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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58화 (58/100)

58화

결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새벽이 늦도록 단이가 잠에 들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분명 금방 돌아오마 하시었는데. 위험하지 않을 거라 하시었는데.

반달이 서산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단이의 마음은 바짝바짝 타들어만 갔다.

이제나 오실까. 저제나 오실까.

중문 앞을 서성이며 쥐 죽은 듯 조용한 허공에 신경을 곤두세우길 한참.

끼익-.

드디어 대문 열리는 소리가 마당에 낮게 울렸다.

“나리!”

단이가 활짝 웃으며 중문을 열었다.

그런데 바람을 타고 흘러온 옅은 불 냄새가 단이의 발을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멀리 어둠 속에서 보이는 나리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나갈 적만 해도 단정하였던 검은 옷은 군데군데 해어져 있었고, 가슴팍엔 낯선 천까지 둘려 있었다.

그 위로 스며든, 익숙하고도 끔찍한 붉은빛까지.

“나리, 몸이 어찌…….”

단이를 발견한 결은 얼굴에 쓰고 있던 복면을 한숨처럼 천천히 내렸다.

자고 있기를 바랐거늘.

하여 저 아이가 모르도록 밤사이 모든 흔적을 지우려 하였거늘.

표정을 보아하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문 앞에서 몇 번이고 가다듬은 옷매무새가 무색하게 전부 들켜버린 듯했다.

단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일 것 같은 눈으로 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으시었던 것이어요.”

“…….”

“왜 또 다치신 것이어요…….”

커다란 눈망울에 기어이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결에겐 이제 이골이 날 만큼 익숙한 상처거늘.

단이에겐 여전히 이 상처와 피가 볼 때마다 무섭고 끔찍한 것인가 보다.

아무래도 절벽 아래에서 다쳤던 상처가 그녀에게 큰 충격으로 남아 있던 탓이리라.

빠르게 그의 몸을 살핀 단이가 울음을 꾹 참으며 말하였다.

“제가 얼른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얼른 대문 밖으로 나가려는 단이의 손목을 결이 잡았다.

“그럴 필요 없다.”

“얼른 치료를 하시어야지요.”

“괜찮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세상에 아프지 않은 상처는 없다 하시었잖아요.”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던 눈물이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려 맨살이 드러난 그녀의 목선으로까지 길을 내었다.

지울 수 없는 그날의 흉터를 더욱 선명히 씻기는 것처럼.

“숨길 수 있는 상처와 숨기지 못하는 상처가 있을 뿐이라고.”

단이는 그날 결이 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하여 알 수 있었다.

몸에 입은 상처도, 마음에 입은 상처도, 결은 전부 아파하고 있었음을.

“나리께서는 오늘 제게 숨기지 못할 상처를 입으신 것이어요.”

단이는 다시 눈가에 차오른 눈물을 눈꺼풀로 꾹 밀어내었다.

계속 설득해 봐야 의원을 부르지 못하게 할 것을 알았던 걸까.

그녀는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할까, 주위를 살피며 결에게 따라오라 일렀다.

무엇을 하려나 싶어 결은 말없이 뒤를 따라가 주었다.

단이가 결을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다신당이었다.

“여기에 잠시만 앉아 계시어요. 금방 준비해 올게요.”

결을 다신당 한쪽에 앉힌 단이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깨끗한 무명천을 여러 장 준비하는가 하면, 무언가를 잘게 짓이겨 물에 되직하게 풀기도 하였다.

한참을 이것저것 준비한 단이가 곧 소반을 들어 결의 앞에 놓았다.

소반 위에는 마치 동백꽃처럼 생긴 꽃송이를 통으로 담은 차와 하얗고 묽은 반죽이 가득 든 작은 그릇이 놓여 있었다.

단이는 우선 찻잔에 붉은 꽃차를 따라 결에게 건네었다.

“산다화를 우린 차입니다. 어혈 제거와 지혈에 탁월하다고 하니, 이것을 먼저 드시어요.”

결은 다치지 않은 쪽의 팔로 그것을 받아 마셨다.

적당한 온도와 짙은 향취가 목 안으로 흘러들어 기를 잃은 몸에 훈훈한 열을 더해주었다.

결이 차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던 단이가 곧 눈빛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이제 상처를 보여 주시어요. 급한 대로 지혈이라도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괜찮대도.”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얼른 상처를 보여 주시어요.”

단이가 엄히 꾸짖듯이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그마한 것이 다부진 눈빛으로 호통을 치는 것이 고맙고, 안타깝고, 또 기특한지라.

결은 순순히 매듭을 풀어 상체를 드러내 보였다.

근육으로 단단하게 짜인 어깨와 각진 가슴, 그리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배가 차례로 모습을 보였다.

목욕 시중을 들 적마다 매번 얼굴을 붉히던 아이였건만.

지금은 상처에 온 신경이 쏠렸는지 맨몸을 보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듯하였다.

