여기 흑마가 있다! 장군의 말이다!”

그때, 한 군사의 외침에 성조가 재빨리 뛰어갔다.

그곳엔 결의 흑마가 곳곳에 생채기를 입은 채 홀로 서 있었다.

성조는 고삐를 붙잡고 추궁하듯 물었다.

“네 주인은 어디에 있고 너만 이리 있느냐!”

하나 말할 줄 모르는 짐승에게 물어봤자 얻을 수 있는 답은 없었다.

고삐를 쥔 손이 하얗게 질리며 파르르 떨렸다.

성조는 울분을 삼키며 답답한 가슴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흑마 혼자서 멀리 오진 않았을 것이다. 이 일대를 더욱 샅샅이 살펴라!”

“예!”

성조는 흩어지는 군사들을 보며 고삐를 더 세게 쥐었다.

“제발, 제발 무사히만 있게나……. 제발!”

간절한 바람이 바람을 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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