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결, 어디 가는가!”
성조의 부름에도 결은 멈추지 않고 단이와 함께 훈련원 마당으로 향했다.
가뜩이나 조금 전 일어난 소란에 기십의 군사들이 한데 모여 있던 터라.
그들은 난데없이 다비의 손을 잡고 나타난 결의 모습에 놀라 시선을 집중하였다.
“나리……!”
쏟아지는 눈길에 단이가 손을 빼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 강한 악력이 느껴질 뿐이었다.
“모두 듣거라.”
결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그들의 이목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위엄이었다.
결은 잡고 있던 단이의 손을 앞으로 이끌어 모두가 그녀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곤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전해질 수 있도록 힘주어 말하였다.
“나에게 있어 이 다비는 없어선 안 될,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다.”
그가 마실 수 있는 것이라곤 단이가 올리는 차가 유일하니 그리 공표하는 것도 과언은 아니건만.
단이는 이상하게 이 순간 가슴이 크게 뛰었다.
“내가 직접 택한, 나의 사람이란 뜻이다.”
그녀의 손을 감싼 온기는 전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그가 말한 소중한 존재라는 게 다비 그 이상을 뜻하는 것 같아서.
마치, 마음속에 담아둔 고백 같아서.
심장은 눈치도 없이 세차게 뛰고 말았다.
허허벌판에 떨어진 자신에게 가장 크고 튼튼한 울타리가 생긴 기분이었다.
단이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목에 꾹 힘을 주어야만 했다.
“앞으로 누구든 나의 다비에 대하여 함부로 세 치 혀를 놀린다면, 이는 곧 나를 음해하는 것이라 간주하고 모두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알겠느냐.”
“예, 장군!”
군사들의 우렁찬 소리가 훈련원 안을 가득 메웠다.
결은 단이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까의 설움이 끼어들 틈도 없이 견고하게 마주 잡은 손이었다.
“또한 소문을 퍼트린 자를 고하는 이에겐 상을 내릴 것이다.”
그 말에 군사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각자의 시선이 말을 전한 이들에게로 향하였고, 그들은 서로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기 바빴다.
“…….”
이를 지켜보던 촉새가 까득 이를 갈았다.
얼굴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였지만 꽉 말아 쥔 손은 긴장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근처에 있던 한 동료가 힐끔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맨 처음 소문을 퍼트릴 때 그 자리에 있던 동료라.
그와 눈이 마주친 촉새는 순간 심장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마른 들판에 번진 불이라 하더라도 맨 처음 불을 지핀 불쏘시개가 있는 법.
저 동료가 불쏘시개가 누구인지 발설하는 순간 자신은 끝장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촉새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쳐 그 자리를 벗어났다.
훈련복을 모두 벗어던진 그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훈련원 밖으로 도망쳤다.
‘젠장.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인생 종 치게 생겼잖아!’
그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집으로 들어가 재빨리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짐이라 해봤자 갈아입을 옷 한 벌과 일전에 준백에게서 받은 돈주머니가 전부였다.
“이 돈만 있으면 돼. 여기서 절반 정도만 천 냥 만 냥 밑천으로 삼으면 몇 배로 불릴 수 있어.”
광기 어린 눈으로 웃음을 흘린 촉새는 그것을 품에 안고서 얼른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나 비좁은 골목길로 들어선 그의 발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아무도 촉새를 본 사람이 없게 되었다.
***
이튿날.
훈련원 판관 집무실에 홀로 있던 결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손을 말아 쥐니 전날 잡았던 단이의 온기가 이 안에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듯하였다.
“나에게 있어 이 다비는 없어선 안 될,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다.”
순간적인 충동이었으나 전부 진심이었다.
그나마 이성을 빨리 되찾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자신이 마음에 품은 여인이란 말까지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순간의 결은 오로지 단이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겪은 아픔을 죄 가져오고 싶을 만큼.
“…….”
낮게 한숨을 내쉰 결은 다시 일에 몰두하였다.
그런데 군사들의 출결을 살피던 눈동자가 어느 한곳에 멈췄다.
군사 하나가 말도 없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촉새’라 적힌 이름 위에 그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머물렀다.
결은 곧 습독관 한 명을 불러 촉새에 관해 물었다.
