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성조가 다연을 위해 마련해온 것은 생각보다 더 성대하였다.
단순히 차와 다과가 준비된 찻상뿐 아니라 아예 음식까지 가져왔던 것이다.
민가에서도 쉽게 먹을 수 없는 구첩반상이 이곳 인왕산 계곡에 차려졌으니.
거의 잔칫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
말 그대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진 음식들에 단이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걸 저희가 어찌 다 먹습니까? 함께 오신 저 수복 아저씨들과 악공 아저씨들까지 함께 드시어도 남을 것 같습니다!”
“나눠도 먹고, 남으면 다음에 또 와서 먹으면 되지.”
아직 식사도 하지 않았건만.
성조는 한쪽에 다탁(茶卓)을 미리 마련하고 그 위에 온갖 차제구를 늘어놓았다.
그가 가져온 것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제구와는 때깔부터 달랐다.
전부 명나라에서 거금을 주고 들여온 귀한 물건들이라 하였다.
감히 함부로 만지기도 조심스러워, 단이는 눈으로만 그것들을 구경하였다.
“누가 보면 나리께 차제구 수집벽이 있는 줄 알겠습니다.”
“어찌 알았느냐? 내 곡이하(斛二?)에 걸린 이후로 차제구 하나에도 각별한 마음이 생겼더랬지.”
곡이하란 차를 마셔야만 차도를 보이는 괴이한 질병이라.
차에 푹 빠진 괴짜 서생들이 우스갯소리로 들먹이는 꾀병이었다.
성조에겐 이 해괴한 병 또한 결과 자신을 하나라 생각하면서 갖게 된 일종의 강박증이건만.
본인조차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니, 그는 자신에게 그저 지독한 취미가 들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성조는 대나무로 엮은 바구니 안에서 커다란 주석함을 하나 꺼내었다.
“자, 이것이 오늘 다연의 주인공이다.”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각자 색이 다른 떡차 세 종류와 마른 찻잎이 든 작은 항아리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성조는 힐긋 결을 보곤 겸연쩍게 말을 이었다.
“일전에 들여왔던 일로향은 이미 다 쇠어버렸네. 자네가 궁금하다 하였던 초 선생께서 직접 덖으신 것이었는데, 우리 둘 다 예기치 못하게 정벌에 가게 되어서…….”
마주치지 못한 시선엔 애써 구한 차를 벗에게 맛보이지 못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중이었지만.
하나 그걸 결이 모를 리 없었다.
주석함에 든 차 역시 언뜻 보기에도 고심하여 골라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괜찮다. 네가 구해온 차라면 분명 일로향 못지않은 특품일 테니.”
“……그리 생각해주면, 고맙고.”
툭 내던진 괜찮다는 말에 성조의 굳어 있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어색한 두 나리들 때문에 사이에 낀 단이만 가시방석이라.
이대로 있다간 찻잎 두고 제사라도 지내야 할 것 같았다.
저라도 분위기를 환기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단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거두었다.
“어서 식사하시어요. 차는 제가 우리겠습니다.”
그러자 성조가 주석함을 도로 닫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서라. 급할 것 무어 있느냐? 본디 차는 부른 배를 꺼트리고 입가심을 하기에 좋은 것이니, 일단은 산에 오르느라 주린 배부터 채우자꾸나. 내 아까부터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 같다.”
“성조 말이 맞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
결이 그녀를 자리에 앉히며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그러고 보니 상에는 결과 성조의 몫 외에 또 한 사람의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숟가락을 꼭 쥔 단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저도 여기서 함께 먹는 것이어요?”
“그럼 예까지 데리고 와서 다동 너만 쫄쫄 굶길까.”
“그런 뜻이 아니오라…….”
“자자, 식겠다. 얼른 먹거라.”
양반인 두 사람과 한 상에서 밥을 먹는다는 게 못내 송구스러웠으나, 굳이 제 몫만 챙겨 바닥에서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하여 단이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한 상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송구스러움도 잠깐.
상 위에 펼쳐진 온갖 산해진미에 단이는 아기 새처럼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렸다.
맛이 깔끔하고 신선한 나물 무침부터 시작하여 떡갈비와 산적, 뜨끈한 열구자탕,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굴비와 바삭하게 지진 부침개.
거기에 열 반찬 부럽지 않은 흰쌀밥과 고깃국까지.
한 젓가락씩만 먹어도 금세 배가 부를 것만 같았다.
하여 단이는 송구한 마음도 잊고 늦가을 입안에 잣을 넣는 다람쥐인 양 열심히 밥그릇을 비워나갔다.
