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날 이후, 단이에 대한 소문은 완전히 상반된 이야기가 맞부딪치기 시작하였다.
하나는 여진족인 단이가 일부러 조선에 위해를 가하기 위해 결에게 접근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가족을 따라 조선에서 도망쳤던 단이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고 싶어 결의 다비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후자의 소문은 단이가 처음 결을 만났을 때 했던 말과 비슷한 터라.
결과 함께 체탐자로 있었던 군사들은 자연스럽게 그 말을 더 믿고 직접 증언까지 하기 시작했다.
충돌은 혼란을 야기하고, 혼란은 곧 피곤을 불러오니.
아예 소문에 대한 관심을 거두는 이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받은 돈이 있는 촉새는 그럴수록 더욱 음지에서 말을 옮기고 다녔다.
그 탓에 발 없는 말은 이전보다 더 조용히, 그러나 더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결국 소문은 훈련원뿐만 아니라 궐내에까지 발을 들이기에 이르렀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던 천 상궁이 몸을 일으키자, 선정이 심각한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껏 단이에 대해서 이상한 점을 거의 느끼지 못했던 그녀였다.
물론 간혹 대화를 하다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저 어릴 적 조선을 떠나 그러겠거니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하였다.
그렇기에 소문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조선에 위해를 가하기 위해 모두를 속여 왔다니.
‘그것도 서결 장군을 불순하게 유혹하여…….’소문을 곱씹던 선정은 곧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이건 분명 거짓 소문일 게야.”
“하나 옹주 아기씨, 이미 저잣거리에까지 소문이 파다합니다.”
“설령 그 아이가 정말 조선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의도를 갖고 조선에 들어왔을 리는 없어.”
순박하고 정이 많은 아이다.
어쩔 땐 세상에 이렇게 착하고 어진 아이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생각도 깊은 아이다.
한데 그 모든 게 거짓 연기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누군가 일부러 거짓 소문을 퍼트린 게 분명하네.”
“누가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조정에…… 서결 장군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가 한둘이던가.”
그 말을 한 선정의 얼굴이 서서히 흐려졌다.
새삼 자신이 마음에 품은 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실감이 난 탓이었다.
한때 역모의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은 아버지와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한 가족들.
벌써 십수 년이 지났지만 선정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한 가문의 씨를 말리다시피 하여 몰락시킨 사건이니.
아마 남은 결마저 눈앞에서 치우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 그 이야기는 단이 앞에선 절대 내색하지 말게. 우리라도 그 아이를 믿어줘야지 않겠나.”
“예, 옹주 아기씨.”
“어서 단이를 데려와주게.”
곧 천 상궁이 화선당 밖으로 나갔다.
낮게 한숨을 내쉰 선정은 착잡한 마음을 지우며 단이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잠시 후.
“옹주 아기씨!”
단이가 해맑게 웃으며 화선당 안으로 들어왔다.
소문과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시무룩해 있을 줄 알았더니, 다행히 그녀는 이전처럼 밝은 모습이었다.
“자, 어서 들어오거라. 내 오늘도 네게 보여 주려 갓 화공의 삽화 책을 구해왔다.”
선정은 그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단이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담소를 나눌 때에도 일부러 소문에 관한 것은 일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단이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소대로 굴기에, 혹여 별일이 아닌 것을 괜히 걱정하였나 싶을 정도였다.
두 여인은 여느 때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평소보다 이르게 업무를 마친 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디 단이를 다시 데려오는 건 화선당의 상궁이나 훈련원의 군사였지만, 오늘은 그가 직접 갈 생각이었다.
소문도 소문이거니와, 일전에 성조가 위험성을 경고했던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확실히 안일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여 결은 직접 단이를 데려오기 위해 화선당이 있는 쪽으로 향하였다.
광화문을 지나 걸음을 걷는 그에게로 시선들이 하나둘 모아졌다.
언짢아하거나, 혹은 신기해하거나.
대놓고 쯧쯧 혀를 차는 이까지 있었다.
아마 저들도 떠도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결이 고개를 돌리면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자리를 떠났다.
차갑게 주위를 본 결은 다시 단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직접 오길 잘했다 생각하며.
이런 시선을 단이 혼자 받으며 왔을 거라 생각하면 그것 자체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으니까.
이윽고 결의 발이 멈춰 섰다.
허락도 없이 함부로 옹주방에 발을 들일 순 없었기에 그는 단이가 지나갈 길목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화선당에 다녀온 날이면 선정과 있었던 일화를 즐겁게 풀어내는 단이라.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재잘거리려나.’아기 새가 짹짹거리듯 수다를 떠는 그녀를 떠올리니, 언짢았던 마음은 사라지고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얼른 왔으면 좋겠는데.’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길 잠깐.
