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49화 (49/100)

49화

며칠 뒤.

단이는 모처럼 결과 함께 느지막한 오전에 집을 나섰다.

전쟁도 끝났겠다, 바쁜 것도 없겠다.

하여 날씨 좋은 날을 골라 성조가 다연 겸 꽃놀이를 하자며 두 사람을 은아암에 초대한 것이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언제쯤 은아암에 갈 수 있을까 늘 기대를 했던 터라.

길을 나선 단이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한양은 이제 여름에 접어들어 해가 바로 앞에 있는 듯 열기가 상당하였다.

그러나 부드러운 바람 사이로 섞여드는 쨍한 햇살 냄새에 단이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습기도 그녀의 기분까지 눅눅하게 만들진 못하였다.

단이는 목에 두른 엷은 손수건을 조금 느슨하게 풀며 결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나리! 오늘 날씨가 좋아서 참으로 다행이어요.”

오늘만큼은 그도 흑마를 두고 나란히 길을 걷는 중이었다.

“……그래. 다행이구나.”

허공을 물끄러미 보던 결이 한 박자 늦게 단이의 말에 답하였다.

잔뜩 신이 나 있는 단이와 다르게 그는 아까부터 무슨 고민이 있는 사람 같았다.

혹 간밤에 잠을 못 주무셨나?

아니면 무어 생각할 거리가 생기신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 보아도 단이가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 아이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네. 자네만큼, 나 또한.’

‘자네보다 못한 나지만, 그 아이 하나 지킬 힘은 있다는 뜻이야.’

결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떠다니고 있는지도.

하지만 단이 앞에서 그날의 일을 드러낼 수는 없는 터라.

곧 표정을 갈무리한 결이 다정한 눈길로 단이를 바라보았다.

“여름이라 하더라도 계곡 근처라 제법 추울 것이다. 따로 덮을 것은 잘 챙겨왔느냐.”

“네! 덕원 할아버지께서 나리께 드릴 담요도 챙겨주시었어요.”

“내 것 말고. 네가 덮을 것 말이다.”

“제 것도 챙겨 왔습니다!”

단이가 환히 웃으며 들고 있던 단출한 보따리 짐에서 빼꼼 모포 끝자락을 내보였다.

그것을 본 결이 옅게 미소 지었다.

“잘하였다.”

그러곤 그 작은 보따리 짐을 가져가 대신 들었다.

무겁지 않아 괜찮다는 말에도 결은 저 또한 괜찮다며 짐을 돌려주지 않았다.

고민이 있어 보이던 건 그저 착각이었나.

아까와 달리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결의 표정에 단이도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두 사람은 민가를 지나 인왕산 산기슭에 다다랐다.

초입부터 도처에 핀 꽃이 화려한 색과 짙은 향기로 그들을 먼저 맞이했다.

붉은빛 영산홍과 자색의 자주괭이밥, 노란 돌양지꽃과 하얀 꽃잎을 활짝 펼친 쑥부쟁이까지.

그야말로 봄 못지않은 꽃들의 향연이었다.

“우와, 나리! 이것 보시어요! 꽃이 정말 많이 피어 있어요!”

결의 집에는 내부는 물론이고 근처에도 꽃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하여 이처럼 꽃이 흐드러지게 핀 광경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터라.

단이는 한 마리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이 꽃 저 꽃의 냄새를 맡고 좋아하였다.

은아암에 도착하기 전부터 저리 좋아하니.

그런 단이를 바라보는 결의 입가에도 자연스럽게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집 마당 한구석에 작은 꽃밭이나 만들어줄까 생각하던 그때.

“어이, 다동. 그리 꽃에 가까이 붙어 있다간 벌에 쏘인다!”

익숙한 목소리에 단이와 결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성조는 수복과 악공들을 잔뜩 대동한 채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입던 청포 관복 대신 화려한 비단 옷과 고급 태사혜 차림이었다.

오랜만에 원하는 만큼 마음껏 화려하게 입은 모양이건만.

결과 마주한 순간, 성조의 낯빛이 밝은 옷 색과 달리 흐릿하게 변했다.

언뜻 당혹감이 스친 성조의 눈동자가 결의 주위를 맴돌았다.

“……왔는가.”

“그래.”

부자연스럽긴 결도 마찬가지였다.

성조만큼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오는 내내 맴돌았던 고민스러운 표정이 다시금 얼굴 위에 드러났다.

멋쩍게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 사이로 일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개선식 날 단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어쩐지 서로에게 서먹해진 두 사람이었다.

하나 그날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단이라.

“저희, 안 올라갑니까?”

“가야지.”

“가자, 다동아.”

머뭇거리는 두 사람에게 물으니, 그들은 누가 봐도 어색한 얼굴로 동시에 답을 하였다.

