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결국 단이에 대한 소문은 돌고 돌아 조정 대신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들은 모일 때마다 연일 소문에 대해 이야기하기 바빴다.
“여진족 아이를 조선인이라 속이고 몰래 들여왔다니. 그게 국경을 지키던 장수가 할 일이오?”
“듣기론 북귀는 처음부터 그 아이의 정체를 알았다 하던데.”
“그럼 여진족임을 알면서도 살려둔 거란 말이오?”
“그 왜, 북귀의 다동이 되면 데려가서 잡아먹거나 학대를 한다는 소문이 있었잖소. 그게 죄 여진족이라 그랬다고 하더이다.”
그러나 모두가 자극적인 소문에 휘둘리는 건 아니었다.
나이 지긋한 한 관료는 한낱 풍문에 조정이 연일 시끄럽다며 핀잔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이게 당최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소. 국적을 숨기고 들어온 것은 잘못이긴 하나,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아이를 거둔 것이라 하지 않소. 그것이 어찌 잘못이오?”
흠흠,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던 관료가 굽히지 않고 반박했다.
“하나 그 계집이 단순히 고아일지, 아니면 소문대로 목적을 갖고 온 계집일지 어찌 안단 말입니까?”
“옳소. 거기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 서결 장군도 이제껏 국경을 지킨답시고 또 다른 여진족들에게 우리 조선의 물자들을 퍼주었을지도 모를 일이잖소.”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겠소?”
“아니, 떠도는 소문에 내가 왜 책임까지 져야 하오?”
“증거도 없는 소문을 함부로 퍼트릴 땐 그에 대한 책임도 질 줄 알아야지!”
“뭐요?”
급기야 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니.
사안에 대한 심각성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이 모든 사태를 준백은 그저 조용히 관망하기만 하였다.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아도 불이 알아서 여기저기 옮겨붙으니.
이것이야말로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었다.
소문으로 인해 서결을 적대시하는 이들은 빠르게 늘어났고, 그에 대한 여론도 더 확실하게 생겨났다.
‘이제 슬슬 구덩이를 파볼까.’준백이 얇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
“하아…….”
화선당 안에서 또 한 번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벌써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는지.
아침을 먹다가도 한숨, 왕실의 어른들께 문안 인사를 드리고 오다가도 한숨, 서책을 읽다가도 한숨.
시도 때도 없이 한숨을 내쉬는 선정에 천 상궁은 제가 밟은 땅까지 푹 꺼질 것 같았다.
선정이 또 한숨을 내쉬려 숨을 들이쉰 순간.
“옹주 아기씨, 한숨이 너무 잦으시옵니다.”
“콜록, 콜록!”
엄한 천 상궁의 목소리에 선정은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손 빠르게 보리차 한 잔을 건넨 천 상궁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었다.
“그러다 옹주 아기씨의 복은 물론 이곳 도성 땅에 있는 백성들의 복까지 죄 날아가겠습니다. 무슨 근심이 있으시기에 종일 한숨을 쉬십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말은 그리하여도 얼굴은 한숨을 내쉴 때보다 더 시무룩하였다.
내내 한숨을 유발하였던 목소리가 다시금 그녀의 귓가에 맴돈 까닭이었다.
‘……소장은 그저 다비가 올리는 대로 아무 차나 마실 뿐, 옹주 아기씨의 차를 받기엔 한미한 입이라 결례를 끼치지 않을까 저어되옵니다.’ 반은 충동적이었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한 번쯤은 그와도 찻잔을 나누고 싶어서.
자신이 직접 우린 차를 그에게 주고 싶어서.
다비의 차가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긴 하였지만, 설마 옹주의 차를 거절할까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단박에 거절을 하다니.
‘이만큼 창피한 일이 또 있을까.’이럴 줄 알았더라면 결코 권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을 연심이라 속앓이 할 것은 알았다만, 아예 다가서는 것조차 이리 힘들 줄은 몰랐다.
‘하긴. 서결 장군은 내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조차 모를 테니…….’감히 상상이나 할까.
매일 같이 그가 보고 싶어,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담벼락 앞을 서성이고 있다는 것을.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그의 모습이 아른거려, 꿈에서조차 그 하나만 그리고 있다는 것을.
그를 꿈에서 본 날이면 가슴이 저릴 만큼 행복하다가도, 그 꿈에서 깨고 나면 아무 연도 없는 이 현실이 너무도 싫어 어떻게든 다시 꿈으로 돌아가려 한참을 누워 있는 것을.