오래지 않아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여인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옹주가 직접 배웅을 하는가.
선두에 있는 선정의 모습에 결은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서결 장군……?”
앞서 걷던 선정은 예기치 못한 결의 등장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가 직접 단이를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갑작스럽게 마주친 그의 모습은 그녀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을 더 신경 써서 입을 것을.
머리 모양은 괜찮은가?
얼굴에 다과 가루가 묻지는 않았는가?
찰나에 제 모습을 살핀 선정은 설레는 표정을 빠르게 가다듬고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결을 향해 걸었다.
그러곤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장군이 예까진 어쩐 일로 왔는가?”
“제 다비를 데리러 왔습니다.”
“혹 내가 시간을 많이 지체한 것인가?”
“아닙니다. 군사들은 따로 할 일이 있어 제가 직접 온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선정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이유가 무엇이든, 우연히 그를 마주쳤다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기뻤다.
쿵쾅쿵쾅 세차게 뛰는 가슴이 기분 좋은 뻐근함을 선사하였다.
‘함께 차를 마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헤어지는 길목에서 마주쳤다는 게 이 순간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선정은 조금이라도 더 결을 눈에 담다가 뒤늦게 단이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이만 가보거라, 단이야. 다음에 또 부르마.”
“예, 옹주 아기씨. 살펴 가시어요.”
결이 단이를 데리고 막 돌아서려던 찰나.
선정이 용기를 내어 그를 불렀다.
“서결 장군.”
“하문하십시오, 옹주 아기씨.”
“혹…… 후에 시간이 된다면 말일세.”
선정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그대도, 단이와 함께 차를 마시러 올 수 있겠는가?”
선정의 한마디에 주변에 있던 천 상궁과 다른 나인들까지 놀란 빛을 보였다.
결 역시 뜻밖의 이야기에 선뜻 답을 하지 못하였다.
옹주가 한낱 장군에게 먼저 차를 마시자 청하였다.
그저 단순한 의도로 넘기기 어려운 문제였다.
이 순간 짧게 흐른 정적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은 건 단이뿐이었다.
잠시 선정을 바라보던 결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소장은 그저 다비가 올리는 대로 아무 차나 마실 뿐입니다. 옹주 아기씨의 차를 받기엔 한미한 입이라, 결례를 끼치지 않을까 저어되옵니다.”
결은 정중히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그 뜻을 바로 알아챈 선정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얼른 답했다.
“내가 그대를 부담스럽게 한 모양이네. 그저 짧은 생각으로 권한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헤아려주셔서 황감하옵니다, 옹주 아기씨.”
허리를 숙인 결이 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뒤를 따라 걷던 단이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선정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선 채 이쪽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고 있었다.
짧은 순간 그녀의 눈에 스쳤던 아릿한 감정.
익숙한 표정. 익숙한 눈빛.
낯설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단이는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졌다.
무언가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하기까지 하였다.
‘기분이 왜 이러지…….’소다옥에 돌아오고 나서도 가슴에 들어앉은 묘한 감정은 좀처럼 풀리질 않았다.
단이는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힐긋 결을 보았다.
그러다 문득 아까 보았던 선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과 미소.
수줍음이 담겨 있던 목소리.
그리고 안타까운 눈동자.
그 순간, 단이는 이 묘한 기분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와…… 같아.’단이의 눈동자가 옅게 떨렸다.
아까의 선정은 결을 볼 때 자신의 모습과 꼭 같은 모습이었다.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은.
어쩌면, 그 마음까지 똑같은.
큰 바위가 들어앉은 것처럼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해졌다.
‘옹주 아기씨께서 언제부터 나리를…….’순간 정신이 딴 데 팔리는 바람에 차가 잔에 넘치게 따라지고 말았다.
“아! 소, 송구하옵니다.”
단이는 허둥거리며 얼른 넘친 차를 닦아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민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라.
결이 단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혹 화선당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이냐.”
“예? 아…… 아니어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고개를 내저은 단이는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다시 잔을 채웠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선정은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니, 아무 사심 없이 원래의 성정대로 결을 대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까.’단이는 차를 마시고 있는 결을 바라보았다.
순간 결의 옆에 선정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누구보다 잘 어울릴 것 같은 한 쌍이었다.
무엇보다 선정은 옹주였다.
겨우 천한 다비인 자신과 다르게, 결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옹주.
“…….”
그렇게 생각하니 순간 현실이 시릴 만큼 피부에 와닿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밀려난 기분이었다.