단이는 곧 무명천 하나를 들어 흰 반죽을 엷게 발랐다.

꾹 맞다문 입술은 억지로 울음을 삼키는 모양이라.

결은 그 애처로운 입모양을 바라보다가, 말이라도 붙이면 울음이 좀 가실까 하여 넌지시 물었다.

“그것은 무엇이냐.”

“목단피 또한 피를 멎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여 갈았습니다. 염증을 가라앉히고 지혈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상처가 덧나는 것을 막아줄 것이어요.”

아무래도 지혈에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써 볼 요량이었다.

단이는 목단피 반죽이 묻은 부분으로 조심스럽게 상처를 닦아나갔다.

검붉게 엉킨 핏자국을 닦아내니 생각보다 더 깊은 상처가 드러났다.

행여 결이 천의 쓸림에 아파할까, 단이는 입술을 모아 호호 울음기 섞인 바람을 불어대며 조심조심 상처를 닦았다.

그 숨결이 피를 더 빠르게 돌게 하는 줄도 모르고.

한쪽으로 몰리는 신경을 외면하려 결이 애쓰는 사이.

“제가 다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새 무명천에 똑같이 반죽을 발라 상처 부위를 동여매던 단이가 울먹이며 말하였다.

“나리께서 이리 다치시는 걸 보는 것보다, 제가 다치는 것이 훨씬 덜 아픕니다.”

꽉 매듭을 짓는 손에 원망과 설움이 함께 섞였다.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이 또다시 범람하였다.

뚝뚝, 원망하듯 무릎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보던 결이 고개를 들어 단이의 얼굴을 보았다.

이 순간 범람하는 건 단이의 눈물뿐만이 아니었으니.

순간 설명 못할 아릿한 감정이 짙은 찻물처럼 결의 가슴 한가운데에 번져 나갔다.

“너는 무서운 소리를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나지막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왜인지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단이가 물빛에 젖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리 마음이 아파 죽겠는데, 나리께서는 어찌 이리 웃으시는가.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아 일그러진 눈동자가 꼭 그리 말하는 듯하였다.

결은 천천히 손을 뻗어 맺힌 눈물을 가져가 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너를 귀히 여길 수밖에 없나 보다.”

그 말에 놀란 듯 단이가 입술을 작게 벌렸다.

숨결이 드나드는 그 붉은 문이 결의 눈길을 단숨에 앗아갔다.

결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벅차오르는 애틋함에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하얀 찹쌀떡 같은 뺨이 손바닥에 담겨 가슴을 더욱 몽글하게 만들었다.

“귀한 너를 위하여, 이리 내 몸을 바쳐 너를 지키고 있다.”

조금 더 일찍이 말하고 싶었던 진심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에게 모든 비밀을 밝혔을 때부터.

절벽 아래에서 필사적으로 나를 지켰을 때부터.

나를 위하여 밤낮없이 노력한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나를 바라보던 눈동자에, 어느 순간 나와 다르지 않은 마음이 녹아 있음을 깨달았을 때부터.

결의 눈이 자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는 말간 눈동자로 향하였다.

애정 가득한 눈길이 그 눈동자 속에 눅진히 스며들었다.

“그러니 슬퍼 말거라. 웃어 주거라.”

“…….”

“네 웃음으로 나도 버티고 있으니.”

단이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리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걸까.

나를 귀히 여겨 주신다니. 내 웃음으로 나리께서 버티고 계시다니.

언제나 속으로만 그리던 말들을 직접 들어버린 탓에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결의 상처로 속상했을 때보다 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단이는 떨리는 입술을 꾹 맞물며 제 뺨에 닿은 결의 손을 감쌌다.

“저도…… 나리만 보며 버티어요.”

“…….”

“나리가 계시어야 제가 있습니다.”

남들은 무섭다 피하는 북방 귀신이었지만, 단이는 그가 주인으로서 참 좋았다.

세상이 말하던 것과 달리 그에게 남모르는 따스함이 있음을 알았을 땐 이미 그 온기에 잔뜩 물이 든 뒤였다.

“나리의 다비가 되고 나서부턴, 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던 제게 처음으로 온 힘을 다해 살아가야 할 이유가 생긴 것 같아 좋았습니다.”

당신은 내게 웃어 주지 않아도 된다.

“그다음엔 나리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온정이 너무도 따스하였고.”

차가운 눈으로 보더라도 좋다.

“그러다 보니 나리께 더 좋은 아이가 되고 싶었고.”

그저 당신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그런 당신을 뒤에서나마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러다 보니 저의 세상에는 나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

“아니, 나리께서 제 세상이 되시었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니, 그러니 이리 다치지만 말아 주시어요.”

당신이 곧 삶의 이유이기에.

당신이 곧 나의 세상이기에.

“아니. 행여 다치더라도 그저 무사히만 돌아와…….”

그때였다.

입술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덮인 것은.

