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으음…….”
갈라진 신음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단이는 천 근 같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온 세상이 암흑에 덮인 것처럼 온통 어두컴컴하였다.
몸은 물먹은 솜인 양 무거워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단이는 답답한 가슴에 숨을 집어넣으려 애썼다.
하지만 숨통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엄청난 통증도 함께였다.
“콜록, 콜록……! 허억, 헉…….”
연신 기침을 터트리자 뒤늦게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허겁지겁 숨을 집어삼킨 단이는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에 다시 한번 억지로 힘을 주었다.
처음엔 눈이 어둠에 익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몇 번 더 눈을 깜빡이자, 차츰 희뿌연 시야가 선명해지며 주위의 윤곽들이 눈에 들어왔다.
앞을 가로막은 바위벽과 사방을 둘러싼 풀과 덩굴들, 바닥에 흩어진 무수한 나뭇가지와 나뭇잎들.
손끝에 닿은 축축한 흙의 감촉.
그리고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계곡 소리가 단이의 감각을 하나둘 일깨웠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단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문득 느껴지는 이질감에 아래를 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나리!”
단이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와 허리를 감싸고 있던 결의 팔이 뒤늦게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행여 놓치기라도 할까,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도 있는 힘껏 그녀를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자객들을 피해 결과 절벽에서 떨어졌던 것이 생각났다.
“나리, 정신 좀 차려보시어요. 나리, 나리!”
단이는 결의 몸을 흔들며 애타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인지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더 불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철갑으로 만들어진 갑옷은 곳곳에 금이 가 깨져 있었고, 투구와 적운검 역시 저만치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굳게 감긴 눈꺼풀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나리……. 나리, 제발……!”
두려움이 파도처럼 덮쳐와 단이의 온몸을 잠식해 버렸다.
두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결의 얼굴까지 적셨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러고 있던 걸까.
하루가 지났는지, 이틀이 지났는지, 아니면 고작 몇 다경밖에 지나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끅끅거리며 울던 단이의 머릿속에 어떻게든 결을 이곳에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은 단이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늘에 닿을 듯 끝이 보이지 않는 바위벽, 그리고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평평한 바닥이 있는 걸로 보아 이곳이 절벽의 맨 아래인 듯했다.
그들 주변엔 부러진 나뭇가지의 잔해들도 널려 있었다.
떨어지는 동안 나뭇가지에 걸리고 걸려 그나마 충격이 덜해진 것 같았다.
‘나리께서 나를 안고 계셔서 나는 이리 안전할 수 있었던 거고…….’내가 없었더라면 나리께서 더 쉽게 적들을 물리치셨을 텐데.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실 일은 없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모든 게 다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다시금 눈물이 범람하여 단이의 눈앞을 가렸다.
“흐윽, 흐……. 나리, 제발 눈 좀 떠보시어요. 나리…….”
흐느낌 섞인 목소리가 서럽게 결을 불렀다.
그런데 그때.
죽은 듯 굳어 있던 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려왔다.
“나리, 나리! 정신이 드시어요? 나리!”
그 찰나의 움직임을 본 단이가 필사적으로 결을 불렀다.
하지만 정신이 돌아온 건 아닌지 결은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통증이 극심한지 그의 미간이 괴롭게 구겨졌다.
잇새로 새어 나온 나지막한 신음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할퀴었다.
단이는 결의 얼굴을 감싸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괜찮습니다, 나리. 제가 계속 곁에 있을 것이어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어요. 그러니 조금만 버텨주시어요…….”
단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식은땀 흐르는 이마를 닦아주었다.
생채기로 엉망인 손바닥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열이 너무 심해.’혹 떨어지면서 심하게 다치신 걸까.
결의 몸 곳곳을 살피던 단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깨진 갑옷 사이로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단이는 낑낑거리며 결의 갑옷을 벗겨내었다.
그러자 허리께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으로 떨어지며 나무에 몇 번 걸리는 사이,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은 듯하였다.
“어떡하지. 지혈, 지혈을 해야 하는데…….”