“예,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잖아도 평소 가까이 어울리던 이에게도 물어보니 별다른 말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자를 불러주게.”
“예.”
곧 습독관이 촉새와 가까이 지냈다는 군사를 데려왔다.
그는 결의 집무실에 들어설 때부터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는 것처럼.
일순 성조와 나눈 대화가 결의 뇌리를 스쳤다.
‘만일 소문이 누군가의 계략으로 시작된 것이라면, 분명 사주에 따른 대가가 있을 걸세.’
‘돈을 받았을 거란 얘기군.’
‘맞네. 최근 훈련원 내에서 갑자기 출처불명의 많은 돈이 생긴 사람이 있다면, 그를 제일 먼저 의심해야 할 걸세.’
군사를 유심히 보던 결은 그에게 딱 하나의 질문만 하였다.
“촉새란 자에게 최근 큰돈이 생긴 일이 있느냐.”
그 말에 군사의 얼굴이 놀란 듯 굳었다.
그는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더니, 긴 고민 끝에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사실을 고하였다.
“촉새가……! 소문을 퍼트린 장본인입니다.”
“…….”
“촉새는 평소 노름에 빠져 녹을 탕진하기 일쑤였고, 또 고리대금에까지 손을 대어 빚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큰돈이 생겼다며 그것을 죄 갚을 수 있다 큰소리를 쳤다는 것이다.
처음엔 없는 형편에 자존심만 센 자라, 거짓말이라 생각하고 믿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평소엔 이리 빌붙고 저리 빌붙고 하던 자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기루에서 한 턱 크게 쏘기까지 했단다.
그러면서 난데없이 결과 단이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고.
“처음엔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저 넘겼는데, 다음날 와보니 이미 훈련원에도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그자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을 가능성은 없느냐.”
“훈련원 밖이라면 몰라도 이곳에서 처음 입을 연 건 촉새인 게 분명합니다. 눈에 띄게 말을 옮기던 신입에게 물어보니, 그자가 말한 외향이 촉새와 꼭 같았습니다. 저희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말이 떠돈 것도 제가 처음 촉새에게 이야기를 들은 다음날부터였습니다.”
그렇다면 촉새가 소문의 출발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돈의 출처는 혹 말했더냐.”
“물어보긴 하였지만,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순간 돈은 물론 제 목까지 날아간다며 치를 떨었습니다.”
“갈 만한 곳은.”
“태생이 고아에 미취한 자이고, 본디 한양 토박이라 달리 가는 곳은 잘 모르겠습니다.”
결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 돈까지 쥐여 주며 이런 일을 사주할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일을 벌이는군……. 남준백.’하나 준백이 사주하였단 명확한 증거 또한 남아 있지를 않으니.
지금으로선 사라진 촉새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
그날 저녁.
“그래. 결국 큰돈을 얻고 나서 사라진 군사가 있단 말이지.”
소식을 들은 성조가 퇴청하자마자 훈련원으로 찾아왔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예상이 적중하니 못내 씁쓸한 터라.
성조는 착잡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우리가 같이 영상 쪽을 더 면밀히 살펴보는 게 어떻겠나?”
“위험한 방법이다. 자칫 잘못했다간 너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어.”
“그저 집 주변만 살펴보자는 걸세.”
성조는 지금처럼 지나간 흔적만 찾는 방법으론 결코 준백을 잡을 수 없다며 결을 설득하였다.
아직 북방에서 결을 습격하였던 자객단들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상태라.
조금 더 과감하게 파고들 필요가 있었다.
“미적거리다간 또 저쪽에서 먼저 증거를 인멸하려 할 걸세.”
“촉새란 자가 다시 영상을 찾아갈 거라 생각하는 건가.”
“이제 그자가 믿을 구석이라곤 영상밖에 없을 걸세. 하지만 영상은 애초에 일을 사주할 때부터 꼬리를 자르고 시작했을 테니, 이 일에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거기에, 촉새가 화가 나서 남준백을 찾으러 갈 것이다.”
“바로 그걸세. 더 이상 잃을 게 없을 테니 행동 또한 과감해지겠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애초에 뒷배라곤 없는 자였고, 앞에 던져진 돈 몇 푼에 혹하여 이 일에 뛰어든 자일 테니.
