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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57화 (57/100)

57화

“……나리?”

중문 앞엔 뜻밖에도 결이 서 있었다.

그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 검은 옷을 입은 채.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단이는 물론 결 또한 당황을 내비쳤다.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결임을 확인한 단이가 뒤늦게 안도의 숨을 휴우, 길게 내뱉었다.

“하아…… 누가 또 몰래 담을 넘어온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많이 놀랐느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였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단이가 물끄러미 결을 보다 물었다.

“한데 어찌 여기 계시었어요?”

그리 묻는 단이에게 결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밤마다 성조와 함께 준백의 집 근처를 감시하기도 벌써 며칠째라.

나갈 적마다 이리 단이의 방에 둘러진 중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 가는 것을 그녀만 모르고 있었다.

“……여기서 무슨 소리가 나기에.”

하여 급히 거짓 핑계를 대니.

“아, 제가 방금 문 열고 나오는 것을 들으시었나 봐요. 이곳엔 저 말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걱정 마시어요.”

단이는 달리 의심하지 않고 웃으며 말하였다.

그 티 없이 맑은 웃음이 결의 눈에 선명히 새겨졌다.

퍽 어여뻤다.

며칠 이곳에 애타는 발자국을 남긴 것이 헛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어차피 날이 밝으면 다시 마주할 얼굴이거늘.

저 말간 미소가,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수일을 보지 못하여 애타게 그리웠던 것처럼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문득 결의 옷차림을 살핀 단이가 의아한 듯 물었다.

“한데 나리께서는 어디 가시는 것이어요?”

아무리 보아도 결의 옷이 침의로 보이지 않은 까닭이었다.

오히려 오래전에 보았던 자객의 입성과 똑같은지라.

그래서일까. 왠지 모를 불안이 스멀스멀 단이의 가슴에 피어올랐다.

“잠시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오래 걸리시어요?”

금세 흐려진 눈동자가 결에게 향했다.

“혹…… 위험한 곳에 가시는 것이어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머금을 것 같은 눈동자가 결의 마음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준백의 집을 감시하는 건 위험하다 할 수도, 위험하지 않다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껏 아무 수확도 없이 돌아오곤 하였지만, 언제 들키거나 위험한 단서를 쫓게 될지 모를 일이었기에.

하여 결코 장담할 수 없거늘.

“오래 걸리지 않는다.”

“…….”

“위험하지도 않아. 금방 돌아올 것이다.”

결은 단이를 위하여 또 하나의 약조를 하였다.

그녀를 위하여.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야 할 자신을 위하여.

그 한마디 약조에 불안으로 물들었던 단이의 표정이 다시 편히 풀어졌다.

“그럼 얼른 다녀오시어요. 이리 계시다간 늦으시겠습니다.”

“너도 이만 잠자리에 들거라. 시간이 많이 늦었다.”

“나리 가시는 것만 보고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오갔다.

하나 자신이 방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이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터라.

결국 단이가 먼저 섬돌 위로 올라섰다.

“얼른 돌아오시어야 해요.”

여린 목소리로 당부하는 단이에게 결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지막까지 결을 눈에 담던 단이의 얼굴이 곧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

결은 그제야 검은 복면을 꺼내어 얼굴을 가렸다.

무사히, 저 아이의 곁으로 다시 돌아올 것.

목표를 되새긴 그가 빠르게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어느 한적한 골목에 복면으로 얼굴을 감춘 두 사내가 나타났다.

바로 결과 성조였다.

두 사내는 마치 검은 새처럼 어둠을 가르며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했다.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인 그들이 숨어든 곳은 바로 준백의 집 근처였다.

낮에는 사람을 시켜 이곳을 살피고, 밤에는 그들이 직접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하나 아직까지 수상한 정황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붙여 준백과 그의 청지기까지 뒤를 밟았으나 아무것도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하고 은폐를 했다는 뜻일 터.

뻐근한 목을 돌리던 성조가 지친 목소리로 말하였다.

“정말 징그러울 만큼 아무것도 안 나오는군그래.”

“우리가 놓쳤을 가능성은?”

“설마. 이리 매일같이 감시를 하고 있는데…….”

순간 말을 멈춘 성조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였다.

“……만일 촉새가 사라진 게 본인의 뜻이 아니었다면?”

그 말에 결이 얼굴빛을 굳혔다.

점점 상황을 압박해가니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선수를 쳤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결이 미간을 좁히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최악의 상황은 아니길 빌어야지.”