감히 꾸어선 안 될 꿈을 함부로 꾼 것만 같은.
단이는 입술을 꾹 맞다물며 서러워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부디 이 모든 게 착각이기를.
선정이 결을 바라본 게 아니었기를.
결의 눈이, 선정에게 향하지 않기를.
그저 간절히 바라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쪼르륵.
은은한 백자 잔 안에 말간 차가 향과 함께 담겼다.
성조는 찻잔 속에서 피어오르는 은은한 향을 느끼며 차를 음미하였다.
제다 솜씨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자신이 있건만.
그 사이 단이의 차에 입맛이 길든 걸까.
이상하게 예전만큼 자신의 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자에는 항상 그 아이가 내린 차만 마신 까닭이었다.
“……이리 혼자 차를 마시니, 더 보고 싶네.”
쓸쓸히 중얼거리던 그때.
정회가 돌아왔는지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평소라면 영상 대감 무리와 밤늦게까지 회합을 가지시느라 인경이 울릴 때쯤에야 겨우 들어오시거늘.
오늘은 웬일로 일찍 대문을 들어서신다.
“……아들 된 도리로서 인사는 드려야겠지.”
억지로 몸을 일으킨 성조가 방을 나선 그때.
뜻하지 않게 정회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섬돌에 내려선 성조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얘기 좀 하자. 들어오거라.”
선택의 여지는 주지 않겠다는 듯 정회가 성조를 지나쳐 먼저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아버지를 본 성조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서탁에 책 대신 자리한 차제구에 정회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방을 본 그는 묵직한 신음을 흘리며 상석에 앉았다.
그러곤 성조가 제대로 앉기도 전에 날카로운 음성을 내뱉었다.
“어쭙잖은 소꿉놀이는 이제 그만두거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소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서결과 그만 연을 끊으라는 뜻이다.”
그 말에 성조가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날 서린 침묵이 공기 중을 부유하며 두 부자 사이를 맴돌았다.
말없이 정회를 응시하던 성조는 고민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단칼에 거절하였다.
“그래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왜 없느냐. 그놈 때문에 너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데!”
버럭 언성을 높인 정회가 짓씹듯 말을 이었다.
“영상 대감은 지금보다 더 적나라하고 위험한 방법으로 서결을 치려 할 것이다. 그놈 옆에 있다가 너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음을 어찌 모르느냐!”
“그래서.”
온기라곤 일절 찾아볼 수 없는 성조의 눈동자가 정회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벗을 저버리셨습니까?”
불같이 화를 내던 정회의 입술이 차갑게 굳었다.
“아버지 몸 하나 건사하자고, 의형제라 하던 벗을 배신하셨습니까?”
성조의 적나라한 일침에 정회가 두 주먹을 굳게 쥐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끓어오르는 분노로 옅게 떨려왔다.
“내가, 고작 내 몸 하나 아까워서 그리했는 줄 아느냐.”
“그럼 무엇 때문이셨습니까.”
“너 때문이었다! 너는 나와 다르게 살길 원해서, 나처럼 힘들게 올라가지 않고 편하게 오르길 원해서!”
마지막까지 굴복하지 않던 정회를 흔든 준백의 패는 바로 성조였다.
성조의 입신양명.
시작부터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 밑바닥부터 어렵게 어렵게 오르던 정회에게 하나뿐인 아들의 탄탄대로는 꿈과도 같은 일이었다.
가문의 명성과 아들의 미래.
누군가는 가문을 바쳐서라도 대의를 지키려 할 때, 그는 대의와 신의를 저버리고 가문과 자식을 택하였다.
뒤늦게 후회하였을 땐 이미 발을 뺄 수 없을 정도로 준백에게 깊이 얽힌 뒤였다.
하나 성조가 보기엔 그 또한 정회의 욕심이었을 뿐이다.
“저 때문이라 하지 마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성조는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정회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 존경하였으나, 이제는 그 누구보다 증오하는 아버지를.
“저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살 것입니다.”
“…….”
“제 모든 걸 잃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벗을 지킬 겁니다.”
설령 가문을 저버려야 할 날이 올지라도.
나 자신을 버려야 할 날이 올지라도.
아버지의 죄업을 대신 갚을 생각이었다.
성조는 그대로 옷과 갓을 챙겨 뒤돌아 방을 나섰다.
곧장 말을 끌고 밖으로 나온 성조는 집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졌다.
한참을 내달려 한적한 강가에 다다른 그는 울분 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자신 때문에 그 끔찍한 비극에 발을 담갔다는 아버지의 말이 그의 가슴에 가시처럼 깊이 뿌리를 박았다.
또 하나의 죄책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