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땅거미가 짙게 내린 길 위로 말발굽이 하나둘 자국을 남겼다.
퇴청을 한 성조는 집 대신 혜정교 쪽으로 말을 몰고 있었다.
운종가 끄트머리에 위치한 혜정교는 깊은 밤이라 그런지 고요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곳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곧 멀리서 사내 하나가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패랭이 모자를 쓰고 등짐을 진 사내가 성조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성조 도련님!”
“석 씨인가?”
“예, 접니다요!”
곧 달빛 아래 반가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부상단에 속해 있는 등짐장수 석 씨였다.
부상단의 조직력은 조선팔도 전국에 퍼져 있는 데다 그들의 결속력과 정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터라.
하여 성조는 정보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석 씨의 도움을 적잖이 받곤 하였다.
석 씨는 진심으로 반가움을 드러내며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하였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도련님? 최근에 여진족 정벌을 위해 북방에 다녀오셨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리 바로 찾아뵐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이왕이면 혜정교보다는 객점에서 한잔하고 싶었네. 일단 인사는 뒤로하고, 한시가 급하니 본론부터 말하지.”
성조는 석 씨에게 종이 하나를 건네었다.
거기엔 석 씨가 따로 알아봐줘야 할 것들이 적혀 있었다.
“심 다점이라면, 압록 이북에 있는 치원이란 땅에 있던 다점 아닙니까?”
석 씨의 말에 성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자네도 그 다점을 아는가?!”
“가본 적은 없고 오래 전에 얘기만 몇 번 들어보았습죠. 차 좋아하는 양반들이 알음알음 찾는 곳이라던데, 거기에 조선말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계집이 있다고요.”
“옳거니! 그래, 내가 원하는 정보가 바로 그거네!”
“그 계집이요?”
“정확히는 계집에 대해 아는 이를 찾고 있지.”
“그럼 그 다점에 직접 가보면 되겠군요.”
석 씨는 간단한 문제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 성조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불가능할 걸세. 이미 올 초에 불에 타 없어졌다고 했거든.”
“아이쿠, 이런…….”
“하니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뒤져서라도 심 다점의 주인을 아는 상인이 있는지 찾아봐 주게. 거기에 적힌 이들이 심 다점에 자주 들르던 조선인 상인이라 하니, 그들을 우선적으로 찾아봐 주고. 정보 값은 후하게 쳐주겠네.”
“예, 도련님. 찾는 즉시 곧바로 연통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석 씨가 깊이 허리를 숙이곤 서둘러 길을 떠났다.
하나 석 씨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성조는 쉬이 가시지 않는 불안과 초조함에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다.
***
그저 찰나의 뜬소문으로 사라지길 바란 건 욕심이었을까.
단이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를 향한 시선은 날이 갈수록 더 날카롭게 변했다.
소문이 음지로 들어가면서 더 노골적으로 과장이 된 것이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불편한 눈총은 둘째 치더라도 앞에서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이까지 있었다.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
단이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꿋꿋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였다.
하나 시선이 주는 무게를 감당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터라.
예전엔 결을 기다리는 동안 소다옥 앞에 나가 군사들이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거나 주변을 산책하곤 했건만.
이제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눈치가 보여 마음껏 나갈 수도 없었다.
꼭 잘못해서 갇힌 사람인 양.
하루가 끝나갈 때쯤이면 참아왔던 설움이 울컥 밀려오기도 하였다.
‘내가 진짜 잘못한 걸까…….’소다옥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단이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결과 성조를 믿었다.
분명 두 사람이라면 이 일을 잘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해결되기 전까진 두려움과 막막함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당하다고 날카로운 오해의 눈길에 상처를 받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낸 걸까.”
단이는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며 실마리를 찾아보았다.
누군가에게 흠을 잡힐 만한 일은 없었는지, 혹 유달리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이가 있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원한을 사거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포로들의 대화를 알아듣고 그들의 계획을 결에게 알린 것뿐.