그에 공기의 흐름이 더욱 아득해진 터라.

눈치를 살피던 성조는 부러 과장되게 말하였다.

“내 오늘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온갖 산해진미와 다과를 준비하였네. 늦게 가면 음식이 죄 상할 테니 얼른 올라가세. 그래야 다연이든 꽃놀이든 제대로 즐길 수 있을 테니.”

그러곤 앞장서 산길을 올랐다.

결 역시 뜻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런 성조를 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왜들 그러시지.’결과 성조를 번갈아 보던 단이는 미심쩍은 마음을 뒤로하고 두 사람을 따라갔다.

호랑이가 나온다던 무시무시한 소문과 달리, 인왕산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푸른 초목 위로 햇살이 조각조각 부서져 눈부시게 빛났고, 지저귀는 산새와 꽃 사이를 날아드는 나비가 그들과 함께 산길을 올랐다.

산세가 조금 가파르긴 해도 주변을 구경하느라 단이는 힘든 줄도 몰랐다.

하지만 앞서가시는 두 나리님들께선 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질 않으시니.

괜히 사이에 낀 단이만 마음이 불편해졌다.

‘혹 두 분이 싸우셨나?’아무리 오랜 죽마고우라 하더라도 어찌 매일 같이 좋기만 하겠는가.

평생을 사랑하며 살자는 부부마저 부부 싸움을 하기 마련이거늘.

단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 채 두 사람은 말없이 걷기만 하고 있었다.

‘분명 또 성조 나리께서 별 시답잖은 말로 우리 나리 마음을 속상하게 하신 걸 테야. 암.’눈매를 가늘게 뜨며 성조의 뒷모습을 흘겨보길 잠시.

문득 하얗게 군락을 이룬 꽃이 단이의 시야에 들어왔다.

‘옳거니!’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녀가 싱긋 입가를 늘였다.

“나리!”

단이의 부름에 결과 성조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단이가 결의 가슴팍에 무언가를 꽂더니, 연이어 성조에게도 같은 것을 꽂았다.

성조가 눈썹을 비틀며 물었다.

“이게…… 무엇이냐, 다동?”

“꽃이어요! 개망초요.”

“이걸 왜 여기에 꽂은 것이야?”

“자고로 꽃놀이란 이렇게 온몸에 꽃 치장을 해야 제맛이라 하였습니다!”

“누가?”

“제가 아는 동생이요.”

단이는 작은 손수건 위에 수북이 쌓은 개망초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심 다점의 최연소 단골손님이었던 일란은 마을에서 알아주는 장난꾸러기였지만, 의외로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이였다.

척박한 치원 땅에서 꽃이란 무척 귀한 것이라.

하여 일란은 꽃을 발견한 날이면 꼭 이렇게 주변에 떨어진 꽃송이들을 주워 머리며 옷이며 할 것 없이 온몸에 꽂은 채 돌아오곤 하였다.

“본래 귀에 꽂아야 하는데, 나리들께서 꽃을 머리에 달고 계시면 사람들이 흉을 볼 것 아닙니까. 또 서결 나리께서 예전에 말씀하신 대로 소양증이 생길 수도 있고요. 하여 아쉬운 대로 옷에라도 꽂아드리는 겁니다.”

소양증이란 말에 성조가 힐긋 쳐다보니, 결은 짐짓 모른 척 그의 시선을 피하였다.

단이는 배시시 웃으며 두 사람에게 꽂아준 개망초를 가리켰다.

“이리 꽂아 놓으니, 두 분 다 청의동자같이 고우십니다!”

“청의동자?”

그 말에 결과 성조가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이리 장성하여 우락부락한 사내들을 두고 예닐곱 소년 같은 청의동자에 빗대다니.

기가 차다 못해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결과 성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다동, 넌 무슨 그런 해괴한 비유를 하느냐? 청의동자가 들으면 경기 일으키겠다.”

오래전 왕 노인이 구해다 준 책에서 ‘청의동자같이 곱다’라는 표현만 봤을 뿐인 단이는 이해 못 할 소름이었지만.

“하지만 두 분 나리께 꽃이 정말 잘 어울리시는걸요. 그리 나란히 꽂으니, 꼭 형제 같기도 합니다.”

형제란 말에 그들의 눈 위로 묘한 빛이 스쳤다.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은 결이 먼저 뒤로 돌았다.

“얼른 가야 한다면서. 이만 가지.”

“그, 그래. 다동,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너도 부지런히 따라오너라.”

공연히 핀잔만 들은 단이는 이마를 긁적이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수성동 계곡이었다.

“우와, 엄청 시원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더운 볕을 쬐며 산길을 오르느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건만.