결코 모를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자는 자신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옹주가 외간 남자에게 함부로 차를 권하였으니, 자신을 정숙하지 못한 여인이라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만사가 우울하였다.
“나는 이제 끝이다. 끝이야…….”
아랫입술을 비죽 빼물며 울상을 지은 선정은 베개를 끌어안고 발까지 굴렀다.
“옹주 아기씨, 무엇이 끝이 났단 말씀이십니까. 아랫것들이 보고 있습니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체통이고 뭐고 나는 끝났단 말일세.”
그런 선정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천 상궁은 이유도 모르고 그녀를 달래기 바빴다.
그런데 그때였다.
“옹주 아기씨, 영상 대감께서 찾아왔나이다.”
“영상이?”
예상치 못한 이의 방문에 선정이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조금 전 결에 대한 생각으로 발을 구르던 철없는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차갑기만 한 얼굴이었다.
‘그 늙은 여우가 어인 일로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자신을 찾아올 만한 이유는 없었다.
준백은 처음 봤을 때부터 눈빛이 간특하고 왠지 모르게 음흉한 기운이 풍기는 자였다.
가까이해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에,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오라버니나 언니들과 다르게 언제나 피하고 꺼리던 선정이었다.
준백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
‘한데도 나를 찾아왔다?’마음 같아선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아바마마의 귀에 들어가 어의며 탕약이며 줄줄이 올 터였다.
선정은 어쩔 수 없이 준백을 안으로 들였다.
“소신, 옹주 아기씨를 뵈옵니다.”
선정은 웃음 한 번 짓지 않고서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상께서 무슨 연유로 이 깊은 옹주방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이곳에 오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향이 좋은 차를 마실 수 있다기에, 늘그막에 차 맛이나 배워 볼까 하여 왔사옵니다.”
준백은 속내를 쉬이 드러내지 않은 채 기분 나쁜 미소만 지었다.
그 음침한 태도가 선정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 제 입으로 들어오라 허락한 이를 그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내칠 수는 없는 노릇.
선정은 내키지 않는 마음을 삼키며 천 상궁에게 찻상을 차려오라 일렀다.
“잠시 아랫것들도 물리시지요.”
선정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보니, 준백은 간사하게 입가를 늘이며 말했다.
“옹주 아기씨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그러하옵니다.”
“제가 들을 수 있는 말이라면 천 상궁이 못 들을 이유는 무엇 있겠습니까.”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사특한 눈동자에 언뜻 위험한 빛이 어렸다.
“아주 사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온데.”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가슴을 스쳤다.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곧장 소리를 쳐 사람들을 부르리라.
선정은 그리 다짐하며 천 상궁과 다른 나인들을 모두 내보냈다.
“천 상궁은 아이들을 데리고 잠시 나가 있게.”
“예, 옹주 아기씨.”
곧 향긋한 차 내음이 화선당 안을 채웠다.
말간 차를 따라 잔을 내미니, 그 잔을 제 앞으로 끌고 온 준백이 지그시 눈을 감고 향을 맡았다.
깊이 들이마신 숨을 길게 내뱉은 그는 한참 만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옹주 아기씨께서는 그저 호기심이 많으신 겝니까.”
“…….”
“아니면, 그자를 갖고 싶으신 겝니까.”
선정이 놀란 눈으로 준백을 보았다.
정확히 누구의 이름이 나온 것도 아니건만.
그녀의 머릿속에 저도 모르게 결이 떠올랐다.
‘설마. 아니야, 이자가 어떻게…….’빠르게 당황을 숨긴 선정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옹주 아기씨께서 일전에 서결 장군을 몇 번 대면하시었더군요.”
“…….”
“위로도 하여 주시고, 차니 다과니 하는 것들도 챙겨 주시고, 이처럼 차도 대접하려 해주시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꼭…….”
준백이 묘한 웃음을 흘렸다.
“옹주 아기씨께서 서결 장군을 귀히 보고 있다고 여길 정도라 하더이다.”
준백은 부러 ‘귀히 보고 있다’에 힘을 주어 말하였다.
그 의미심장한 강조에 선정은 순간 온몸의 피가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영상이 어찌 그것들을 알고 있는가.
겨우 일각도 안 되었던 만남이 이리 덫이 되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전과 달리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선정을 보며 준백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궐에는 벽에도 눈과 귀가 있습니다, 옹주 아기씨. 매사에 조심하셔야지요.”
그는 꼭 선정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였다.
