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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48화 (48/100)

48화

개선식이 끝난 후.

“장군!”

궐을 나서는 결과 성조에게 진위가 다가왔다.

“두 분 모두 감축드립니다. 이번 대승이 두 분의 덕이라는 걸 만인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게 뭐 우리만 감축 받을 일인가. 모두가 함께 이루어낸 업적이지. 진위, 자네도 역시 마찬가지고”

“저는 두 분께 비하면 고개를 들기도 민망할 정도입니다.”

결은 그런 진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없었다면 결코 그 많은 부대를 통솔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군.”

“훌륭한 부장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본장이 전쟁터를 장악할 수 있는 법이니, 너의 공을 명예롭게 생각하길 바란다.”

“예, 장군.”

우상과도 같은 결에게 새로이 인정을 받으니 진위는 새삼 가슴이 벅찼다.

수염이 덥수룩하여 험상궂은 산적처럼 생긴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순수하고도 험악한 미소에 성조가 해괴한 것을 본 것처럼 어깨를 흠칫 떨었다.

“자네는 다 좋은데, 그…… 웃는 법을 좀 새로 배워야 할 것 같네.”

“제 웃음이 뭐 어때서 그러십니까?”

“도깨비가 웃어도 이리 무섭진 않을 걸세.”

“도깨비보다 못하다니……. 너무하십니다, 좌랑.”

금세 시무룩해진 진위에 성조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

“하여간 마음은 여려가지고. 이런 마음으로 장수는 어찌 된 겐가?”

“저에게 조선과 장군을 위협하는 것들은 모두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에 가질 측은지심은 없습니다.”

그 말에 성조가 불만스러운 눈을 하며 물었다.

“조선과 장군은 그렇다 치고, 왜 앞에 있는 나는 쏙 빼는가?”

“……제게 좌랑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어허이, 이 매정한 친구 보게나. 그럼 나는 위험에 빠져도 괜찮다는 겐가?”

“아니,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좌랑께선 위협을 받으실 일이…….”

“자네 정말 너무하구먼. 내 이리도 연약한 몸인 것을.”

“지, 징그럽습니다! 붙지 마십시오!”

“뭐? 징그러? 에잇! 어디 징그러운 맛 좀 봐라!”

성조가 마치 연인처럼 진위를 끌어안자, 진위가 기겁을 하며 그를 떼어내려 발버둥을 쳤다.

하나 갑절은 큰 몸뚱이로도 쉽게 성조를 떼어내지 못하니.

두 사람의 철없는 행동에 결이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젓던 그때였다.

“쯧쯧쯧……. 장수라는 것의 행동이 저리 경박해서야.”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준백의 목소리가 결의 고막을 긁었다.

뒤를 돌아보니 준백이 정회를 비롯한 무리와 함께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본장이라는 자가 제대로 하질 못하니 기강이 저리 해이해지지.”

혼잣말인 듯 흘렸으나 분명 모두에게 들으란 듯 크게 말한 것이었다.

그러잖아도 서늘하던 결의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성조 역시 얼굴이 굳긴 마찬가지였다.

결은 어떠한 감정 동요도 보이지 않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언사가 조금 지나치십니다, 대감.”

“궐 안이오. 장수면 장수답게 체통을 지키라 말하고 있는 것이오.”

결이 무산계의 최고 품계에 오른 만큼, 준백도 전처럼 함부로 하대를 하진 않았다.

하지만 말만 이전보다 조금 높였을 뿐.

눈빛이나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아랫사람을 대하듯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결과 자신을 모욕하니.

결을 우상처럼 따르는 진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예를 지키지 않는 건 저희가 아닌 듯합니다만, 대감.”

“젊은 장수가 참으로 패기 있군.”

“대감.”

진위가 앞으로 나서려던 찰나.

결이 아래로 팔을 뻗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를 본 준백이 비릿하게 웃었지만, 그럼에도 결은 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분노는 얼어붙은 강물 아래에서만 비로소 유속을 보였다.

언제나처럼 고요하게.

때를 기다리며.

“북향에는 신출귀몰한 짐승이 하나 있으니…….”

물론, 가끔은 너무 빠른 유속이 얼어붙은 표면에 금을 낼 때도 있었지만.

“혹여 발견하거든, 덮어서 잘 감추어 주면 은혜를 알고 살봉향을 가져다줄 것이다.”

뜬금없이 알아듣지 못할 문장을 내뱉는 결에 다른 대신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곧바로 알아들은 성조는 굳은 눈으로 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준백의 표정 역시,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이미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준백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여진족 사이에서 유행하는 시가라 합니다.”

늘 참고 억누르기만 하던 그의 눈빛 속에 처음으로 여유가 맴돌았다.

더 이상 가만히 억누르지만은 않을 것이기에.

