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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59화 (59/100)

59화

마지막 남은 이성 한 줄기가 단이의 옷고름과 함께 팽팽히 당겨지던 찰나.

다신당 밖에서 웬 인기척이 들려왔다.

단이가 놀라 결의 어깨를 짚었다.

떨어진 입술에 잔뜩 흐트러진 결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다시금 허리를 끌어안는 팔에 단이가 숨죽여 속삭였다.

“누가 오는 것 같아요…….”

단이에게 온 신경이 얽혀 아무것도 듣지 못하던 결 역시 뒤늦게 그 인기척을 들었다.

그저 지나가는 발걸음이라기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터라.

열기로 끈끈해진 숨을 삼킨 결은 옷을 챙긴 뒤 단이를 안아들고 다신당의 구석에 몸을 숨겼다.

끼익-.

곧 다신당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보선 어멈이었다.

그녀는 들고 온 호롱에서 불씨를 꺼내어 다신당 입구에 있는 촛불을 하나둘 밝히기 시작하였다.

그러잖아도 매일 새벽마다 촛불이 켜져 있어 목욕 준비와 차 준비가 수월했던 단이였다.

모두 보선 어멈이 그녀를 위하여 일찍이 켜두었던 모양이다.

촛불을 모두 밝힌 보선 어멈이 문득 고개를 돌려 소반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차……!’급하게 숨느라 소반을 미처 치우지 못하였다.

들키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던 그때.

“쯧, 또 연습하다 갔나 보네. 잠도 부족한 것이.”

혼잣말을 중얼거린 보선 어멈이 아무 의심 없이 소반을 치워 주었다.

“지혈차를 연구하나. 뭔 목단피 가루를 이렇게 많이 썼어?”

그녀는 구시렁거리면서도 그릇 하나까지 깨끗이 씻어 원래 자리에 놓아두었다.

말투는 무뚝뚝해도 단어 하나하나에 단이를 위하는 마음이 가득하였다.

마지막 정리까지 끝낸 보선 어멈이 이내 다신당을 나갔다.

이윽고 닫힌 문 너머 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때까지 단이를 꼭 안은 채 숨죽이고 있던 결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살폈다.

“이제 간 것 같구나.”

“네…….”

단이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길 잠시.

맨살이 드러난 결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하였다.

하지만 허리를 감은 팔 때문에 잠시 떨어지나 했던 몸이 더욱 결에게 밀착되고 말았다.

“아……!”

“이제라도 무르고 싶은 것이냐.”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단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무르기엔 늦었는데.”

붉은 입술이 그녀를 희롱하듯 아찔하게 말려 올라갔다.

나리께 이런 표정도 있었던가.

온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게끔 만드는 퇴폐적인 얼굴에 단이는 정신이 더욱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다리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허벅지가 그녀의 몸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눈앞에 있는 이는 분명 결이 맞는데, 꼭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얽혀드는 시선 속 되살아나는 욕망이 단이의 입술에 끈적하게 녹아들었다.

“그런 게…… 아니온데…….”

눈길만으로도 숨이 차올라 말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아직 식지도 않은 얼굴의 열기가 전보다 더 홧홧하게 오르는 듯하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에 단이가 두 눈을 꼭 감았다.

금방이라도 결에게 다시 삼켜질 것만 같던 그때.

쪽.

결의 입술이 향한 곳은 입술이 아닌 이마였다.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단이의 이마에 입을 맞춘 결이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고맙다.”

이토록 황무지 같은 나에게 깊은 샘물이 되어 주어서.

숨 쉴 틈 하나 없던 나에게 숨결 그 자체가 되어 주어서.

말로 전하지 못한 진심들이 체온으로, 끌어안은 힘으로, 따스한 눈빛으로 전해졌다.

그 진심들을 모두 느꼈으나 단이에겐 그저 당연한 일들이었다.

나리께서 어찌 나에게 고맙다 하시는가.

감사를 해야 할 것은 오히려 이쪽이거늘.

하나 자신을 바라보는 결의 눈길이 무척이나 깊고도 애틋하여, 단이는 말없이 눈을 감고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이리 보잘것없는 나를 거두어 주시고 어여삐 여겨 주시어, 말로 이룰 수 없이 감사하다고.

여린 숨이 그의 가슴으로 흘러들어 그 깊은 뜻을 전하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쉼 없이 뛰는 심장을 달콤한 숨소리가 보듬어 주는가 하면, 나른히 내려앉은 살갗 위 솜털을 생경한 감촉이 바짝 일으켜 세우기도 하였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긴장을 유지하는 사이.