황망하여 어쩔 줄 몰라 하던 단이의 눈에 자신의 해어진 저고리가 들어왔다.
품이 큰 옷이라 충분히 상처를 싸맬 수 있을 것 같았다.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단이는 곧장 저고리를 벗어 그것을 길게 찢기 시작했다.
천으로 겨우 가슴과 배만 가려 어깨와 겨드랑이가 훤히 드러나게 되었지만, 지금은 결의 상처를 지혈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찢은 저고리를 길게 연결한 뒤 결의 상처 위로 둘렀다.
몇 번 겹겹이 두르고 단단히 매듭을 묶으니 다행히 흘러나오던 피가 어느 정도 멎었다.
하지만 안도하기엔 일렀다.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숲속은 겨울만큼 추웠고, 언제 어디서 산짐승이 나타날지 몰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금.
결을 지킬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란 생각에 단이는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결의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운 터라.
제 몸보다 두 배는 큰 결의 몸을 꼭 끌어안고 있던 단이는 열을 식힐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맞다, 계곡!’단이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귀를 기울였다.
소리의 크기로 보아 그리 먼 곳에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나리, 조금만 기다리시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나뭇잎을 수북이 쌓아 그 위에 결의 머리를 누인 단이는 상처를 매고 남은 너절해진 저고리를 들고 계곡으로 향했다.
계곡은 예상대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단이는 차가운 계곡물에 손이 어는 줄도 모르고 저고리를 푹 담갔다.
그러곤 결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정성스럽게 그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차가운 천이 지나가는 곳마다 송골송골 맺혀 있던 식은땀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단이는 몇 번이고 계곡을 왔다 갔다 하며 결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다행히 그녀의 정성이 통한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펄펄 끓는 듯하던 열도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한시름을 놓았다는 안도감 덕분일까.
잊고 있던 추위가 턱이 덜덜 떨려올 만큼 밀려왔다.
이 순간 단이가 할 수 있는 건 결의 커다란 몸을 안아 미약한 체온이나마 나누는 것이었다.
미칠 듯한 두려움 속에서 그녀가 붙잡은 건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결의 숨결이었다.
어떻게든 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를 버티게 하고 있었다.
그가 온몸을 내던져 자신을 구해줬던 것처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이의 체온은 더욱 떨어졌고, 희망은 옅어져만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갈증 또한 목 안을 뜨겁게 만들었다.
‘목이 너무 말라…….’고민하던 단이는 결의 이마에 젖은 천을 올려두고 다시 계곡으로 향했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니 비로소 몸이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하아…….”
긴 한숨을 내뱉은 단이가 흐르는 계곡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리께서도 계속 차를 드시지 못했잖아.’조금 전 보았던 결의 입술 역시 탈수로 인해 말라 있었다.
나 혼자만 이렇게 목을 축여도 괜찮은 걸까.
뭐라도 마시게끔 해드려야 할 텐데.
하나 이곳엔 차도 없었고, 차를 끓일 만한 다구들도 없었다.
마실 수 있는 건 오로지 이 계곡물뿐.
“…….”
계곡물을 바라보던 단이의 눈빛이 점차 한 가지 생각으로 굳어졌다.
오래전, 처음 한양으로 향할 적에 입으로 그에게 물을 마시게 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때처럼 결이 물을 마실 거란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그때와 달리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라, 그 몸으로 발작을 일으킨다면 더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지금은 뭐라도 해 봐야 해.’단이는 결심한 듯 계곡물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
결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그는 여전히 사경을 헤매듯 괴로운 표정으로 앓고 있었다.
자세를 낮춘 단이가 결의 상체를 안아 일으켰다.
‘제발, 한 모금만이라도 삼켜주시어요.’속으로 간절히 빈 단이가 조심스럽게 결에게 입을 맞추었다.
거칠어진 입술 틈을 벌린 그녀는 천천히 그 안으로 머금었던 물을 흘려보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저주가 이 작은 일탈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기적은 이번에도 단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결이 그녀가 흘려보낸 물을 받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혀끝으로 조금씩 흘리는 물에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단이는 결에게 더욱 입술을 밀착시켰다.