‘그때 라이콴족의 언어를 사용한 게…… 결국 불씨가 된 거겠지.’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착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그 일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결을 위해 감내하겠다고 각오했던 일이었으니까.
‘막상 일이 벌어지니 무엇부터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큰일이지만…….’단이는 또 한 번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덧 퇴청을 앞둔 때라.
단이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볕에 말려놓은 차제구를 거두러 소다옥을 나섰다.
그런데 저 앞에 웬 군사 네 명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단이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겁을 먹은 단이가 두어 걸음 물러나자, 물러난 만큼 더 가까이 다가온 그들이었다.
“어, 어찌 이러시어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지자 단이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들 중 하나가 선두에 나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너 때문에 장군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보기가 어려워, 직접 진실을 밝히기 위해 왔다.”
“진실을 밝히다니요?”
“지금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너도 아는 바가 있겠지.”
소문이란 말에 단이의 가슴이 철렁하였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벌써부터 단정을 내린 표정들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단이는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말하였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제 소문을 퍼트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뜻인가?”
여기서 밝혀도 괜찮은 것일까.
솔직하게 말하면 이들은 전부 믿어줄까.
고민하며 머뭇거린 순간, 뒤에 있던 한 군사가 그럴 줄 알았다며 빈정대는 말투로 말하였다.
“거 봐. 선뜻 말을 못하는 거 보니, 분명 찔리는 게 있는 거겠지.”
“그런 것 아니어요!”
“아니면?”
군사가 조롱하듯 입꼬리를 비틀며 말하였다.
“압록 이북 치원에서 혼자 살던 네가 정말로 조선인이라고?”
단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그는 제 추측이 맞았다는 생각에 취했는지 하면 안 될 발언까지 하고 말았다.
“그것도 아니면, 네가 장군을 몸으로 유혹하여 몰래 조선으로 오고 군사 기밀까지 빼가려 했다는…… 윽!”
하지만 그는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저만치 날아가고 말았다.
놀라 옆을 바라보니 그곳엔 진위가 서 있었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는 거 아니다, 새끼야.”
“진위 나리…….”
힐긋 단이를 본 진위는 여전히 분이 삭이지 않는 얼굴로 옆을 보았다.
그의 등장에 남은 군사들이 바짝 언 자세로 정면만 응시하였다.
맞은 군사 역시 재빠르게 일어나 대열에 섰다.
진위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살벌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대답 여하에 따라 장군께 갈지, 아니면 내 선에서 끝내버릴지 결정할 거다.”
“…….”
“쟤한테 뭘 하려 했던 거야, 너희들.”
선두에 나섰던 군사가 겁에 질린 얼굴로 답을 하였다.
“혀, 현재 훈련원 내에 서결 장군의 명예를 더럽히고 저희의 기강을 어지럽히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여 진상을 규명하고자 소문의 장본인을 찾아온 것입니다.”
“진상 규명, 소문의 장본인.”
군사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한 진위가 으르렁거리듯 이를 드러냈다.
“너희가 말한 진상 규명이 계집 하나를 두고 사내 여럿이서 희롱하는 것이냐?”
“희롱이 아니라……!”
“그럼, 왜, 장군께 가지 않고, 이 애한테 온 거야!”
차례로 정강이를 까인 군사들이 악 소리도 못 내고 곧바로 허리를 폈다.
진위는 단이에게 입에도 담지 못할 말을 하였던 군사의 정강이를 한 번 더 까며 불같이 화를 내었다.
“너희들의 행동이 장군의 명예를 더 더럽혔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 것이냐!”
진위의 불호령에 군사들의 고개가 밑으로 숙여졌다.
그들이 정말로 자신들의 장군을 걱정하고 소문에 대해 분개하였다면, 단이가 아닌 결을 찾아가는 것이 옳았다.
단이를 조선으로 데려온 것도, 다비로 삼아 자신의 곁에 둔 것도 전부 결이었으니.
하지만 그들은 어려운 쪽을 택하기보다는 쉬운 쪽을 택하였다.
진실을 가릴 용기는 없으면서 쓸데없는 호기심이 앞선 결과였다.
