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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45화 (45/100)

45화

결의 회복 속도는 놀라우리만치 빨랐다.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고작 나흘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상태를 살핀 의원 역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기력이 좋으신 줄은 알았슴지만서두……. 정말 여러모로 대단하신 몸임메다.”

“이제 회복이 되고 있는 것인가?”

“회복되는 게 뭐겠슴둥. 당장 말을 타셔도 될 정도지비, 허허.”

의원은 제 평생 이리 회복이 빠른 몸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였다.

상처를 도로 감싸고 옷을 갖춰 입은 결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부터 바로 수색에 나서도록 하지.”

“괜찮겠는가? 다른 이상이야 없다 하였지만, 아직 몸이 온전치 않지 않은가.”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결은 여전히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성조를 향해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할 테니 너무 걱정 마라. 나도 무모하게 몸을 혹사시키진 않을 테니.”

“……자네가 그렇다면야. 내가 더 말릴 수는 없겠지.”

막사 밖으로 나오니 이미 수색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흑마에 올라 그들을 데리고 떠나려는데, 순간 목소리 하나가 결을 붙잡았다.

“나리!”

뒤를 돌아보자 채비를 마친 단이가 보였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데려가 주시어요.”

“위험하다. 넌 이곳에 남아 있어.”

“뭔가를 찾으시는 거라면 손 하나라도 더 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분명 제가 도움이 될 것이어요.”

곡우(穀雨) 때마다 왕 노인과 산이며 들이며 돌아다니며 일창일기를 따오던 그녀였다.

구석구석 헤집고 찾아다니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하지만 결은 쉽게 허락을 내리지 않았다.

“아직 놈들이 근처에 있을 수도 있다. 무슨 일을 또 겪게 될 줄 알고.”

“그래도 괜찮아요. 나리께 그때처럼 방해가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어요.”

“…….”

“약조 드릴게요, 나리…….”

단이는 애처롭게 눈을 흐리며 부탁하였다.

결이 몸을 회복하는 즉시 수색에 나서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결심한 일이었다.

전쟁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주변 일대를 수색하는 것이라면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결의 말대로 또다시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혼자 이곳에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매시간 불안함으로 피가 마르느니 차라리 험한 일을 함께 겪는 편이 훨씬 나으므로.

“안 될까요……?”

울먹이는 눈으로 한 번 더 애원하니, 결도 끝내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곳에 가면 절대로 함부로 다녀선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나리!”

언제 울먹였나 싶게 단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의 도움으로 흑마에 올라탄 단이가 이제는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체념처럼 낮게 한숨을 내쉰 결은 그녀가 조금 더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자세를 바꾸었다.

“이랴!”

내달리는 흑마에 곧 수색대가 그의 뒤를 따랐다.

***

수색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결과 단이가 발견되었던 절벽 근처에서부터 시작된 수색은 주변 일대와 산 아래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산이 워낙 광활한 데다 지형 역시 구불구불 험하였던 터라 수색은 쉽지 않았다.

어느 날은 폭우가 심하여 아예 수색에 나서지 못한 날도 있었다.

비는 하룻밤 새에 그쳤지만, 폭우로 인해 땅이 진창이 되어 더욱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싸움의 현장엔 반드시 증거가 남는 법.

그들은 구석진 곳까지 놓치지 않고 빈틈없이 수색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수색의 마지막 날.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걸까……. 뭐라도 하나 건져야 할 텐데.’단이는 지친 몸을 이끌고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가뜩이나 안 된다고 하는 결을 겨우 설득하여 따라온 길이었다.

자신을 데려가면 도움이 될 거라 호언장담하였으니, 찢긴 옷자락 하나라도 발견해야 할 것 아닌가.

단이는 몇 날 며칠 산을 타느라 뻐근해진 다리를 통통 두들겨 가며 샅샅이 주변을 찾아보았다.

‘조선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 하였는데. 혹 놓친 곳은 없나?’단이는 일부러 군사들이 수색하지 않을 만한 길을 골라 증거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 해도 이렇게 훤히 보이는 길에 뭔가를 숨겨 놓았을 리는 없었다.

‘괜히 짐만 되었다 가긴 싫은데…….’시무룩해진 단이가 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 그때.

이름 모를 들풀과 덩굴로 뒤덮인 땅 가운데, 이질적인 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단이는 조심스럽게 덩굴을 들춰보았다.

언뜻 보면 돌멩이 같기도 하고, 또 언뜻 보면 나뭇가지 같기도 한 것이었다.

“헉!”

