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갑작스러운 습격과 수색으로 며칠 멈추었던 군대는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예기치 못한 습격에 다들 놀라긴 했어도 개선(凱旋)의 기쁨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승전고를 울리며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모두가 기뻐하였다.
하여 군사들은 처음 전쟁터로 향할 때와 달리 빠르고 힘차게 한양으로 나아갔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한양에 모두가 들뜬 사이.
“…….”
단이는 홀로 속을 끓이며 기쁨을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종종 결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다가도 이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수그렸다.
필시 무언가 할 말이 있어 그러는 것이건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하니, 두 눈엔 수심이 가득하고 입술은 바짝 마르기 일쑤였다.
매양 단이를 살피는 결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한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묵는 마을에서도 단이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운 터라.
마지막 차를 비우고 잔을 내려놓은 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예?”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단이가 커다래진 눈으로 결을 보았다.
방 안엔 모처럼 둘뿐이라.
무언가를 말하기엔 지금이 적기였다.
“내게 할 말이 있는 듯한데.”
“그것이…….”
“솔직하게 말하거라. 네가 괜한 일로 그리 걱정할 아이가 아니란 걸 아느니.”
그 말에 단이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며칠을 고민하여도 아직까지 답을 내리지 못하던 문제였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찌하여 그 문양이 적군이 지니고 있던 종이에 있었던 것인지.
이제껏 숨겨 왔던 비밀을 알리게 된다면 이제 자신은 어찌 되는 것인지.
그 무엇도 답을 내릴 수 없어 단이는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나리.”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는 문제였다.
처음 결의 다비가 될 때부터 다짐하지 않았는가.
그의 신임을 얻을 것이라고.
나의 목숨을 이분께 맡기겠다고.
“나리께선, 저를 얼마나 믿으시어요?”
의미심장한 물음에 결의 눈빛이 짙게 물들었다.
부유하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단이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럼에도 단이는 말을 무르지 않고 재차 그에게 물었다.
“저를, 믿으시어요?”
도박이었다.
설령 믿지 않더라도 이 순간엔 믿는다고 거짓을 말할 테니.
그럼에도 이것을 묻는 건, 그저 허울뿐인 명분이나마 손에 쥐고 싶어서였다.
두려움에 흔들리는 나를 다잡을 명분.
나를 믿는다고 말해주는 당신에게 내가 가진 비밀을 말하기 위한 명분.
당신에게, 나를 내걸 명분.
“믿는다.”
그런 단이에게 결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을 내주었다.
“네가 너 자신을 믿는 것보다, 더 많이 너를 믿는다.”
단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저 믿는다, 그 한마디면 될 것을.
결은 굳이 보태지 않아도 될 말을 자신의 진심과 함께 담아 건넸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그녀의 가슴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고민하던 지난 며칠이 부질없다 느껴질 만큼.
꼭 주먹을 말아 쥔 단이가 결심 어린 눈으로 결을 마주 보았다.
“한양에 돌아가면, 나리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직접 보여드리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약조 드리어요. 그러니…… 하루만 더 기다려주시어요.”
차마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
단이는 하루의 시간을 더 연장하였다.
이전처럼 피하기 위한 시간이 아닌, 그에게 비밀을 밝히기 위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아주 위험할지도 모를 비밀을.
***
한양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 땅거미가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시각이었다.
하지만 악랄한 오랑캐를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 개선(凱旋) 부대의 귀환에 도성 사람들 모두가 거리로 나와 그들이 나아갈 길을 밝혔다.
호롱과 횃불로 밝힌 길은 대낮보다 밝았고, 백성들의 환호성은 군대의 나각 소리와도 같았다.
두 팔을 높이 든 백성들은 한껏 기뻐하며 돌아온 서결 장군을 환영하였다.
함성은 온 도성을 뒤덮으며 경복궁까지 닿았다.
미리 전령을 받아 궁궐 역시 온 빛을 밝히고 있던 차였다.
마침내 결이 장수들을 이끌고 광화문을 넘어 이선의 앞으로 다가왔다.
엎드려 사배를 올리는 그들을 이선은 못내 감격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절을 마친 결이 예를 갖추어 말하였다.
“소장 서결, 전하께서 하명하신 오랑캐 정벌을 마치고 돌아왔사옵니다.”
“내 그대를 믿었다. 이리 대승을 거두고 돌아올 것을 굳게 믿고 있었어.”