만에 하나 정말로 준백의 사주를 받은 이라면 궁지에 몰릴수록 그를 다시 만나려 할 것이리라.
조금 무모해 보이긴 해도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한창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나리, 차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집무실 밖에서 작은 그림자와 함께 단이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성조는 말을 멈추고 손수 집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왔느냐, 다동.”
성조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맞이하였다.
단이의 얼굴엔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무어라 첫마디를 꺼내야 할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전날 일 때문에 여전히 속앓이가 심할 것이라 지레짐작한 탓이었다.
다른 이였다면 쉽게 가벼운 위로를 건넸을 것을.
오히려 단이의 마음을 더욱 헤아리려 하다 보니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로선 처음 겪는 것이었다.
위로가 어려운 상황도.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여인도.
“다동, 모르는 이들이…….”
모르는 이들이 함부로 떠든 말에 상처받지 말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려던 찰나.
‘내가 직접 택한, 나의 사람이란 뜻이다.’
순간 전날 보았던 장면이 스치듯 지나갔다.
결이 모두의 앞에서 단이의 손을 잡고 자신의 소중한 사람이라 말하던 모습이.
그저 소문을 막기 위함이 아닌, 마치 연정을 고백하는 듯하였던 그 모습이.
“…….”
단이가 받았을 상처보다 어찌 이것이 더 선명하게 마음을 짓누르는 것인지.
알량한 질투가 걱정보다 앞선 것이다.
성조는 잠깐이나마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단이에게 더욱 미안해졌다.
독한 술이라도 삼킨 듯 입안이 쓰고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그는 뻗으려던 손을 말아 쥐며 짧게 말을 맺었다.
“……그냥 잊거라. 개가 짖었다 생각하고.”
그 잠깐의 간극을 느낀 단이가 의아한 눈으로 성조를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입가를 늘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제는 조금 놀라긴 하였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결이 사람들 앞에서 했던 말이 내내 머릿속에 맴돌아 다른 건 신경 쓸 겨를조차 없는 그녀였다.
그만큼 결의 말은 그녀에게 큰 힘이었다.
어떤 일이라도 다 버틸 수 있을 만큼.
어떤 안 좋은 일도 다 잊어버릴 만큼.
앞을 보니 결 또한 죄책감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괜히 마음이 아릿해진 단이는 함께 흐린 표정을 짓는 대신 눈빛을 더욱 굳혔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당당하니 절대로 기죽지 않겠다고요.”
그러곤 두 사람을 향해 전보다 더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니 나리들께서도 절대 기죽지 마시어요. 나리들께서 힘을 잃으시면 전 누굴 믿고 힘을 냅니까?”
겁을 먹거나 잔뜩 풀이 죽을 줄 알았건만.
오히려 그녀가 자신들을 위로하니, 가라앉았던 결의 기분 역시 다시금 힘을 얻었다.
기특할 만큼 당차고 씩씩한 아이.
“너는, 정말 예상이 안 되는 아이구나.”
결은 그런 단이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를 당분간 훈련원에 데리고 오지 말아야 하나, 생각까지 하였건만.
단이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아이였다.
되레 힘을 얻을 만큼.
“그래. 널 봐서라도 더 힘을 내마.”
“네!”
환하게 웃는 단이의 머리 위로 성조의 손이 얹어졌다.
그는 헝클어트리듯 단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쪼그만 게 우리 둘보다 낫군그래.”
“저 그렇게 안 쪼그맣습니다.”
“넌 그렇게 쪼그맣다.”
또다시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에 결이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성조를 말렸다.
“그만. 차로 불씨 꺼지겠다.”
“꺼지면 내가 새로 불붙여 오겠네. 같이 갈 거지, 다동?”
“으아, 놓아주시어요!”
성조가 어깨동무를 하듯 단이의 목을 팔로 꽉 조이자, 결국 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내가 일어나게 만들지.”
“어어, 북방 귀신이다! 도망가자!”
“저는 놓으시라니까요!”
내내 무거운 분위기로 가라앉아 있던 집무실에 때아닌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세 사람은 각자의 복잡했던 문제들도 잠시 잊고 장난을 쳤다.
마치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한바탕 웃고 나니 당장 눈앞에 닥친 일들이 왠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함께라면, 전부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