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소다옥에서 불안하게 손을 맞잡고 있던 단이는 안으로 들어오는 결과 성조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리…….”
결의 눈을 마주하기 무섭게 눈물이 핑 돌았다.
두려움이었고, 죄송함이었고, 또 서러움이었다.
여진족임이 밝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처음부터 솔직하게 밝히지 않고 거짓을 말한 죄송함.
그리고 내가 조선인이 아니라는 게 그토록 큰 죄가 된다는 것에 대한, 서러움.
“나리, 저는…….”
뭐라도 말하고 싶은데 눈물과 엉킨 단어들이 목을 꽉 메어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만 저질러 놓고 울기만 하는 골칫덩이가 된 것 같아 더욱 속상하였다.
“……송구하옵니다.”
결국 단이는 입술을 꾹 맞다물며 옷소매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았다.
울어서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어깨를 다독이는 결의 손길에 다시금 울컥 감정이 북받쳤으나, 단이는 꾹 울음을 삼켰다.
두렵고, 죄송하고, 또 서러운 만큼 한 시라도 빨리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세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제일 먼저 말문을 연 것은 성조였다.
“일단 일의 진상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은데.”
그의 시선이 결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에게도 소상히 말해줄 수 있겠는가.”
줄곧 단이의 얼굴만 눈에 담던 결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겠느냐.
눈빛으로 물으니 단이는 그저 믿을 사람이 둘뿐이라.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은 마지막까지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소문이 맞다.”
“그 말은…….”
“단이는 조선인이 아니야.”
그 말에 성조의 표정에 작게 균열이 갔다.
단이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진실을 더하였다.
“처음엔 두려워서였지만…… 그다음엔 서결 나리께 폐를 끼칠 수 없어 더욱 말씀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럼 일부러 결을 속이고 조선으로 잠입해 왔다는 건…….”
“그건 정말 아니어요!”
단이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한껏 저었다.
“결단코 저는 서결 나리께 폐를 끼칠 생각이 없습니다. 만에 하나 이 일로 나리께서 곤경에 처하신다면…….”
파르르 떨리는 입술 끝을 꾹 깨문 단이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저는 이곳을 떠나서라도, 나리를 지킬 것이어요.”
부러 하는 말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라짐으로써 이 일이 해결될 수 있다면, 단이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조선을 떠날 수 있었다.
결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에.
그를 떠나는 건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질 만큼 슬프고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녀에게 결의 안위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무릇 연심이란 보고 싶은 마음보다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이니.
그런 단이를 바라보는 두 사내의 시선은 똑같이 어두웠다.
결은 저 아이의 눈물을 본 것이 괴로워서.
성조는 저 아이의 마음을 본 것이 괴로워서.
그러나 각각 품은 뜻은 달라도 원하는 바는 하나라.
성조는 착잡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보려 노력하였다.
“네가 조선 땅을 떠나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요?”
“조정은 명분으로 돌아가는 곳이다. 현재 일어난 일이든 과거에 일어난 일이든, 무언가 존재하였고 일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곳이야. 이 소문이 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선이 그어진 성조의 미간에 곤란함이 가득했다.
“문제는, 결 자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방 국경에서 여진족을 멸하던 장수라는 것일세. 그런 자네가 여진족 아이를, 그것도 조선인이라 거짓말까지 하며 데리고 있었다 하면 저들은 그것을 꼬투리 삼아 음해를 하려 들 것이네.”
“…….”
“오늘 그 소문처럼 말일세.”
피바람이라는 말에 단이의 얼굴이 더욱 겁에 질렸다.
해결책이 아예 없다는 뜻으로 들려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럼, 그럼 이제 어찌해야…….”
바들바들 떨리는 주먹 위로 커다란 손이 덮였다.
팔을 따라 고개를 드니 결이 고요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스한 온기가 차갑게 돌던 피를 서서히 잠재워주었다.
“네가 여진족임을 증명할 수 있느냐.”
“예……?”
“네가 여진족임을 지금 당장 증명할 수 있느냔 말이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질문에 단이는 선뜻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여진족임을 증명할 수 있냐니.