“어쩐지, 대감의 취향에도 맞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냥감이 맹수로 돌변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준백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모래를 집어삼킨 듯 껄끄러워진 목에 억지로 마른침을 삼키고 애써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웬 이상한 잡시 하나 들고 와서 농락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유감입니다. 대감께선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는데.”

“감히 나를 농락하려는 것이냐.”

“어찌 소장이 대감을 농락하겠습니까.”

미소조차 없는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도 어두웠다.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대감. 그저 짧은 식견으로 드린 말씀이니.”

그 속에 품고 있는 여유가 소름 끼치게 느껴질 만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준백은 한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평정을 잃어버렸음을 깨달았다.

그는 어금니에 잔뜩 힘을 주다 먼저 몸을 돌려버렸다.

옆에 있던 다른 대신들도 눈치만 살피다 그의 뒤를 따라갔다.

멀어지는 준백 무리를 결은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였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잠자코 있던 성조가 결에게 은밀히 말하였다.

“무슨 생각인 건가?”

“무엇이.”

“그걸 그렇게 밝히면 어찌하느냔 말일세. 최대한 증좌를 더 모아서 확실해졌을 때 치는 것이…….”

“초조는 의도치 않은 실수를 낳는 법이다.”

정면을 향한 결의 눈동자가 한층 더 검게 물들었다.

“이미 내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거기에 자객으로부터 밀서를 발견했다는 것까지 안다면 한동안 섣불리 움직이진 못하겠지.”

“…….”

“정말로, 그 자객들을 영상이 보냈다면 말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그 꼬리를 밟기 위한 발이 어디까지 다가왔는지 알지 못할 테니, 아무리 남준백이라 하더라도 당분간은 상황을 살피려 할 것이다.

그러니 벌어둔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증거를 모아야 한다.

반격할 기회조차 없도록.

결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는 진위를 보았다.

“너는 방금 보고 들은 것들을 모두 잊도록 하라. 엮여서 좋을 것 없다.”

“장군을 모욕한 것은 장군 휘하에 있는 저희 모두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찌 잊는단 말입니까!”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괜한 싸움에 휘말려 애꿎은 희생을 더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진위는 성정이 불같고 행동이 앞서는 자였다.

조정에서 잔뼈가 굵은 준백에게는 가장 뒷덜미를 물기 쉬운 먹잇감일 터.

아끼는 장수를 허무하게 잃을 순 없었다.

“언젠가 필요가 생긴다면 제일 먼저 널 부를 것이다.”

“장군.”

“그러니 그때까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라.”

“……명령, 받잡겠나이다.”

분을 꾹 억누르던 진위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병조에서 진급 건으로 진위를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둘러 가는 진위의 뒤로 결과 성조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막 궐을 나가려던 그때.

“저분은 선정 옹주가 아니신가?”

성조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과연 궁녀들을 거느린 채 선정 옹주가 다가오고 있었다.

궐의 깊은 곳에 위치한 화선당에서 어찌 이곳까지 행차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걸음은 필시 이곳을 향한 것이었다.

결과 성조는 길을 비키기 위해 한 걸음 물러나 허리를 숙였다.

줄곧 앞을 향하여 내딛던 선정의 백피온혜가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윽고 자리한 곳은 결의 앞이었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천 상궁이 결을 향해 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옹주 아기씨께 예를 갖추십시오.”

“소장 서결, 옹주 아기씨를 뵈옵니다.”

결이 곧 허리를 깊이 숙이며 선정에게 인사를 올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키가 한 자는 더 큰 덕에 선정은 그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둑제 때 멀리서 보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내 그리움으로 애만 태우던 눈동자가 결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입술이 꽃봉오리 피듯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대가 이번 여진족 정벌을 진두지휘한 서결 장군인가?”

“……그러하옵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선정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들어왔다.

목소리마저 참으로 근사한 사내였다.

선정은 떨리는 마음을 삼키며 꽃잎을 수놓듯 한 마디 한 마디 정성스럽게 말하였다.

“한 나라의 옹주 된 자로서, 국경을 수호하고 백성들의 근심을 거두어준 장군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 감히 이리 찾아왔네. 이미 아바마마께서 그대의 노고를 성대히 치하하셨겠지만, 보잘것없는 한마디나마 더 보태고 싶었네.”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도 많았다.

다친 곳은 없었는지, 타지에서의 생활이 많이 힘들진 않았는지.

서신을 보내고 싶어 몇 번이고 먹을 갈았다가 버린 것을 아는지.

사무치는 그리움에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어 매일 밤 그대를 그렸다는 것을 아는지.

“무사히 돌아와 주어, 고맙네.”

하나 그 무엇 하나 입 밖으로 쉬이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없는지라.

선정은 그 많은 말들을 마음속에 꼭꼭 담아두고, 그저 건넬 수 있는 진심 한 자락만 겨우 꺼내어 결에게 전하였다.