시간은 조금 더 흘러, 다신당의 문틈으로 손을 뻗은 희뿌연 새벽 동이 땅거미를 서서히 지우고 있었다.

이집 종들 역시 일찍이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하나둘 움직이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이대로 있다간 들키기 십상이라.

벗었던 웃옷을 도로 챙겨 입은 결이 단이를 일으켰다.

이 일로 단이에게 괜한 흉이 뒤따르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

기척이 없는 방향으로 단이를 이끈 그는 방 앞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무사히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결은 섬돌에 올라 신을 벗는 단이를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했겠구나.”

섬돌에 올라서도 한참이나 작은 단이는 되레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결을 올려다보았다.

“저보다는 나리가 더 걱정이어요. 저는 소다옥에서라도 잠시 눈을 붙이면 되는데, 나리께서는 훈련원에서도 쉬시질 못하니…….”

“이런 순간에 쉬이 잘 수 있는 사내는 없을 것 같은데.”

무슨 뜻인가 생각하는 건 찰나밖에 되지 않았다.

곧 다신당에서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 단이의 얼굴이 아침놀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눈조차 제대로 못 마주치며 수줍어하는 것이 못내 어여쁘면서도 눈에 찼다.

다시금 저 붉게 부푼 입술을 물고 그녀를 품 안 가득 끌어안고 싶었으나, 지금은 욕망을 다시 억누를 때였다.

결은 빠르게 감도는 피를 애써 무시하며 단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힘들 것 같으면 말하거라. 하루쯤은 함께 등청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저는 괜찮습니다! 나리와 함께 갈 것이어요.”

결이 행여 자신을 두고 가기라도 할까.

얼른 함께 가겠다 답한 단이가 다시 부끄러운 듯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팔랑팔랑 깜박이는 긴 속눈썹이 결의 가슴까지 간질였다.

“그래. 그럼 천천히 준비하고 오거라.”

“예…… 나리.”

결은 그런 단이를 마지막까지 눈에 담다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기껏해야 반 시진도 안 되어 다시 보게 될 것을.

그 잠깐의 헤어짐이 아쉬워, 서로가 중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던 그들이었다.

***

성조가 소다옥에 찾아온 것은 단이가 막 세 번째 차를 결에게 올리고 다시 잠에 들었을 때였다.

“다동아, 남은 차…….”

여느 때와 같이 스스럼없이 소다옥 안으로 들었던 성조는 탁자에 엎드려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단이를 보고 합, 입을 다물었다.

간밤에 잠이라도 설쳤는가.

깊이 잠든 것인지, 제법 큰 소리가 났음에도 단이는 눈 한 번 찡긋하지 않았다.

어깨에 덮인 모포는 다른 이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었다.

‘결이 덮어주고 간 건가.’성조는 조심조심 발소리를 죽여 그녀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곤 턱을 괸 채 곤하게 잠든 단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새침하게 쳐다보던 눈은 속눈썹을 길게 드리운 채 굳게 감겨 있었고, 작게 벌어진 앵두 같은 입술 사이론 새근새근 여린 숨결이 드나들고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지 입술을 두어 번 오물거리기까지 한다.

그 얼굴이 꼭 은아암에서 밥을 먹던 때와 같더라.

“거기서도 소고기를 먹느냐?”

나직이 건넨 물음에 단이는 대답 대신 배시시 웃다 다시 입술을 꼭 앙다물었다.

보고 있자니 자연 웃음이 나올 만큼 귀엽고 또 어여뻤다.

“매일…… 이리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도 듣지 못할 틈을 타 이룰 수 없는 소원을 말해 보았다.

너의 눈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면서.

이리 눈을 감아 아무것도 보지 않는 네가 언젠가는 나를 보아주지 않을까.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나를 제일 먼저 찾을 날이 오지 않을까.

‘결이 아닌…… 나를 선택해 줄 날이 오지 않을까.’그런 헛된 희망을 가져 보면서.

하나 벗이 원하는 여인을 마음에 품은 것은 그 스스로에게도 무거운 짐이었다.

손에 쥘 수 없는 욕심이란 이리도 은밀하고 버겁고 또 짙은 것이었으니.

움켜쥐어선 안 될 열망 대신 솜털 같은 머리카락이라도 손끝에 감아볼까.

하여 이마 위 흐트러진 머릿결을 쓸어 넘겨주려던 그때.

툭.