결을 북방으로 보내고서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한 이선이었다.
이번 정벌에서의 승패는 비단 오랑캐만의 문제가 아닌, 남준백과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결은 완벽한 대승을 이루었고,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준백은 패하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결의 부대가 승리하고 한양으로 오고 있단 전령이 왔을 때부터 준백의 얼굴은 내내 흑색이었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그대 때문에 나의 사람을 잃지 않을 것이다.’이선은 그리 다짐하며 다시 결과 장수들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를 열고 싶었다.
하나 시간이 늦은 데다 먼 길을 돌아온 이들을 오래 붙잡을 수는 없었다.
이선은 기쁜 마음을 누르며 자리에 참석한 이들에게 말하였다.
“서결 장군을 위한 개선식을 곧 성대히 열 것이니, 그대들은 한뜻으로 준비에 임하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이선의 어명에 문무백관들이 모두 엎드려 그의 뜻을 받들었다.
그 가운데, 대나무를 꺾듯 허리를 숙인 준백이 바득 이를 갈았다.
독사와 같은 눈이 결의 얼굴을 찌를 듯 노려보았다.
‘서결……. 제 아비와 다르게 목숨 한번 질기구나.’그곳에서 죽었더라면 더 이상 더러운 꼴은 보지 않았을 것을.
기어이 돌아와 감히 제 심기를 다시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 질긴 악연을 어찌 잘라내어야 할까.
악심으로 결을 주시하던 찰나.
돌아서던 결이 그런 준백의 시선과 마주쳤다.
“…….”
결은 시린 눈으로 준백을 응시하였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와 독기 어린 눈동자가 만나니, 보이지 않는 폭풍우가 둘 사이를 가르는 듯하였다.
오가는 말은 없었으나 마주한 눈빛 속엔 품고 있는 뜻이 명확하였다.
이 질긴 악연을 반드시 끊어내고야 말겠다고.
그 끝이 둘 중 하나의 목숨 값이라는 것도.
말없이 준백을 보던 결은 그대로 몸을 돌려 경복궁을 나섰다.
두 사람의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결이 궐로 향한 사이.
먼저 집에 돌아온 단이는 짧게 목욕을 마친 뒤 곧장 제 방으로 향하였다.
장을 열자 구석에 고이 놓아둔 대나무 통이 보였다.
엄마가 유일하게 남기고 갔다던 물건.
단이는 그것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누렇게 바랜 종이가 돌돌 말린 채 담겨 있었다.
조심스럽게 종이를 꺼내자 오래된 종이 특유의 낡은 냄새가 후각을 건드렸다.
낮게 숨을 내쉰 단이가 그것을 펼쳤다.
여전히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
그 아래 유일하게 새겨진 붉은색의 인장.
바로 밀서에서 보았던 그 문양이었다.
그것을 본 단이의 눈동자가 다시금 옅게 떨려왔다.
‘엄마가…… 왜 이걸 갖고 계셨던 걸까.’혹 나리를 해하려 했던 그 사람들과 엄마가 한패였던 걸까.
그래서 나를 그 먼 곳에 버려두고 떠나셔야 했던 걸까.
“…….”
단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그것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엄마가 결을 해하려 했던 사람들과 같은 패라면, 더 이상 그의 곁에 있을 수도 없게 되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엄마…….”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만 가슴에 아프게 고여 가던 그때.
“서결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밖에서 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결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다시 종이를 말아 통 안에 넣고 뚜껑을 닫은 단이는 대나무 통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이제 판단은 결의 몫이었다.
***
“어머니께서 남기고 가셨던 물건이어요.”
단이는 잠긴 목에 억지로 힘을 주어 목소리를 내었다.
힐긋 앞을 보니 결은 펼친 종이만 말없이 살필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던 빈 종이엔 옅게 갈은 먹을 칠한 덕에 글자가 드러나 있었다.
-회합의 사람들이 모여
-망자를 맞이하기 위해
-이후의 후환이 없도록 그때 말한 광대 패거리를
-모두가 뜻을 이뤄 기뻐 춤추며
편지는 그 내용이 기괴해 보일 만큼 듬성듬성 무언가 빠져 있었다.
글자들을 유심히 살피던 결의 시선이 문득 종이의 모서리로 향하였다.
언뜻 보면 아무렇지 않았지만 자세히 살피니 그 끝이 살짝 어긋나 있었다.