고개를 숙여 자세히 살피던 단이가 일순 숨을 집어삼키며 제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 사람 손가락이야.’흙 아래 반쯤 파묻혀 거무죽죽하게 변한 그것은 분명 사람의 손가락이었다.

단이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비명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삼키고 눈을 질끈 감았다.

간신히 놀란 마음을 억누른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헐레벌떡 결에게 뛰어갔다.

“나리, 나리……!”

“무슨 일이냐.”

“저, 저곳에…… 사람을 묻은 것 같은 흔적이 있습니다.”

단이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며 어느 한곳을 가리켰다.

미간을 좁힌 결이 곧장 군사 몇을 시켜 그곳을 파보게 했다.

그러자 과연 결을 습격하였던 무사 중 하나가 그 밑에 파묻혀 있었다.

아무래도 폭우로 인해 흙이 쓸려나가면서 드러난 듯했다.

날 서린 눈으로 시신을 보던 결이 이내 걱정스럽게 단이를 보았다.

“놀라진 않았느냐.”

“……괜찮습니다, 나리.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단이는 굳은 입술 끝을 억지로 올리며 애써 괜찮은 척하였다.

그 어색한 미소가 결의 눈에 밟혔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을 저 때문에 보게 된 것 같아서.

결은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담아 단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하였다.”

그의 칭찬에 단이의 미소도 한결 편안해졌다.

가까이서 본 시신에 크게 놀라긴 하였지만, 그래도 결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뿌듯하였다.

“장군, 시신의 옷 속에 이런 게 있습니다.”

군사가 여러 갈래로 찢어진 종이를 발견하곤 결에게 주었다.

잔뜩 구겨지고 찢긴 데다 물까지 먹어 원래대로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 만에 간신히 종이를 맞추니, 옅은 갈색으로 중구난방하게 써진 글자들이 보였다.

투명한 무언가로 새긴 글자 주변에 흙탕물이 스며들어 글자가 드러난 모양새였다.

유일하게 선명한 건 자객의 몸에 새겨졌던 문신과 똑같은 문양의 인장뿐이었다.

‘저 문양…….’그때, 어깨너머로 그것을 본 단이가 일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시신을 찾았을 때보다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결과 성조 모두 종이에 집중하고 있어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뭐라고 쓰여 있나?”

성조가 곁에서 함께 종이를 보았다.

한참 글을 읽어 내려가던 성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북향에는 신출귀몰한 짐승이 하나 있으니, 혹여 발견하거든 덮어서 잘 감추어 주면 은혜를 알고 살봉향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게 뭔 소리인가?”

몇 번을 읽어보아도 바뀌는 건 없었다.

혹 물에 젖어 일부 먹물이 지워졌나 싶었지만, 애초에 먹으로 쓰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내용을, 굳이 먹이 아닌 걸로 써서 숨겼다.’결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글자들을 모두 머릿속에 새긴 결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암어다.”

“암어?”

“그래. 파자(破字)를 하였거나, 아니면 규칙을 따로 두어 읽는 법을 다르게 했을 것이다.”

그 말에 성조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것 아닌 내용을 이렇게 번거로운 방식으로 읽게 한 데에는 분명 숨겨놓은 다른 뜻이 있을 터.

이들을 보낸 배후의 밀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건 가져가서 마저 해석해보도록 하지. 최대한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걱정 말게.”

결이 종이를 품에 갈무리하고 뒤돌아섰다.

그런데 바로 뒤에 서 있던 단이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안 좋아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늘.

역시 억지로 괜찮은 척을 했던 걸까.

아무래도 부패가 진행된 탓에 보통 사람이 보기엔 적잖이 충격이었을 것이다.

“많이 안 좋은 것이냐.”

걱정을 내비치니, 단이가 흠칫 어깨를 떨며 겁에 질린 얼굴로 결을 올려다보았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오라…….”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달싹이던 입술이 이내 잇새에 꾹 짓이겨졌다.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아니어요. 그냥, 조금 놀라서…….”

어딘가 이상했지만 더 이상 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시신의 끔찍한 모습 때문에 놀란 것일 수도 있으니.

“밀서도 발견하였고, 해도 지고 있으니 이만 수색은 끝내도록 하지.”

단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결은 결국 진영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하지만 진영으로 돌아와서도 단이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에 그리 잠겼는지.

차를 준비하러 가다 한참이나 멍하니 멈춰 선 그녀를 성조가 발견하기도 하였다.

“어이, 다동. 예 가만히 서서 무엇 하는 게냐?”

“예? 아…… 이것들을 씻어야 해서…….”