기억이 있을 적부터 라이콴족 태생의 여진족인 왕 노인에게 거두어져, 여진과 가까운 땅에 살고, 또 여진의 말을 쓰며 살아왔거늘.
그런 그녀가 여진족이 아니라 하면 무엇이겠는가.
머뭇거리던 단이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여진의 말을 할 줄 알고, 여진의 영토 가까이에서 살아왔습니다. 또한 심 다점을 찾아온 대부분의 고객을 비롯하여 저를 거두어 키워주신 왕 할아버지 또한 여진족이시온데…….”
“여진의 말은 나 또한 할 줄 안다.”
“…….”
“나 또한 십수 년 동안 국경을 지키기 위해 압록 이북을 집 드나들듯 밟아왔고, 그러느라 여러 여진족을 마주하였다. 내가 죽인 것은 오로지 조선을 약탈하는 도적들뿐, 무고한 여진인들까지 전부 죽이진 아니하였지. 오히려 굶어 죽어가는 이들을 도운 적도 있다.”
차가운 말씨와 다르게 손등을 덮은 온기는 무척이나 따듯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여진족인 것이냐.”
소문으로부터 너를 지킬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주겠다는 것처럼.
“너는, 정녕 여진족이 맞느냐.”
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왔다.
그제야 결이 했던 질문의 의도를 깨달은 것이다.
혈육도, 그녀를 아는 지인도 없는 이곳에서 단이가 여진족이란 걸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 자신조차도.
“네가 너 스스로를 여진족이라 증명할 방법이 없듯, 누구도 네가 조선인이 아니라 증명할 방법 또한 없을 것이다.”
“하나 결. 증좌가 없다는 주장만으론 소문을 덮을 수 없을 걸세.”
“그러니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들어줘야지.”
“이야기라니?”
성조가 반문하자 결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저쪽의 소문을 믿는 이가 있다는 건, 곧 우리의 소문을 믿을 이도 있다는 뜻이다.”
“소문을 소문으로 덮자……. 이 말인가?”
“그래.”
결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던 성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모험이긴 해도 아예 승산이 없는 방법은 아니야.”
희망이 보이자 단이의 눈에도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하면 저는 이제부터 어찌하면 되어요?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시어요. 뭐든 할 수 있어요.”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기세라.
결은 들썩이는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지금은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자. 섣불리 나섰다간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결의 말이 옳아. 불씨가 살아날지 꺼질지는 함부로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 조금 지켜본 다음에 불길이 번질 것 같으면 그때 움직이도록 하자꾸나. 그동안 이야기를 뒷받침할 재료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성조가 한쪽 눈썹을 까딱이며 눈매를 예리하게 만들었다.
“풀무질을 하는 이가 누구인지도, 알아봐야 할 것 같고.”
아무리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지만, 그 발 없는 말에게 처음 박차를 가한 이가 분명히 있을 터.
소문의 근원을 찾고 그 근원을 메꾸는 것이 급선무였다.
결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군사들을 추궁하여 소문이 어디서부터 흘러나왔는지 알아보면 분명 그 꼬리를 밟을 수 있을 것이다.
“심 다점을 운영할 당시 조선 고객들도 있었다고 하니, 네가 그 고객들에 대해 찾아봐줘야겠다.”
“그건 내 전문이지. 걱정 말게. 전부 싹 끌어모아 올 테니.”
결과 성조의 든든한 모습에 단이의 마음도 한결 나아졌다.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이 남아 있긴 하였지만, 저 두 사람이라면 분명 이 소문을 잠재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거늘.
정작 사건의 원인인 그녀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여전히 죄송하였다.
단이는 무력하기만 한 제 두 손을 맞잡으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나리들께서 번거로운 일을 떠맡으셔서…….”
그 사죄에 결과 성조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단이를 바라보았다.
성조는 부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에이, 이게 어찌 다동 너 때문이냐? 함부로 헛소문을 퍼트린 가벼운 주둥이들 때문이지. 그것들은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떠서 살 인간들이다.”