여한이 없을 만큼 큰돈을 받았다면 가는 곳마다 소문이 났을 터.

이렇게까지 털끝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성조의 말대로 저쪽에서 먼저 촉새를 처리하지 않은 이상.

“차라리 자객의 끄나풀이라도 찾아오면 좋으련만…….”

“쉿.”

그때, 결이 입술 위에 검지를 세우며 숨을 죽였다.

덩달아 기척을 숨긴 성조가 그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들과 비슷한 입성의 한 검은 복면의 사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한참이나 주위를 경계하던 그는 이내 준백의 집 담벼락을 휙 넘어갔다.

결과 성조는 의문의 사내가 들어간 방향을 더욱 예의주시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오래지 않아 사내가 다시 담벼락을 타고 준백의 집을 나섰다.

두 사람은 곧 그림자처럼 사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사내가 향한 곳은 깊은 산속이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사내는 익숙한 듯 수풀을 헤쳐 나갔다.

결과 성조 역시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그 뒤를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곧 제법 큰 오두막이 드러났다.

사내는 곧장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성조가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바로 가서 덮치는 게 어떻겠나.”

“안에 몇 명이 더 있을지 모른다. 일단은 조금 더 지켜보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오두막 근처로 다가가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사내가 안에서 모닥불이라도 켰는지 캄캄하기만 하던 오두막에 곧 작은 불빛이 밝혀졌다.

이따금 한 번씩 달그락거리는 소리 외에 다른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오두막 안에 사내 혼자만 있다는 뜻이었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인 결과 성조가 오두막으로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오두막 문을 열려던 순간.

쾅!

“윽!”

난데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내가 성조를 들이받아 밀쳐 쓰러트리고 결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결이 사내와 함께 땅을 굴렀다.

“웬 놈들이냐!”

사내가 결의 목을 졸랐다.

그는 여전히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사내의 손목을 틀어쥐고 밀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터라.

목을 짓누르는 엄청난 힘에 숨이 넘어갈 것 같던 그때.

“크윽!”

성조가 사내의 얼굴을 걷어차 결로부터 떨어트렸다.

사내는 그대로 한 바퀴를 구르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번뜩이는 눈으로 두 사내를 마주하였다.

“누구냐. 왜 나를 따라온 것이냐.”

방언을 듣는 듯 이상한 억양.

하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낯익은 말투와 목소리였다.

결은 적운검을 뽑아 사내에게 겨누었다.

“왜인지는 네놈이 더 잘 알 텐데.”

처음엔 복면 때문에 결을 알아보지 못하였던 사내도 적운검을 보자 눈빛이 바뀌었다.

“야밤에 웬 흑객이 나를 뒤쫓나 했더니만……. 서결, 네놈이구나.”

곧 구름이 걷히며 희미한 달빛이 사내의 얼굴 위를 비추었다.

얼굴을 본 결의 눈동자가 바짝 조여졌다.

흐트러진 복면 위로 드러난 한쪽 뺨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

예상대로 북방에서 그를 습격했던 자객들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말을 나누었을 때부터 워낙에 특이한 억양이라 쉬이 잊을 수 없었다.

결은 눈가를 좁히며 짓씹듯 말하였다.

“역시, 네놈들 모두 영상이 보낸 것이었군.”

“증거가 있나?”

“그 집에서 네가 나오는 것을 나와 내 벗이 똑똑히 보았다.”

결과 성조를 번갈아 보던 사내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너희들의 말을 누가 믿어줄 것 같으냐. 대감께서 아니라 하시면 그만인 것을.”

“네놈이 자백을 하게끔 만들어야지.”

“자백이 빠를까. 아니면 자결이 빠를까.”

“…….”

“너흰 절대로 대감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사내의 눈매가 음흉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양, 세 사람 사이에 살벌한 마찰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도 사내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실력이 대단한 자였다.

무엇보다 사위가 어두워 빛이라곤 흐린 달빛과 오두막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뿐이라.

자칫 잘못했다간 벗을 다치게 할 수도 있는 탓에 결과 성조는 더욱 고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사내는 아무 거리낌 없이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며 두 사람이 조금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나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고수라 할지라도 상대는 북귀라.

“크윽!”

시간이 지날수록 팔이며 다리며 하나씩 베이는 상처가 늘어나는 탓에 점점 사내가 밀리기 시작하였다.

“젠장.”

욕을 뇌까린 사내가 발악이라도 하듯 전보다 더 거세게 검을 휘둘러댔다.

휘익!

