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47화 (47/100)

47화

“말하지 않았느냐.”

“…….”

“너는, 나의 사람이라고.”

결은 단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까지 말끔히 훔쳤다.

“고작 이런 걸로 나의 사람을 내치진 않는다.”

그 위에 새로운 눈물이 고이면 그것 또한 지워주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렁이는 다갈색 눈동자 속에 결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하오나…….”

“편지의 주인이 정말로 네 어머니란 증거도 없지 않느냐.”

“……예?”

결이 대나무 통의 뚜껑을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 움직인 단이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대나무 통의 뚜껑엔 밀서에 새겨진 인장과는 전혀 다른 것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물결처럼 부드러이 꽃잎을 펼쳐놓은 듯한 문양이었다.

“둘 중 하나겠지.”

대나무 통에 음각된 문양 쪽의 사람이거나.

혹은 밀서에 새겨진 인장 쪽의 사람이거나.

양쪽이 서로 한패일 수도 있었으나 그 반대일 경우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확연히 다른 문양인 만큼, 아직까지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었다.

‘그래야 너에 대한 결정을 조금 더 보류할 수 있을 테니.’결은 종이를 잘 말아 다시 통 안에 넣었다.

“혹 이것의 존재를 또 아는 자가 있느냐.”

“왕 할아버지께서 알고 계셨으나 이미 돌아가셨고…… 한양에선 아무도 없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장 안에 넣어 두어 누구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단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커다란 손이 단이의 작은 손과 대나무 통을 함께 감쌌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내가 모든 걸 감춰주겠다는 듯.

“경위가 밝혀질 때까진 누구에게도 이것에 대해 말해선 안 된다. 이 대나무 통의 존재를 아는 건 너와 나, 둘뿐이어야 한다. 알겠느냐.”

그것을 본 단이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더욱 뭉클하였다.

얼마나 미움을 받게 될까, 어떤 벌을 받게 될까.

밀서의 인장을 본 뒤로 이곳에 오는 내내 그런 생각만 하느라 하루도 마음 편했던 적이 없었다.

결이 예전처럼 차갑게 볼 거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결은 자신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의심하지도 않았고, 차가운 눈을 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믿을 뿐이었다.

이토록 의심스러운 정황 속에서도, 나의 사람이라 말해주며.

“네……. 알겠습니다, 나리.”

그 순간 멈춘 듯했던 눈물이 전보다 더 크게 방울지며 떨어졌다.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을진대, 이제는 무슨 연유로 운단 말인가.

달래자마자 더욱 서럽게 우는 단이에 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우느냐. 너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느냐.”

“그냥, 안도가 되어서…… 흐윽.”

말하고 나니 더욱 안도와 설움이 뒤엉켜 북받치는 터라.

단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애처롭게 울었다.

그간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불안과 걱정이 눈물에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나리께 미움을 받을까 봐, 흑, 내쳐져서 더 이상 나리의 다비로 있지 못하게 될까 봐, 흐윽, 그게 너무 무서워서…….”

결국 요약하자면 그 두려움을 모두 뒤로하고 사실을 꺼내었다는 뜻이었고, 또 자신의 곁에 계속 있고 싶다는 뜻이었으니.

그 거짓 없는 진심이 결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는 것을 보는데 어찌 이리 마음이 몽글해질까.

어찌 이리 사랑스러울까.

“……너도 참, 못 말리는 아이구나.”

실소를 머금은 결이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단이를 품에 안았다.

가만가만 뒷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이 다정하였다.

어깨를 끌어안은 팔 또한 무척이나 애틋하였다.

결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으나, 지금 단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그것이라.

하여 결은 단이가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품에 안고 기다려주었다.

옷에 스며드는 눈물이 어느 때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

울음이 멎은 단이가 코를 훌쩍이며 붕어처럼 부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눈앞에 보이는 결의 가슴팍은 눈물 콧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망했다.’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많이 울어버렸다.

민망하여 차마 고개도 들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울음을 억지로 짜낼 수도 없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있는데, 문득 낮은 목소리가 단이의 귓가에 흘러들었다.

“그날, 절벽에서 말이다.”

단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결과 마주 보았다.

무엇을 고민하는지, 이번엔 결의 표정이 무척 복잡해 보였다.

언제나 굳건하던 눈빛 역시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러나.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곧 청천벽력 같은 질문이 떨어졌다.

“혹, 내가 너에게 입을 맞추었느냐.”