‘찢어진 밀서다. 누군가 편지를 반으로 잘랐어.’편지의 모퉁이엔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파도처럼 굽이진 톱니 속의 용.
그 익숙한 문양이 결의 검은 눈동자에 붉게 새겨졌다.
자객의 몸에 있던 밀서처럼 이것 또한 암어를 사용한 밀서이리라.
그것도 반으로 잘린.
한동안 아무 말도 않던 결이 종이에 눈길을 고정한 채 입술을 움직였다.
“네 어머니는 무얼 하던 이였느냐.”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굴조차…… 잊은 지 오래여요.”
그 말에 결이 눈을 들어 단이를 보았다.
서늘한 눈을 마주하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려움이 목을 틀어쥔 듯 숨이 콱 막혔다.
붉어진 눈시울 아래 눈물이 고였다.
입술을 맞다물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던 단이는 그제야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듯 제 비밀을 털어놓았다.
“잘못하였습니다, 나리. 나리께 거짓을 고하였습니다.”
“…….”
“사실 저는 조선인이 아니어요. 조선에서 가족과 함께 도망쳐 나왔다는 것도,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금세 동그랗게 맺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어릴 때 저희 어머니께서, 흑…… 저를 심 다점 앞에 두고 가셨습니다. 그 뒤로 심 다점의 주인이셨던 할아버지 손에서 쭉 자라왔습니다.”
단이는 끅끅거리면서도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할아버지께선 소싯적에 명나라 상단에 계셨고, 여러 나라의 말을 하실 줄 아셨습니다. 하여 저를 손녀처럼 키우시며, 조선말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의 말 또한 함께 가르쳐주시었습니다. 제가 일전에 포로들의 대화를 알아들었던 것도…… 흑,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그 노인에게 들은 것은 없는 것이냐.”
“할아버지께서도, 심 다점 밖에서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나가봤더니, 저 혼자 눈을 맞으며 울고 있었다 하시었어요. 흑…… 그 외에는 정말로 들은 것이 없습니다.”
울음소리에 뒤엉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단이는 최대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며 결에게 용서를 구했다.
“잘못하였습니다, 나리……. 조선인이 아닌 게 밝혀지면 저를 죽이실까 봐, 흐윽……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하였어요…….”
말을 하면 할수록 그녀를 서럽게 하는 건, 두려움이 아닌 죄책감이었다.
나를 ‘나의 사람’이라 불러주던 당신을 속여 왔다는 것이.
내가 나를 믿는 것보다 더 나를 믿는다 해주었던 당신을 실망시켰다는 것이.
“죄송합니다, 나리……. 정말로, 죄송합니다…….”
단이는 못 견디게 괴롭고 슬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였을 것을.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것이어요…….”
뒤늦게 후회해도 거짓말을 하였다는 건 돌이킬 수 없었다.
뚝뚝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그녀의 손등과 무릎이 축축이 젖어갔다.
그런 단이를 보면서 결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검게 보이는 눈동자만이 그가 고심에 잠겼다는 걸 알려줄 뿐이었다.
‘이제 나를 믿지 아니하시는 거겠지…….’
시작부터 거짓말을 한 데다 어머니의 물건에선 그를 습격한 자객의 문양이 나왔다.
이보다 더 의심스러운 정황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조차 믿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제 나리 곁에 있지 못하겠구나…….’그리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차라리 목숨을 거두는 게 훨씬 낫겠다 싶을 만큼.
하지만 결이 어떤 처분을 내리든 자신은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단이는 차마 속 시원히 울음을 터트리지도 못하고 이를 악물며 겨우 흐느끼기만 하였다.
“하여, 그리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냐.”
결이 그 말을 하기 전까진.
“하여, 너를 믿느냐 물었던 것이고.”
어쩐지 서글프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나리께서…… 왜.’후드득, 눈물을 떨어트린 단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결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결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의 엄지 끝에 밀린 눈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너를 믿었던 만큼, 너는 나를 믿지 아니하였나 보구나.”
그 위로 새로운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의 볼을 적시는 대신 그의 손등을 적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너를 절대 버리지 않을 것임을.”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녀를 품겠다는 뜻이었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 온 진심을 다하여.
그녀의 걱정이 모두 현실이 된다 하더라도.
설령 그녀의 어머니가 ‘그날’과 엮여 있다 하더라도.
“말하지 않았느냐.”
“…….”
“너는, 나의 사람이라고.”
이젠,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