“지금 도는 소문은 명백히 허위이고 과장이며 의도적으로 악의를 품은 것이다. 한데 감히 장군의 밑에서 무예를 익힌다는 것들이 그런 확인도 안 된 뜬소문을 가지고, 그것도 치사하게 사내 여럿이서 계집 하나를 몰아세워? 감히 장군의 앞에선 찍소리도 못하면서!”
잘못한 것을 짚으면 짚을수록 더 괘씸한지, 진위는 한 번 더 군사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본디 군사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것이지. 내 오늘 너희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보이겠다. 따라와!”
진위가 군사들을 데리고 가려던 찰나.
“……장군.”
성조와 함께 서 있는 결을 발견한 진위가 고개를 숙였다.
뒤에 선 군사들은 저승사자라도 본 듯 아예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벌벌 떨기 시작했다.
서늘한 눈으로 그들을 훑던 결의 눈동자가 그 뒤에 있는 단이에게로 향했다.
울음을 꾹 참고 있는 표정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자신이 무능력하여 벌어진 일인 것 같아 더욱 분이 차올랐다.
결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터져 나오려는 화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다시 들어 올린 눈꺼풀 밑으로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눈빛이 시리게 흘러나왔다.
“그렇게 소문을 좋아들 하면서, 처음 내 앞에서 입을 놀린 자가 어찌 되었는지는 못 들은 모양이지.”
전날 처음 결에게 붙잡혔던 군사는 서른 도의 곤장을 받았으며, 소문의 출처를 알기 위해 계속 문초를 당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하필 올봄에 실시된 도시(都試)에서 선발된 신입이라.
자신에게 소문을 흘린 자의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알지 못한 탓에 수사는 난항을 겪고 있었다.
동료 하나가 입 하나 잘못 놀린 죄로 무슨 꼴을 당했는지도 모르고 저들은 이리 함부로 일을 벌인 것이었다.
“자, 장군……. 소병이 감히, 짧은 생각으로 삿된 생각을…….”
단이를 대놓고 희롱하였던 군사는 진위에게 맞아 붉게 부푼 얼굴을 한 채 덜덜 떨며 사죄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얼음송곳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그에게 가닿았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황이었다.
저 더러운 입이 감히 함부로 상처를 입힌 거겠지.
너무도 귀하고 소중하여 나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아이를.
내 목숨보다 더 귀히 여기는 아이를.
“저 아이는 곧 나다.”
내가 마음에 품은 아이를.
“너희는 오늘 나를 희롱한 것이고, 나를 모욕한 것이고, 내 명예를 더럽힌 것이다. 감히 한낱 군졸이 장수를 욕보였으니, 나는 너희 또한 군법으로 엄히 다스려 온 군에게 나의 위신을 보일 것이다.”
“자, 장군!”
“군법에 예외란 없다. 끌고 가.”
“예, 장군.”
진위가 곧 네 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갔다.
소란이 사라진 소다옥 앞엔 잠시 쓰라린 정적만 남게 되었다.
결은 걸음을 옮겨 단이의 앞에 다가갔다.
울음을 참으려 꾹 맞다문 입술이 잇새에 아프게 짓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칼로 베이는 것보다 더 결을 아프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뒤돌아서 놈들을 전부 참하고 싶었다.
“……괜찮으냐.”
어렵게 꺼낸 한마디에 단이가 눈을 꼭 감으며 감정을 삼켰다.
그러곤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놀라긴 하였지만, 괜찮습니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것이 결을 더욱 못 견디게 만들었다.
이제껏 소문에 연연한 적이 없었다.
살인귀라는 소문에도, 가족들을 다 잡아먹고 혼자 살아난 괴물이란 소문에도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으니까.
아니라 하여도.
나도 괴롭다 하여도.
하여 소문이란 것에 아주 오랫동안 무감각하게 살아왔다.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리.”
이 아이를 두고 떠도는 삿된 소문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이 아이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는 것에, 이 아이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것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나리……!”
눈빛을 굳힌 결이 단이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