“하오나, 애초에 제가 조선 사람이라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어요.”
단이의 고개가 조금 더 밑으로 숙여졌다.
그때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였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리 소문이 날 줄 알았다면.
하여 결을 난처하게 만들 줄 알았다면.
결을…… 연모하게 될 줄 알았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리께 솔직하게 말씀드렸을 텐데…….’
후회는 또 다른 후회를 낳아 단이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겨우 달래었던 단이가 다시금 시무룩해지니 결도 자연 마음이 안 좋아졌다.
단이의 움츠러든 어깨를 눈에 담던 결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존재는 아무 죄도 없다.”
“…….”
“너를 이용하여 어떻게든 나를 흠집 내려는, 그들이 잘못한 것이지.”
단이가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에겐 살고자 한 발버둥에 불과했다.
살기 위해서. 살고 싶어서.
그것이 지켜줄 이 하나 없는 그녀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이었으니까.
‘만일 제가 조선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하셨을 것입니까?’
‘죽였겠지. 살릴 이유가 없으니.’
그리고 그 거짓을 이끌어낸 건 다름 아닌 결, 자신이었으니.
‘어찌 보면 이 일의 발단은 나일지도 모르겠군.’
결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단이를 보았다.
투명하리만치 말간 눈망울 속엔 여전히 두려움과 미안함이 어려 있었다.
조선인이 아니라면 살릴 이유가 없다는 말도.
그리고 이 아이를 믿지 않는다는 말도.
모두 단이를 이리 마음에 품게 될 줄 알았더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하나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믿음을 줄 수밖에.
“지난 몇 개월간 네가 우린 차는 나를 살리는 것이었다. 네가 나를 해하려 하였다면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을 테지. 아무리 많은 제약이 걸려 있다 한들, 그 틈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니.”
허공을 배회하던 단이의 눈길이 그제야 결에게로 향하였다.
“하나 넌 그러지 않았다.”
“…….”
“그것이 나의 증좌다. 네가 나에게, 이 조선에게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단이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내가 나를 믿는 것보다 더 나를 믿어주신다던 분이다.
그 헤아릴 수 없는 믿음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며, 또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물빛이 아른거리는 눈으로 결을 마주 보던 단이가 이내 각오를 다지듯 굳센 눈빛을 보였다.
“네. 저는 절대로 나리께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어요.”
“…….”
“저는, 나리의 사람이니까요.”
지금 이 순간 단이를 정의하는 건 여진족도, 이방인도 아니었다.
결의 사람.
그것이 그녀의 존재를 정의하는 유일한 단어였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존재의 의의.
“…….”
그런 단이를 옆에서 묘한 눈길로 바라보던 성조가 이내 시선을 갈무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바로 움직이도록 하겠네. 이런 일은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부탁한다.”
“나만 믿게. 다동, 너도 너무 걱정 말고.”
성조는 부러 입가를 길게 늘이며 단이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금방 다 지나갈 거라는 듯이.
“괜히 의기소침해 있지 말고, 이럴 때일수록 더 당당하게 다녀야 한다. 알겠느냐?”
단이의 머리에 꽂힌 옆꽂이가 그의 손바닥을 따끔하게 찔렀지만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아픔보다 이 아이가 웃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처음엔 짓궂은 손길에 눈을 흘기던 단이도 이내 웃으며 성조를 보았다.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것이어요. 저는 당당합니다.”
“그래. 장하다.”
그런 단이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성조가 먼저 소다옥을 나섰다.
결 역시 단이를 혼자 두기 걱정되었지만,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단이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아무 걱정 말거라. 이 일은 나와 성조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
어깨에 닿은 따스한 체온이 손등을 덮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불안을 가라앉혀 주었다.
나리를 믿었다.
내가 나를 믿는 것보다 더.
고개를 끄덕인 단이는 표정을 다잡았다.
우는 것도, 의기소침해 있는 것도 이 상황에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어요.”
단이는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저도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보겠습니다.”
결코 혼자가 아니니까.
결이, 곁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