복스럽게 양껏 볼을 부풀린 모습은 결과 성조의 눈에 무척이나 어여쁘고 귀여워 보였다.
“천천히 먹어라. 안 뺏어간다.”
결은 나직이 속삭이며 그녀의 쌀밥 위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소고기를 올려주었다.
아까부터 단이의 젓가락이 제일 많이 향했던 반찬이 바로 이 소고기였다.
“감사합니다, 나리.”
방금 전에 하나를 입에 넣었는데도 새 고기를 보고는 또 배시시 웃어 보이는 단이다.
그 모습에 성조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결이 누군가의 밥그릇에 손수 반찬을 올려주는 것은 십 년이 넘도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리 괴리감 드는 장면이란.
눈을 가늘게 뜬 성조는 아예 소고기 접시를 들어 단이 앞에 놓아주었다.
“너 다 먹어라, 다동.”
“헉,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나리들께서도 같이 드시어요.”
“우린 너무 많이 먹어서 물린다. 안 그런가, 결?”
“너만 괜찮다면.”
사실 두 사람 다 고기라면 결코 마다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고기 한 점에 저리 행복해하는 단이를 볼 수만 있다면 이 상 위에 있는 다른 반찬들까지 기꺼이 다 내어줄 수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이는 제 앞에 수북이 쌓인 고기 접시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활짝 웃었다.
“그래도 양도 많고, 또 저 혼자 먹기엔 아까울 만큼 맛이 참으로 좋습니다. 나리들께서도 같이 드시어요.”
그러면서도 결과 성조에게 권하는 것을 잊지 않으니.
두 사내는 배보다 마음이 더 든든히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하나 결과 성조에 비해 뱃구레가 작은 단이는 당연 배가 차는 속도도 빨랐다.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두 나리가 식사를 마칠 때까진 할 것이 없는 터라.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억지로 깨작거리는 단이가 신경이 쓰였는지, 결이 계곡이 있는 쪽을 고갯짓하며 말하였다.
“예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아쉬울 터이니, 가서 발이라도 담그며 놀고 오거라.”
“그래도 되어요? 식사 끝나시면 차도 올려드려야 하는데…….”
“그때 되면 부를 터이니 걱정 말고 다녀오거라. 깊은 곳은 가지 말고.”
“예, 나리! 그럼 딱 발만 담그고 오겠습니다.”
내심 심심하긴 하였는지, 해사하게 웃은 단이가 곧장 계곡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저만치 멀어지는 단이의 뒷모습으로 결과 성조의 시선이 함께 따라붙었다.
그러다 서로 마주친 눈에 다시금 어색한 공기가 부유하였다.
“술, 하겠는가? 혹시 몰라 한 병 가져오긴 하였는데.”
“……하지. 여기까지 왔는데.”
결이 고개를 끄덕이니 성조가 수복에게 술병을 가져오라 명하였다.
곧 수복이 잘 밀봉된 백자 한 병을 가져왔다.
장안에서 내로라한다는 술도가에서 얻어온 홍주였다.
주정이 꽤 높은 편이었지만 그만큼 깊고 짙은 향을 뽐내는 술이라.
향취를 즐기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술이었다.
“받게.”
성조가 결에게 잔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결이 잔을 받아 앞으로 내밀었다.
곧 그의 잔 안에 붉은 홍주가 찰랑이며 채워졌다.
“줘. 나도 따라줄 터이니.”
결은 제 잔을 채우려는 성조의 손에서 병을 가져가 대신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두 사람은 짧게 잔을 부딪치고 그대로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결은 웬일로 첫 잔을 비우기 무섭게 다시 병을 들었다.
빠르게 잔을 채우는 결에 성조 역시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두 번째 잔은 소리 없이 비워졌다.
곧바로 병을 든 결이 이윽고 세 번째 잔을 채웠다.
그렇게 네 번째 잔을 비우고, 다섯 번째 잔을 비웠다.
빠르게 마신 만큼 속이 화하게 쓰렸지만, 두 사람 다 이 정도에 쉬이 취기가 오르진 않았다.
“즐기자고 가져왔더니, 죽이자고 먹이는군.”
성조가 실소와 함께 혼잣말을 흘렸다.
그 말에 깊게 숨을 내뱉은 결이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단 한 번도, 너를 나보다 못하다 생각한 적 없다.”
“…….”
서서히 웃음기를 잃은 눈동자가 결에게 향하였다.
결은 정면의 허공만 응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단 한 번도, 내가 너보다 낫다고 생각한 적 또한 없다.”
“……결.”