“……예?”

“접문을…… 하였느냐 묻고 있는 것이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그린 듯 선명한 기억 하나가 단이의 뇌리에 스쳤다.

갈증으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입으로 물을 흘려보내주고, 잠시 정신을 차린 결과 시선을 주고받다가…….

“…….”

입을, 맞추었던 것이.

자신이 먼저 입을 맞춘 것인지, 결이 먼저 입을 맞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혹 결이 먼저 하였다 하더라도 정말 입을 맞추려 한 것인지, 아니면 제 입속에서 물을 더 찾으려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신이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단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애타게 그 입술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이 너무도 간절하여서.

꿈만 같아서. 너무도 기뻐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아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단이가 굳은 입술을 열었다.

“물을…… 흘려보내 드린 것이어요. 예전처럼.”

“…….”

“그뿐이었어요.”

반은 진실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입으로 물을 흘려보내 준 것은 맞지만 제대로 입을 맞춘 건 그 이후였으니까.

하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함부로 또 물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허락도 없이 금기를 어겼고, 또 그의 몸에 손을 대었다.

물이야 그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곤 해도 입을 맞춘 것은 다른 문제였다.

천한 종의 몸으로 어찌 양반을 탐한단 말인가.

어찌 연심을 내보인단 말인가.

아무리 이방인이라 하여도 그런 것쯤은 단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진실은 입속에 꼭꼭 삼켜 제 가슴속에만 담아두기로 하였다.

홀로 기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며.

“그래……. 꿈이었단 말이지.”

어쩐지 힘이 빠진 듯한 음성이 바닥으로 침전하였다.

하지만 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이는 깊게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안도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말았다.

그저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만 몰두하느라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결의 두 눈에 언뜻 실망한 기색이 비친 것도.

그의 붉은 입술 사이로 허망한 숨이 흘러나온 것도.

“그래. 괜한 것을 물어 놀라게 하였구나. 방금 질문은 그냥 잊거라.”

“……예. 나리.”

단이는 방을 나설 때까지도 알지 못하였다.

***

그 밤.

성조가 전쟁터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기뻐하여 한 씨 가문은 밤늦게까지 잔치를 열고 있었다.

정회의 아내이자 성조의 어머니인 정경부인 심 씨는 온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 음식을 나누고 자리를 베풀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전쟁터로 떠나야 한단 소식을 들은 날부터 시름시름 앓던 심 씨였다.

오죽하면 정숙하기로는 도성 안 제일이라던 그녀가 남편 앞에서 아들을 말려 달라며 소리 내어 울부짖었을까.

정벌에 나선 뒤론 하루도 빠짐없이 물그릇을 뜨고 치성을 드리기도 하였다.

아들 걱정에 하루가 멀다 하고 자리보전하기 일쑤였다.

그런 아들이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혁혁한 공까지 세웠다고 하니.

지금 당장 죽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흡사 혼례라도 치른 것처럼 늦은 시각까지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심 씨는 지친 기색 하나 없이 그들을 살폈다.

“자, 준비된 음식은 많으니 많이들 드시게나.”

“감사합니다, 마님.”

손님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온 성조가 어머니 심 씨의 곁으로 왔다.

“어머니.”

“그래, 성조야.”

이미 한바탕 눈물의 재회를 하고도 여전히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은 것일까.

아들을 본 심 씨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

자신이 집을 떠나 있는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어머니의 얼굴이라.

성조가 안쓰러운 미소를 띠며 그런 어머니의 손을 맞잡았다.

“밤이 깊어 고단하실 텐데, 어머니께서는 이만 들어가십시오. 남은 자리는 제가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괜찮다. 아들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고 이리 무탈히 돌아왔는데, 어미 된 사람이 어찌 곤하겠느냐. 내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볍다.”

“농도 지나치십니다. 항아(姮娥) 선녀께서 다시 달로 돌아가려 하심을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뭐?”

예순을 바라보는 자신을 선녀라 부르니.

몇 번을 들어도 좋을 아들의 농에 심 씨는 갓 피어난 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그때, 청지기가 다가와 정회가 귀가했음을 알렸다.

“마님, 대감께서 드시었습니다.”

“너 왔다는 소식에 걸음을 서두르셨나 보다. 어서 가자꾸나.”

성조는 심 씨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막 대문을 넘어선 정회는 난데없이 열린 잔치판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대감, 오셨습니까.”