“황감하옵니다, 옹주 아기씨.”

그마저도 잠시 잠깐 머물다 이내 바람에 휘날려 날아갔지만.

선정은 조금이라도 더 이 시간을 붙잡고 싶어 그와의 유일한 공통점인 단이를 입에 올렸다.

“허락도 없이 그대의 다비를 나의 차벗으로 삼았네. 혹 내가 그 아이를 불러 곁에 두는 것이 그대에게 부담이 되는가?”

“다시(茶時) 외에는 무료히 시간을 보내야 하는 아이옵니다. 옹주 아기씨께서 친히 불러주시어 차벗으로 삼아주신다면 그 아이에게도 큰 은혜일 것이옵니다.”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네.”

선정의 꽃분홍 입술에 한층 더 짙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애초에 한 공간에 있을 명분과 주제가 없는 사이라.

선정은 이만 대화의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한 번쯤은 그대와 말을 나눠보고 싶었는데, 이리 만나게 되어 기뻤네. 앞으로도 이 조선을 위해 더욱 힘써주시길 바라겠네.”

“명심하겠사옵니다.”

결이 허리를 조금 더 깊이 숙이자 더 이상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결 또한 계속 이 상태로 있어야 하는 터라.

선정은 아쉬운 눈길로 마지막까지 결을 바라보다 이내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가 남기고 간 은은하고도 달콤한 향이 미련처럼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곁에서 함께 허리를 숙이고 있던 성조가 심각한 얼굴로 결을 보았다.

“단이가 옹주 아기씨의 차벗이 되었다는 말, 사실인가?”

“그래. 사실이다.”

“대체 언제부터?”

“정벌을 떠나기 전부터였다. 듣자 하니 차에 조예가 깊으시다 하던데, 단이에게도 좋은 연이 되겠지.”

그 말에 성조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은 궐이네. 그 아이가 함부로 드나들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란 말일세. 혹 영상 대감이나 우리 아버지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찌하는가.”

답지 않게 걱정을 드러내는 성조에 결이 묘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나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성조는 이마까지 짚으며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절벽에서의 일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단이에 관해 예민해진 상태였다.

“아니지. 이미 마주쳤을 가능성이 높겠군. 영상 대감이 단이를 봤다면 분명 어떻게든 이용하려 들 텐데…… 하아.”

다른 때라면 결에게 피해가 갈까 봐 걱정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성조는 언제나 벗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이였으니.

한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성조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가 준백 무리의 표적이 될까 봐.

상전인 자신으로 인하여, 그녀가 또다시 위험해질까 봐.

“자네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아이를……!”

“한성조.”

결의 묵직한 목소리가 성조의 말을 끊어내었다.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성조의 두 눈에 당황이 스쳤다.

결은 그런 성조를 똑바로 마주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무게를 실어 말하였다.

“그 아이, 내 사람이다.”

“…….”

“내가 지켜야 할.”

위로일까.

경고일까.

가슴 한구석에 시린 공기가 흘러든 기분이었다.

작게 벌어져 있던 성조의 입술이 이내 틈을 감추고 다물어졌다.

답지 않게 흥분하고 말았다.

그 아이 일이라서.

“……자네 말이 맞네. 내가 잠시…….”

감정을 갈무리한 성조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미소가 잘 지어지지 않는다.

가면 같은 미소를 짓는 것은 늘 쉬운 일이었는데.

왜 이럴까.

왜 지금은, 이 거짓 미소조차 짓고 싶지 않은 걸까.

억지로나마 끌어올렸던 입꼬리가 다시 밑으로 내려왔다.

“자네를 믿지 않는 게 아니네. 다만…….”

결을 똑바로 응시한 성조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아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네.”

“…….”

“자네만큼, 나 또한.”

어쩌면 초조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회가 퍼부은 힐책에.

결을 둘러싼 숱한 위험에.

그 아이를, 잃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초조한 마음이 숨겨 놓았던 열등감과 열망에 불을 지펴버렸다.

“자네보다 못한 나지만, 그 아이 하나 지킬 힘은 있다는 뜻이야.”

의도치 않는 실수를 벌인 건 이쪽이 먼저였다.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묘한 기류가 떠돌았다.

확고한 의지였고, 동시에 부정할 수 없이 똑같은 마음이었다.

단이를 향한.

“그러니, 지금처럼 혼자 다 떠안으려 하지 말고 나에게도 그 짐을 나눠주게.”

한순간 참지 못하고 속마음을 비친 성조가 뒤늦게 입가를 늘였다.

“요즘 병조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내가 좀 예민했던 것 같군. 아까는 괜히 언성 높여서 미안했네.”

“괜찮다. 나도 너를 탓하려던 건 아니었으니.”

“이만 가세. 시간을 너무 지체한 듯하이.”

두 사람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전보다 한 뼘 멀어진 간격 사이로 시린 바람이 드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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