해갈되는 갈증에 결의 반응도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렇게 몇 번이고 계곡과 결 사이를 오간 단이가 이윽고 마지막 물을 결의 입속으로 흘려보냈다.
그 순간.
“나리……?”
단이의 손목 위로 결의 온기가 덮였다.
마지막 동아줄을 잡듯 손목을 그러쥐는 힘에 단이가 놀라 결을 내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 아래로 검은 눈동자가 희미하게나마 빛을 보였다.
“나리! 정신이 좀 드시어요?”
초점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눈동자는 마치 어둠 속에서 유일한 빛을 따르듯 단이에게 향하고 있었다.
놓으면 사라질까,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끌어내어 단이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듯하였다.
“괜찮아요, 나리. 아무 걱정 마시어요. 성조 나리와 진위 나리께서 곧 저희를 찾으러 와줄 것이어요.”
누구보다 무서울 텐데도, 단이는 결을 안심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속삭였다.
꿈결처럼 그런 단이를 바라보던 결이 팔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떨리는 손길이 그녀의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나리…….”
단이는 그 손에 얼굴을 기대었다.
순간 가슴이 저릿할 만큼의 짙은 감정이 동시에 두 사람의 가슴을 적셨다.
저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불가항력의 감정이었다.
얽혀든 시선이 점차 가까워졌다.
누가 먼저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두 입술이 틈 없이 포개어져 있었다.
결이 단이의 입술을 깊이 머금었다.
더 이상 흘러올 물도 없는데, 그보다 더 달콤한 것을 마시는 것처럼.
마치지 못한 해갈일까.
전하지 못한 진심일까.
어쩌면 이제껏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흐트러진 이성을 틈타 멋대로 튀어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기엔 너무나 거짓말 같은 입맞춤이었다.
단이조차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기 힘들 만큼.
찰나처럼 느껴질 만큼.
애타게 서로를 찾던 입술이 다시 멀어졌다.
천천히 단이를 놓아준 결이 또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굳은 입술을 움직였다.
“미안……하다.”
너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여서.
이리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서.
채 잇지 못한 말들이 눈빛으로 전해졌다.
단이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꾹 참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아니어요. 그런 말씀, 흑……! 하지 마시어요…….”
한마디 한마디가 아프게 목을 긁으며 나왔다.
눈물이 목구멍을 꽉 막은 것처럼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혹여 결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단이는 그의 손에 얼굴을 깊이 묻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만 버텨주시어요.”
“…….”
“저랑 무사히 한양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흑, 약조해 주시어요.”
제발, 제발…….
하지만 결은 더 이상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는지, 더없이 애달픈 눈으로 그런 단이를 바라보기만 하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더욱 애틋하게 얽매였다.
지독한 절망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힘겹게 단이를 바라보던 눈이 이내 스르륵 감겼다.
“나리, 나리……!”
놀란 단이가 울부짖던 그때.
“찾았습니다! 장군께서 저기 계십니다!”
횃불의 불빛과 함께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왔다.
조선의 군사가 드디어 결과 단이가 있는 곳을 찾아낸 것이다.
군사의 외침에 곧 다른 이들도 이쪽을 향해 내려왔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절벽 아래로 내려온 성조는 두 사람의 처참한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선 끝에 단이의 헐벗은 어깨가 들어왔다.
널브러진 천의 잔해로나마 그간의 행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에서 뜨겁게 울컥하였다.
“…….”
성조는 재빨리 제가 입고 있던 철릭을 벗어 단이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가냘픈 몸이 철릭 안에 완전히 폭 감싸였다.
성조의 등장에 긴장이 풀렸는지, 단이가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서결 나리께서, 흐윽, 나리께서…….”
“이제 걱정 안 하여도 된다. 내가 왔으니.”
성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며 말하였다.
그 말에 단이는 결을 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뚝뚝 눈물을 흘렸다.
끔찍했던 그들의 새벽 위로 붉은 동이 터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