놀라 커다래진 다갈색 눈동자 위에 나른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결이 새겨졌다.

위험하리만치 야릇하고, 아찔하리만치 퇴폐적인 눈길이었다.

한순간 단이의 입술을 앗아갔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봤자 겨우 반 뼘 거리를 물러났을 뿐이지만.

“정녕, 나를 보며 버티는 것이냐.”

낮게 갈라진 음성이 촉촉하게 젖은 입술 위에 달라붙었다.

위험하다.

위험한데도 감미롭다.

감미로우면서도 온몸을 떨게 만든다.

마치 맹수를 마주한 것처럼 단이는 온몸이 굳었다.

그 가운데 심장만 홀로 빠르게 쿵쿵쿵 내달려, 그녀는 이 소리를 나리께서도 들으실까 부끄러웠다.

단이가 쉬이 말을 하지 못하니 나른하던 눈매 속 결의 눈동자가 더욱 검게 빛났다.

“말해 보아라.”

차고 넘쳐흐르는 욕망이 그 안에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정녕, 나를 보며 버틴다 하였느냐.”

오로지 단이만을 향한 욕망이.

그 빛을 알아챈 단이의 눈시울이 다시금 붉어졌다.

꿈만 같았고, 거짓말만 같았다.

하나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한 현실이라.

“예. 저는 나리만 보며 버티고…… 또 삽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니, 결이 더할 수 없이 귀한 것을 다루듯 단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러곤 일렁이는 눈을 손수 감겨 주고서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달콤한 것을 입안에서 굴리듯 도톰한 입술을 베어 물던 결이 뜨겁게 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촉에 가냘픈 어깨가 바르작 떨려왔다.

결은 그 어깨를 한 품에 안아 남은 틈을 죄 메워버렸다.

그 바람에 단이가 저도 모르게 상처 부위를 눌렀지만, 그깟 통증은 욕정을 가라앉히기에 턱없이 부족하였다.

부푼 입술 같은 단이의 앞섶이 결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젖은 숨결은 그의 목을 더욱 타게 만들었다.

조금 전까지 살갗에 맴돌던 가을밤의 한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타는 듯한 열기만이 그의 몸을 잠식할 뿐이었다.

이 아이는 불이던가.

하면 내가 불을 삼키고 있는가.

다디단 숨결을 삼키면 삼킬수록 갈증은 미칠 듯 심해졌다.

탐하고 탐하는데도 마음은 더없이 애가 타니, 정신은 더욱 아득해질 수밖에.

결이 고개를 비틀자 뜨거운 열기가 단이의 입안으로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가 조금의 쉼도 없이 몰아붙이는 터라.

단이는 간신히 결의 팔에만 의지한 채 밀려오면 밀려오는 대로 파도에 휩쓸리듯 몸을 내맡겼다.

꿈을 꾸는 듯 몽롱하면서도 모든 것이 선명하였다.

이 모든 것이 어색하면서도 동시에 너무도 간절하였다.

뜨겁게 입안을 헤집는 나리도, 붉게 부풀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살갗의 느낌도, 무엇 하나 부정할 수도, 밀어낼 수도 없는 그녀의 열망이었다.

한순간 사라질 신기루 같다가도 영원처럼 아득한 순간.

짙은 다향이 함께 어우러져 황홀하기까지 하였다.

나리와의 입맞춤은 이렇게나 향기로운 것이었다.

“읏…….”

결이 굴곡진 허리를 엄지로 쓸어내리자 낯선 감각 위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잇새로 흘러나온 여린 신음은 가뜩이나 얇아진 결의 이성을 너무도 쉽게 끊어내었다.

그는 단이의 몸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무게를 실었다.

짚으로 얽어 만든 두툼한 멍석 위로 작은 몸이 먼저 눕혀졌다.

바닥을 짚은 결이 상기되어 발그레해진 단이의 얼굴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어여쁘다.”

빛 한 점 없는 곳에서 어찌 이리 눈앞이 찬란한가.

“눈이 부시도록, 어여쁘다.”

아무래도 샛별이 죄 이 아이의 눈으로 몰려들었나 보다.

결은 고개를 숙여 단이의 눈 위에 입을 맞추었다.

가슴이 뻐근하리만치 감정이 거세게 몰아쳐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 아이로 인해 계속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큼.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가슴 깊이 담아야 이런 마음까지 들 수 있을까.

결은 어쩌면 이제까지 자신이 참고 있던 게 아니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였다.

단이가 제 마음속에 얼마나 크고 깊게 새겨져 있었던 건지.

감히 그 끝을 들여다볼 수 없을 만큼.

“고맙다. 나에게 와주어서.”

이 깊이를 알았더라면, 결코 지금껏 참을 수 없었을 것이기에.

결은 천천히 몸을 숙여 다시금 단이의 입술을 깊이 머금었다.

길게 늘어진 옷고름 한 줄이 본능처럼 그의 손끝에 감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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