선정은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하며 그런 준백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영상께서 감히 제게 궁중의 예법을 가르치려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내키는 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것 또한, 삼가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준백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적대감을 함부로 드러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옵니다, 옹주 아기씨.”
감히 옹주를 겁박하려 드는 것이냐며 호통을 쳐야 마땅한 일이건만.
이상하게 선정은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압박감이 그녀의 가슴을 묵직하게 옥죄고 있었다.
‘내가 맹수를 이 안에 들인 것이로구나.’선정이 겁을 먹었다는 것을 알아챈 준백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얇은 입술을 길게 늘였다.
“저는 옹주 아기씨께서 원하시는 것을 손에 쥐여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이라니요.”
“지금 궐내에서 서결 장군과 그 다비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돈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
“옹주 아기씨께서만 제 제안에 응해만 주신다면, 소신이 그자를 책임지고 안전하게 보호해 드리지요.”
여러 생각이 한데 밀려와 그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설마.’두 글자가 머릿속에 스쳤지만, 선정은 경거망동하지 않고 모르는 척 그의 의도를 물었다.
“영상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서결 장군을 의빈으로 만들어드리겠다.”
“…….”
“그리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준백은 그런 선정에게 기꺼이 제 의중을 알려주었다.
선정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날 때부터 구중궁궐에서 살아온 옹주라고는 하나, 정치에 관해서는 신참 관료보다 못한 그녀였다.
준백은 그녀를 이용하여 결을 아예 가둬버릴 생각이었다.
창살 없는 감옥. 도성 안에 있는 유배지.
‘그것이 바로 부마의 자리 아니던가.’
이미 여러 차례 죽이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더 나아갔다간 제 꼬리만 밟힐 지경이었다.
이런 때에 준백이 택한 것은 바로 부마였다.
부마가 되면 어떠한 정치적 활동도 할 수 없고, 또 관직에도 있을 수 없으니.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대신 결의 몸을 완전히 묶어버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인 것이다.
서결이야 이미 절충장군에 오른 자이나, 그깟 품계는 부마가 되기 전 내려놓으면 그만.
또한 이 일로 임금이 가장 어여뻐하는 선정의 신임을 얻게 된다면 그만큼 왕실에 더 깊이 손을 뻗게 되는 것이니, 준백으로선 여러모로 이득인 셈이었다.
그렇게 발을 묶고, 손을 묶고, 눈을 가리고 또 귀를 가린 뒤에는.
‘손에 굴리기 어려워질 때쯤 둘 다 죽여 버리면 되겠지.’
검을 잃은 뒤엔 죽이기도 더욱 쉬울 터이니.
그 간교한 계략을 알지 못하는 선정으로선 당연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선정을 보며 준백의 입꼬리가 더욱 말려 올라갔다.
“오래는 아니 되겠지만, 며칠 생각할 시간을 드리지요. 마음이 정해지시면 그때 소신에게 넌지시 뜻을 알려주시옵소서.”
한 발.
딱 한 발만 내딛거라, 어리석은 옹주야.
“소신, 옹주 아기씨를 위해 기꺼이 움직이겠나이다.”
남은 덫은 내 모두 준비해놓을 테니.
***
깊은 밤.
단이는 방에 초를 켜둔 채 멍하니 허공만 보았다.
하루 일과가 끝이 나고 잘 시간도 지났건만.
어쩐지 쉬이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어수선한 까닭이었다.
선정 옹주가 빌려준 서책이라도 보며 시간을 보낼까 하였지만, 그마저도 채 두어 장을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렸다.
결국 단이는 방문을 열고 나와 섬돌을 딛고 내려섰다.
하늘을 보니 달과 별들이 죄 구름에 가려져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다.
달이 밝지 않아 이리도 마음이 어지러운 걸까.
“나리께서도…… 달이 어두운 밤을 싫어하시었는데.”
아무래도 결을 닮아가나 보다.
어두운 밤하늘에 이리도 싱숭생숭해지는 것을 보면.
어쩌면 조금 전 유독 어두워 보이던 결의 얼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리께선 이미 침소에 드시었나?”
단이는 빼꼼 까치발을 들어 사랑채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하지만 중문 담벼락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빛이 결의 방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행랑채에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 생각이 떠오르니 괜스레 그리움도 함께 짙어지는 터라.
결이 잠에 들었는지 아니면 아직 깨어 있는지만 보고 싶었던 단이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며 중문으로 향하였다.
“……!”
그런데 막 문을 열어 고개를 든, 바로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