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사헌부가 준백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는 소식은 조정에도 금세 퍼져 나갔다.
감히 일개 중하급 관리도 아닌, 조정 신료들의 영수인 영의정이 불미스러운 일로 사헌부의 조사를 받게 되다니.
다들 그 내막을 궁금해하느라 온 귀가 열려 있었다.
무엇보다 조사의 시작이 결로 인한 것임이 밝혀졌을 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북귀가 무슨 수로 영상을 고발하였단 말입니까?”
“워낙에 비밀리에 수사가 진행되어서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소만, 들은 바로는 영상이 수하와 나눈 밀서를 발견했다고 하오.”
“제가 알기론 그것이 여진족과 관련이…….”
“흐흠!”
그때, 근정전으로 준백과 그 무리가 함께 들어섰다.
준백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훑고 지나가자 말을 나누던 관료들은 입을 꾹 다물며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사헌부에서 한창 조사를 받아야 할 이가 어찌 이곳에 왔나.
주고받는 눈짓에 그런 의아함도 가득하였다.
“아침부터 무슨 잡담이 저리들 많은 건지.”
언짢은 기색이 가득한 헛기침이 그들의 머리 위로 꾸짖듯 떨어졌다.
그들의 낯빛에 떠오른 의문들을 모두 읽은 준백이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이 조정에서 누가 감히 나를 옥죌 수 있다는 말인가.’여진족 약탈을 꾸민 것에 관한 일은 전부 근거 없는 거짓이라며 모르쇠로 일관하는 중이었다.
정체가 드러날 만한 단서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니.
사헌부에서도 이렇다 할 명확한 증좌를 찾아내지 못했다며 그를 구금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결의 증좌를 외면하여 풀어 주었다는 말이 더 옳으리라.
사헌부의 대사헌조차 준백의 편이라는 걸 결이 간과한 탓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조사할 가치가 있는 증좌 앞에서도 부러 눈을 감으며 무혐의로 낙착하였다.
심지어 준백은 집을 들락거리던 자객의 우두머리, 음수 역시 몰래 든 도둑이라 주장하였다.
‘멍청한 놈. 그러게 항시 주의를 기울이라 하였더니 기어이 뒤를 밟혀선.’준백은 쯧 혀를 차며 미간을 좁혔다.
음수는 오래전부터 준백의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해 주던 하수인이었다.
태어난 곳은 국적조차 갖지 못할 이름 없는 땅이요, 그 어미와 아비 역시 잡피가 섞인 이방인이라.
굶어 죽어가던 것이 눈빛만큼은 금방이라도 목을 물어뜯을 맹수와 같아 거두어 자신의 사병으로 키웠다.
아무리 사병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해도 모두가 암암리에 사병을 두고 있는 시대.
하나 말이 사병이지, 준백의 손아귀에 있는 사병은 사실상 거의 자객단이나 마찬가지였다.
같은 무리에서마저 강하면 잡아먹고 약하면 잡아먹히는 곳.
그곳에서 놈은 두각을 드러내며 단숨에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름도 없이 이놈아 저놈아 불리던 그에게 준백은 음수란 이름까지 지어 주고 온갖 뒷일을 맡기었다.
근본도 없는 놈이 목숨 빚에 대한 충성만큼은 대단하였으니.
그는 준백이 시키는 일이라면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완수하였다.
이제껏 실수 한번 없이 모든 일을 완벽히 해내 왔거늘.
결의 끈질긴 추격 앞에서는 놈도 맥을 못 추리는 모양이다.
‘아마, 북귀를 돕는 놈 탓이 크겠지.’준백의 눈동자가 제 뒤에 있던 정회에게로 향하였다.
그의 아들인 성조가 결과 상시 붙어 다니는 것은 온 조정이 아는 일.
일단은 정회가 잘 타일러서 어떻게든 아들놈을 잡아보겠다고 했지만, 글쎄.
‘이미 고삐가 풀린 망아지를 함부로 잡다간 뒷발에 채이기 마련이지.’여차하면, 그냥 전부 활을 쏘아 죽여 버릴 수밖에.
‘이미 그 계집종에 대한 이야기가 이곳 조정에서도 끊임없이 나돌고 있지 않은가.’말려 올라간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맺혔다.
판도를 뒤집을 만한 패는 아직 제 손에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
“옹주 아기씨.”
“…….”
“옹주 아기씨.”