“이게 다 무엇이오, 부인.”

“성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우리 아들이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는데, 당연히 이 정도 연회는 열어야지요.”

그 말에 정회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마뜩잖은 눈초리가 심 씨의 뒤에 있던 성조에게로 향했다.

“겨우 무관 나부랭이의 뒤에만 있다가 돌아온 것뿐이거늘.”

바닥으로 깔릴 만큼 낮았으나 결코 작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그 말에 성조의 낯빛도 싸늘하게 변하고 말았다.

“대감, 그게 무슨 매정한 말씀이십니까. 우리 성조가 그 사지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그만하시오, 부인. 이건 내 체면만 더 구기는 일이오.”

“대감!”

“어떻게 해서든 네가 그놈보다 우위에 서야만 했다. 주상의 어명을 뒤엎어서라도 그놈 밑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었어!”

“…….”

“내가 널 위해 어떤 짓까지 감수했는데…….”

한심하다는 듯 성조를 보던 정회는 그대로 아들을 지나쳐 사랑채로 향했다.

그 역시 심 씨 못지않게 지난 몇 달간 속을 태웠거늘.

막상 아들을 마주하니 다시금 원과 한이 떠오른 것이다.

조정에서 모두가 멸시하고 배척하는 서결의 밑에 제 아들이 있었다.

한때 역모의 누명을 쓰고 사약까지 받은 자의 아들, 그 아들의 아랫사람으로 제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친한 벗이랍시고 함께 어울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무리 전쟁터라 하더라도 문존무비(文尊武卑) 사상이 깊이 뿌리박힌 그에게 이건 치욕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직접 몰아낸 벗의 아들이었기에.

그걸 주상이 모를 리 없었기에.

한순간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은 분위기에 심 씨가 안절부절못하며 성조를 보았다.

“성조야…….”

하얗게 질릴 만큼 꽉 말아 쥐었던 주먹이 이내 힘을 잃고 천천히 풀렸다.

성조는 굳어 있던 입가를 억지로 말아 올려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 저는 괜찮습니다.”

“…….”

“하루 이틀입니까.”

아버지께서, 저를 한심하게 보시는 게.

아비의 과오는 그렇게 아들의 죄책감과 열등감 속으로 다시 한번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

이선은 일전에 약조하였던 대로 개선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공을 세운 성조를 비롯하여 장수와 군사들에게 큰 상을 내렸고, 이들의 대승을 기리기 위하여 어려운 백성들에게 곡식을 풀기도 하였다.

정벌전에서 아버지나 아들을 잃은 가문에는 1년 동안 부역을 감면하고 쌀과 면포를 하사하여 그 마음을 위로하였으니.

이선이 이번 정벌에 얼마나 큰 의미를 두고 있었는지 온 나라가 알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번 전쟁을 대승으로 이끈 본장이 결이었으니.

이선은 그의 공을 크게 치하하여 특진을 명하였다.

“하여 서결 장군에게 정3품 상계 절충장군 품계를 하사하는 바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결이 무산계 최고 품계인 절충장군에 오른 것이다.

무신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정상에 올랐으니, 장수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모두가 승리에 취하여 기뻐하는 가운데.

‘겨우 오랑캐 하나 변방으로 몰아낸 것으로 이리 야단법석이라니……. 쯧.’

준백은 언짢은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서결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으로도 모자라, 조선의 오랜 숙원이었던 여진족 정벌까지 이루어냈으니.

그 심기가 뒤틀리지 않고 남아날 리 없었다.

하나 어찌 살아 돌아왔느냐 대놓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

이러나저러나 속이 문드러지는 준백이었다.

그나마 그가 이 자리를 버틸 수 있는 건 뒤로 열어놓은 귀에 몇몇 이야기가 들어온 까닭이었다.

‘그 계집종이 여진의 말을 할 줄 안다라…….’

준백이 시린 눈길로 결을 쳐다보았다.

계집이 이방의 언어를 아는 것쯤이야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포로와 심상치 않은 대화가 오갔고, 그 이후로 묘한 소문까지 하나둘 고개를 들고 있었다.

본디 의심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별거 아닌 일 하나로도 상대를 대역 죄인으로까지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처럼.

더군다나 그 계집은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결에게 유일하게 차를 올릴 수 있는 다비가 아니던가.

‘잘만 엮으면 그 계집 하나로 장군을 잡을 수도 있겠군.’

사특한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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