허둥거리며 바구니에 담긴 차제구를 보이는 얼굴엔 어쩐지 당황이 가득하였다.

수색 때 시신을 봐서 이리 황망해하는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하지만 내내 함께하였던 성조가 기억하기론 증거를 찾은 일 외엔 별다른 일이 없었던 하루였다.

그래도 단이를 혼자 개울에 보내기엔 걱정이 되는 터라.

“함께 가자. 나도 마침 손이나 좀 씻으려던 참이니.”

성조는 개울가까지 단이를 데리고 갔다.

그러곤 단이가 말릴 새도 없이 그녀 옆에 앉아 함께 차제구를 씻었다.

“혼자 하여도 괜찮습니다.”

“나도 괜찮다. 이리 도와야 빨리 네 차를 마실 수 있을 것 아니냐.”

오늘은 말싸움할 기력도 없는지, 단이는 별다른 말대꾸도 없이 개울물에 손을 담갔다.

그러다 또 넋을 잃고 멍하니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단이를 걱정스럽게 보던 성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원래 처음엔 다 그렇다.”

그는 단이의 손에 들린 찻잔을 가져가 대신 씻어주며 말을 이었다.

“보지 않아도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고, 속도 이상해지고, 심하면 한동안 꿈에서도 나오지.”

물기를 털어낸 찻잔을 바구니에 엎어 넣고서 성조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잊는 것만이 널 위한 최선이니.”

“…….”

“오늘 네가 겪은 일 중, 너의 잘못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만 기억하거라.”

진심이 담긴 조언이었다.

이윽고 단이의 눈동자가 성조에게 향하였다.

복잡한 생각이 틈도 없이 가득 얽혀 있는 눈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단이는 한참 만에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성조 나리께서는…… 알려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을 숨기고 싶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알려야 하는데 숨기고 싶다라…….”

단이의 말을 되풀이한 성조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두 눈빛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사실을 알림으로써 네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운 모양이로구나.”

정곡을 찔렀는지 단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성조는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는 일이더냐?”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그럴 것이어요.”

“그럼 말해야지.”

간단명료하게 돌아온 답에 단이가 더욱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맑게 흐르는 개울물 위로 그녀의 심란한 얼굴이 비쳤다.

“그걸로 미움을 받게 된다면…… 전 어떡하지요.”

“무슨 일인데 그리 걱정인 것이냐.”

“그것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단이는 끝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스로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말들이 입안에 엉킨 까닭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만 돌아가요. 서결 나리께서 기다리시겠어요.”

단이는 차제구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여 미움을 받게 된다면 말이다.”

바구니는 곧 성조의 손으로 옮겨갔다.

옆을 보자 성조가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땐 나에게 오거라.”

“…….”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미워하지 않을 것이니.”

내가 너의 편이 되어 주겠다는 듯.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무엇을 희생하더라도.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가져온 산차 좀 마시자꾸나. 아주 며칠째 거친 엽차만 마셨더니, 이거, 이거 봐라. 내 혓바늘이 돋지 않았느냐. 하루라도 고급차를 마시지 않으면 내 이리 혓바늘이 나거늘…….”

성조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가까이 다가와 붉은 혀까지 날름 내미니.

잠시나마 뭉클했던 가슴에 찬물이 확 끼얹어졌다.

단이는 미간을 구기며 콧김을 흥 내뿜었다.

“어림도 없습니다. 나리께서 가져오신 산차는 우러나는 색이 옅어, 서결 나리께서 드시지 못한다고 몇 번을 말씀드렸잖습니까.”

“그럼 나만 따로 끓여다오. 엽차는 이제 더는 못 마시겠다.”

“드시지 마시어요. 저도 입 하나 줄면 편하지요.”

“어찌 그리 매정하게 내친단 말이냐? 내 기껏 함께 개울까지 와주었거늘.”

“하여튼, 나리께서는 잘 가시다가 꼭 이렇게 삼천포로 빠지시어요.”

“어? 잠깐. 그 말인즉, 방금 내 말에 감동을 받았다, 이 말이냐? 하하하! 역시, 내 원래 여인네들 마음 위로하는 데엔 일등이니라.”

“……말을 말지요.”

단이는 약이 잔뜩 올라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 누르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풀 죽어 축 처져 있는 것보다는 이리 불퉁하게 나오는 게 보기 나은지라.

“그래. 너는 아무 말 말거라. 이 밤은 나 혼자 떠들어도 즐거우니.”

성조는 싱긋 웃으며 단이와 나란히 길을 걸었다.

이 아이의 고민이 조금은 옅어졌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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