“너는 나에게 있어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고, 부러움의 표본이었고, 내가 되고자 하였던 미래의 모습이었다.”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단어들이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나는, 절대로 될 수 없는.”
이제껏 한 번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 없던.
성조가 이제껏 숨겨왔던 마음과 다를 것 하나 없던.
어쩌면 누구보다 더 처절하게 그와 같은 삶을 갈망해왔을, 결의 진심이었다.
“그날, 네 말을 듣고 나니 새삼 너에게서 내가 보이더군.”
결이 고개를 돌려 성조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두 벗의 시선이 온전히 서로를 마주하였다.
자신을 향한 성조의 열등감을 알게 된 순간, 결은 가슴이 아릿할 만큼 익숙한 감정을 느꼈다.
그 역시 벗의 마음과 일절 다르지 않았으므로.
하여 처음 마주한 벗의 진심이 당황스러웠고, 미안하였으며, 그 누구보다 잘 헤아릴 수 있었다.
한때는 부러워하였고, 또 한때는 원망도 해보았으나.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엔 깨달은 진실 하나.
“적어도 서로를 본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 있어서는.”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그저 각자가 지닌 상황과 그것이 이끈 운명이 서로 다른 것뿐이라는 것을.
“그러니 나에게 너를 빗대어 너 자신을 깎아내리진 마.”
“…….”
“네가 너 스스로를 깎아내리면, 그런 너를 본받고 싶어 하는 나는 뭐가 되겠냐.”
결이 병에 남은 술을 모두 성조의 잔에 따랐다.
잔 하나를 꼭 채울 양만 남은 술이었다.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성조가 뜻 모를 웃음을 옅게 흘렸다.
“부끄럽군. 내 알량한 시기 하나 다스리지 못하여 못난 모습이나 내보이고 말이야.”
성조는 잔을 들어 결의 잔에 반을 따라주었다.
누구 하나 더 많지도, 적지도 않은 똑같은 양으로 채워진 술이었다.
“역시 난 자네에 비하면 한참 더 수행해야 하나 보이.”
“비교하지 말라고 조금 전에 말했는데.”
“내가 원래 좀 청개구리 같은 기질이 있잖은가.”
쿡쿡 웃은 성조가 잔을 들어 올리자 결도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마주 잔을 올렸다.
짠. 맞부딪친 술잔에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리, 나리! 제가 가재를 잡았습니다!”
그때, 멀리서 단이가 치맛단을 그물처럼 양손으로 잡아 올린 채 이쪽을 향해 해맑게 웃는 것이 보였다.
혼자 작은 바위를 들추며 손가락만 한 가재들을 잡은 모양이다.
결과 성조가 그녀를 향해 동시에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성조는 저와 같은 모습으로 손을 흔드는 결을 힐긋 보곤, 단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하였다.
“그래도 저 아이를 내게서 숨기진 말게.”
“…….”
“자네만큼이나 저 아이를 지키고 싶다 했던 건, 그저 한 말이 아니니.”
결이 고개를 돌려 성조를 보았다.
성조는 뜻을 알 수 없는 묘연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결을 마주 보았다.
호의일까.
아니면 연심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성조 역시 단이를 많이 아끼고 있다는 것.
자신 못지않을 만큼.
일순 묘한 감정이 가슴을 건드렸다.
질투 같기도 하였고, 초조함 같기도 하였다.
하지만 함부로 드러낼 순 없어 결은 그저 속으로만 삼켰다.
“숨길 생각 없다. 지금은 저 아이를 지킬 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니까.”
“자네는 그중 가장 뛰어난 손을 얻은 걸세.”
성조가 씨익 웃으며 어릴 적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하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둘 사이를 맴돌던 어색한 기류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어린 시절, 별것도 아닌 일로 한바탕 다투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했을 때처럼.
두 사람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다시 단이를 보았다.
“다동, 차 마시게 얼른 오거라!”
“다비라 불러주시면 가겠습니다!”
“그럼 넌 오지 말거라! 나랑 결 둘이서 다 마실 터이니!”
“너무 하십니다!”
피식 웃은 결이 그녀를 향해 넌지시 말하였다.
“그리 있다간 고뿔 걸린다. 어서 오거라.”
“네, 나리!”
입술을 삐죽이며 성조를 흘겨보던 단이가 결의 한마디에 얼른 도도도 달려왔다.
함께 푸스스 웃음을 흘린 결과 성조는 다가오는 단이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두 벗은 아무것도 다를 것 없었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도.
서로를 존경하고 동경하며 닮고 싶어 하는 마음도.
“얼른 차를 올리겠습니다, 나리!”
그리고 단이, 이 아이를 향한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