비단실 같은 머리카락 대신 손에 먼저 닿은 건 뭉툭한 목검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결이 목검으로 그의 손을 막으며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경계가 더 짙은 눈빛이었다.

성조가 장난스럽게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런. 들켰네.”

“나와. 단이 깬다.”

입모양으로 겨우 알아들을 말을 건넨 결이 먼저 몸을 돌렸다.

씁쓸하게 웃은 성조가 단이에게 차마 닿지 못한 손을 말아 쥐며 소다옥 밖으로 나왔다.

소다옥을 나서자마자 성조는 얼굴빛을 달리하며 말하였다.

“자네 집무실로 가세나.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네.”

결은 곧 성조를 데리고 집무실로 향하였다.

성조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지난번 자객의 뒤를 쫓았을 때, 그의 오두막에서 가져왔던 그 밀서였다.

성조가 미리 옅게 간 먹을 칠한 덕에 밀서의 글자가 모두 드러나 있었다.

이 밀서 역시 이전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전혀 연관이 없는 기괴한 문장들이 어지러이 배열되어 있었다.

“자, 여길 보게.”

성조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희미하게 접혀 있는 선이었다.

그 선을 따라 접자 차례로 글자들이 종이 뒷면에 가려졌다.

여러 번 복잡하게 종이를 접고 펼치길 한참.

마침내 성조가 접힌 부분의 한쪽 면을 펼치자, 단 열 글자만이 그 위에 드러났다.

-모월 모시 의주 백산 상단

그것을 본 결의 눈동자가 굳어졌다.

백산 상단이라면 명나라와 자주 거래를 하는 대상단이 아니던가.

특히 궐에 진상하는 명나라의 특품 역시 대부분 백산 상단을 거쳐 올 정도니, 조선에서 가장 크고 힘 있는 상단이라 할 수 있었다.

“의주는 명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길목이다. 굳이 의주에서 백산 상단을 치는 거라면, 명에서 교역할 물품을 빼앗기 위함인가?”

“자네 예상이 맞네. 찾아보니 정확히 이 날에 백산 상단이 명나라에 당도하기 전 원인 모를 습격을 당해 거의 모든 물품을 약탈당했다더군. 그땐 국경을 침탈한 여진족의 소행이라 생각했지만…….”

성조가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어 말하였다.

“이 밀서를 보면, 아니란 걸 알 수 있지.”

이제껏 국경에서의 약탈은 여진족의 행패라고만 여겨 왔거늘.

준백의 마수가 생각보다 조선에 더 깊게 뻗쳐 있음이 분명하였다.

결은 자신의 서탁 아래에 숨겨 놓았던 또 다른 밀서를 꺼냈다.

이미 산산조각으로 찢겨 쉽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밀서의 접는 방법을 따라 글자들을 조합해 나갔다.

마침내 필요 없는 글자들이 죄 사라지고, 이번에는 단 세 글자만 남게 되었다.

“북귀살(北鬼殺)…….”

한 글자 한 글자 입안에서 굴리던 결이 턱에 힘을 주었다.

북귀살. 북귀를 죽여라.

이제 와 새삼스러울 것도 없건만.

막상 종이에 선명하게 적힌 명령을 보니 피가 뜨겁게 들끓었다.

“이건 우리끼리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하면 어찌하려고?”

“사헌부에 고하여 여진족 도적들의 짓이라 보고되었던 약탈 건을 다시 조사하게끔 해야지. 잃어버린 물품은 분명 조선, 이곳 한양에서 다시 돌고 있을 것이다.”

“그건 밀서를 공개하면 쉽게 해결될 일 아닌가.”

“이 인장의 주인이 영상이라는 증거가 없어. 그자가 지금 사용하는 인장과 확연히 다른 것이다.”

자객과 남준백의 연결고리는 가지고 있는 이 밀서가 전부였다.

그러나 밀서에 찍힌 인장의 주인이 남준백이란 증거가 없으니.

밀서를 공개해 보았자 꼬리를 자를 틈만 내어주는 꼴이었다.

돈의 흐름은 그 흔적이 남기 마련이니, 확실히 물증이 남을 수 있는 여진족 약탈 건을 조사하는 쪽이 더 확실하고 빠른 방법일 터.

‘무엇보다…… 단이의 어머니가 갖고 있었던 밀서의 뜻도 알아야 하고.’

섣불리 파헤쳤다간 누구보다 단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여 남은 반쪽을 찾을 때까지 결은 함부로 단이의 밀서를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불안한 예감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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