또 한 번 허공을 가르는 검날에 성조가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파고든 사내가 순식간에 성조에게 검을 내질렀다.

챙!

가까스로 적운검을 뻗은 결이 그 공격을 대신 막아낸 순간.

“어리석은 것!”

“윽……!”

품에서 단도를 꺼낸 사내가 결에게 그것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가슴팍을 베인 결이 강한 통증에 비틀거리는 사이.

사내가 돌연 뒤돌아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더니, 피워둔 불을 발로 차서 온 사방으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저 안에 증거가 있는 것 같다. 막아야 돼!”

결이 황급히 오두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내는 이미 창문으로 빠져나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고, 오두막은 빠르게 불길에 휩싸였다.

두 사내는 타오르는 불길을 어떻게든 발로 꺼트리며 오두막 안을 둘러보았다.

“저기 사람이 있네!”

성조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니, 오두막 구석에 축 늘어진 채 의자에 묶여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아직 온기가 느껴지는 몸은 생동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축 늘어져 있었다.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어찌 안 좋은 예감은 이리도 잘 맞는 건지.”

처참히 상처 입은 목을 보던 결에게 성조가 피 묻은 호패를 건네었다.

“촉새…….”

“우리가 이자를 찾을 것을 알고 미리 숨겨 놓았던 것이었어.”

호패에 적힌 이름을 읊조린 결이 바득 이를 갈았다.

소문을 있는 대로 퍼트리게 하고선 결국 토사구팽을 해버린 것이다.

도대체 준백과 자신의 싸움에 얼마나 더 많은 이가 죽어나가야 하는가.

비참한 마음에 호패를 세게 쥔 결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일단 시신은 밖으로 옮기지.”

“그러세.”

결과 성조는 촉새의 시신을 의자째 들었다.

간신히 시신을 밖으로 옮긴 후, 그들은 곧바로 다시 오두막에 들어가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하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방을 뒤져보던 결의 눈에 웬 나무 함 하나가 들어왔다.

상자를 열어보니 급하게 무언가를 정리한 흔적이 있는 가운데, 구석에 처박힌 종이 하나가 보였다.

아무래도 방금 오두막을 불태우며 이 안에 있는 것을 전부 빼내다가 하나를 놓친 듯하였다.

“결, 더 이상은 안 되겠네! 오두막이 곧 무너지겠어!”

종이를 품에 넣은 결은 성조와 함께 오두막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오두막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죄 무너져버렸다.

두 사람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았다.

한 발만 더 늦었어도 붕괴되는 오두막에 깔릴 뻔하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성조가 뒤늦게 결의 상처를 살폈다.

“몸은 괜찮은가?”

“이 정도는 견딜 만해.”

“상처가 꽤 깊네. 일단 지혈부터 하세.”

성조는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상처 부위를 동여맸다.

자신 때문에 결이 다쳤다고 생각하는지 두 눈빛에 후회가 가득하였다.

결은 그런 성조의 어깨를 말없이 다독이며 괜찮다는 뜻을 전하였다.

단단히 매듭을 지은 성조가 이내 촉새의 시신을 보며 한탄 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나저나 큰일이군. 또 놈을 놓쳐버리고 말았으니…….”

“아예 놓치진 않았다.”

“무슨 말인가?”

결이 오두막에서 발견한 종이를 건네었다.

“이건…….”

“밀서인 것 같다. 밑에 그 인장이 있는 것을 보니.”

결의 말대로 종이의 왼쪽 하단에 또 용 문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앞전의 밀서들과 마찬가지로 인장 외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쓸데없이 접은 흔적들이 많이 있다는 것뿐.

성조는 다른 흔적이 없는지 종이를 면밀히 살피며 말하였다.

“이것도 먹을 칠하면 글자가 드러나겠군.”

“이건 너에게 맡기겠다. 이제껏 발견한 것 중에 제일 온전한 것이니, 암어를 해석하기엔 제일 좋을 거야.”

“나만 믿게.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해석해 볼 테니. 일단 이곳 불부터 어떻게 해봐야겠군. 이대로 놔두었다간 산 전체는 물론이고 민가로까지 불이 번지겠어.”

결은 성조와 함께 오두막 근처를 최대한 흙으로 덮었다.

그러곤 연기를 발견하고 온 순라군과 함께 현장을 정리하고 촉새의 시신을 수습하게끔 하였다.

‘단이…… 자고 있어야 할 텐데.’

이 와중에도 자신의 상처를 보고 놀랄 단이를 걱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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