계곡에 다다르자마자 차가우리만치 시원한 공기가 그녀를 반겼던 것이다.

꼭 이곳에만 여름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성조가 데려온 수복들은 벌써 적당한 자리를 골랐다.

결을 위해 계곡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빠르게 찻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계곡이 보이지 않아도 들리는 물소리만으로 가슴이 뻥 뚫리듯 시원하였다.

거기다 이곳 역시 아름다운 꽃들이 지천을 수놓고 평평한 바위가 지반을 이루고 있어, 아무 곳에나 돗자리를 펴고 있어도 훌륭한 피서처가 될 것 같았다.

단이는 입을 다무는 것도 잊고서 주위 경관에 푹 빠졌다.

그런 그녀를 뿌듯하게 보며 성조가 말하였다.

“한도십영에도 나오는 남산 꽃놀이에 비하면, 이곳은 옆집 개똥이네 화단에 불과하다.”

“이렇게나 예쁜데, 이보다 더 예쁜 곳이 있다는 말씀이어요?”

“그래. 그리고 이 정도로 감탄하기엔 아직 이르지. 저길 보거라.”

성조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검은색 흙벽으로 지어진 건물 하나가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조금 크게 지어진 초가집 같기도 하였는데, 주위 풍경과 잘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곳이 은아암이다. 귀한 차제구와 찻잎들로 가득 채워진,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차밭이 바로 저곳이지.”

하지만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차밭은 보이지 않았다.

은아암이 지어진 곳은 평평한 바위 위라.

그 뒤에 차밭이 있을 리도 없었다.

단이가 의심 어린 얼굴로 성조와 은아암을 번갈아 보았다.

“저게 어찌 차밭이어요? 밭은커녕 찻잎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들어가지 않았으니 차가 보이지 않지. 자, 따라오너라.”

단이는 결과 함께 성조를 따라 은아암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성조의 말은 은아암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계단으로 반쯤 내려가야 할 만큼 깊이 파인 바닥.

“와아…….”

그리고 그 바닥을 가득 메운 푸른 잎사귀들.

이미 입하(立夏)가 많이 지났음에도 일창일기의 부드럽고 여린 잎이 피어나 있었다.

이곳 은아암이 바로 차를 재배하는 차밭 그 자체였던 것이다.

단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조심스럽게 은아암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마치 입하 때의 날씨를 그대로 보존한 것처럼 약간은 시린 공기가 피부에 맞닿았다.

천장을 보니 기름을 먹인 한지가 석조로 된 문살에 발라져 지붕을 대신하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촉촉한 습기도 느껴졌다.

“이곳은 무엇이어요?”

“온실이다.”

“온실이요?”

“정확히 말하자면 온실과 빙고의 원리를 응용한 다실(茶室)이지.”

뒤따라 들어온 결이 단이의 물음에 답하였다.

그 역시 은아암에 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라.

새삼스럽게 둘러보는 눈길엔 은은한 그리움도 함께였다.

“이곳은 하나도 변치 않았군.”

결이 혼잣말처럼 흘린 말에 성조가 겸연쩍어하며 답하였다.

“변할 리가 있겠는가. 관리인을 따로 두어 매일 살피게 하고 있고, 또 못해도 달포에 한 번씩은 내가 직접 와서 이곳을 살피는 것을.”

결과 성조의 머릿속에 동시에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주 먼 옛날, 이곳이 그저 버려진 암자였을 시절.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 둘이서 이곳을 비밀 요새 삼아 즐겁게 뛰놀던 것이.

두 소년은 때때로 군사였고, 장군과 책사였으며, 어느 때는 아군이기도 하였고 또 어느 때는 적군이기도 하였다.

쏟아지는 별 아래 함께 읽은 책의 구절을 나누는가 하면 시원한 계곡물에 멱을 감으며 신나게 물장구를 쳤고, 타닥타닥 튀는 모닥불에 고구마와 군밤을 구워 먹기도 하였다.

그저 한없이 즐겁고 또 즐겁기만 했던 나날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꿈같은 이야기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지켰는데.”

성조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그들의 추억 위로 덮였다.

결과 성조의 시선이 잠시간 서로에게 머물렀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이 순간 각자의 가슴을 건드렸다.

아릿한 침묵이 촉촉한 이슬처럼 찻잎에 맺히던 찰나.

“나가세. 내 수복들이 준비를 다 마친 듯하니.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잖나.”

성조가 부러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먼저 은아암 밖으로 나섰다.

“……우리도 나가자.”

“예, 나리.”

짙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결도 단이를 데리고 은아암 밖으로 나왔다.

어디선가 들려오던 두 소년의 웃음소리가 뒤로 멀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