넋을 놓고 있던 선정이 거듭된 부름에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옆을 보니 천 상궁을 비롯한 나인들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화연정을 걷던 옹주가 한참이 지나도록 멍한 얼굴로 연꽃만 보고 있으니.
그녀의 수심 깊은 얼굴에 덩달아 다들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어찌 그리 계시옵니까? 제 목소리도 듣지 못하시고서.”
“아…… 내 잠시 생각에 잠겨서.”
그런 선정을 의미심장하게 보던 천 상궁은 다른 나인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 일전에 영상 대감께서 옹주 아기씨께 무어 불온한 말씀이라도 올렸던 것이옵니까?”
그 말에 선정의 눈빛이 불안하게 떨렸다.
천 상궁이 그녀의 마음을 제대로 짚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날 방 안에 있던 사람은 선정과 준백뿐이었고, 선정은 그에게서 들은 말을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정의 불안한 표정에 천 상궁이 목소리를 더 낮추어 말을 이었다.
“그런 것이라면 속히 상감마마께 아뢰시옵소서. 옹주 아기씨께서 홀로 감당하실 수 있는 자가 아니옵니다.”
하나 선정은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바마마께옵서도…… 영상의 목줄을 못 틀어쥐시었거늘.’아무리 정치를 모르는 그녀라고는 하나 작금의 조정에서 영상이 지닌 힘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제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조정 대신들을 함부로 내치거나 억누를 수 없다는 것 역시.
무엇보다 준백이 제안한 것은 위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깊이 감추어두었던 열망이 아니던가.
서결을 탐하고 있다는 것을 아바마마께 솔직히 밝힐 수는 없었다.
선정은 굳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아니네. 그저 연꽃이 어여뻐 내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니.”
선정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곤 다시 산보를 이어나갔다.
하나 잠시 물러나나 싶던 생각은 침묵과 함께 그녀의 속을 다시 어지럽히기 시작하였다.
‘의빈…… 나의 남편이라.’사실상 선정의 나이는 이미 부마를 찾기에 너무 늦은 나이였다.
하나 지금이라도 부마 간택을 내린다면 마땅히 알맞은 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한데 굳이 서결 장군을 입에 올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영상이.’그것도 그녀가 마음에 결을 품었다는 걸 훤히 알고서.
화선당에도 그의 귀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조심성이 없던 것인가.
무엇이 되었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말속에 무언가 다른 뜻이 있다는 점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준백에게 실어줄 만한 힘이 넉넉지 않거니와, 설령 그럴 힘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그의 편에 서지 않을 사람이었다.
준백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여 주겠다고 하니.
‘이는 분명…… 서결 장군의 날개를 꺾는 일이 될 터인데.’부마는 정치적인 활동은 물론이고 대외적으로 어떠한 행보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즉 그가 지난 십수 년 동안 잡아왔던 적운검 또한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 아닌가.’언제나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위험한 전쟁터 대신 안전과 명예가 보장된 부마의 자리.
애초에 그는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으니, 검 하나 내려놓는다 하여 다른 선비들처럼 크게 상심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아…….”
선정은 마음이 오락가락하느라 혼탁해진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 쪽이 옳은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일을 결과 의논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준백의 눈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함부로 결을 찾아갈 수도 없으니.
쉬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홀로 끙끙 앓던 그때였다.
“…….”
멀리 보이는 준백의 모습에 선정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그녀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인 준백이 기분 나쁜 웃음을 띠었다.
***
화선당에 든 준백은 여유로운 얼굴로 인사를 올렸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옹주 아기씨.”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잘 지냈다는 말과 달리 말투와 표정은 준백을 탓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그가 다녀간 뒤로 내내 고심하느라 밤잠조차 설칠 정도였으니.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백은 선정이 우린 차를 음미하며 이런저런 인사말만 덧붙였다.
선정은 제 몫으로 따라놓은 찻잔에는 입조차 대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찾아오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소신이 옹주 아기씨를 찾아뵐 이유가 달리 있겠습니까.”
준백이 미소와 다르게 흉흉한 빛이 맴도는 눈으로 선정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지난번 소신이 드린 말씀에 대한 옹주 아기씨의 마음을 듣기 위해서지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선정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을 택하였다.
“이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신 모양입니다.”
준백이 안타깝다는 듯 미간을 모았다.
“소신이 사사로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적어 오래 기다릴 형편이 못 되옵니다.”
“아무리 의빈을 택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영상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여 제가 옹주 아기씨를 도와드리겠다 하였지요.”
준백은 빠져나갈 틈조차 주지 않고 망을 좁혀갔다.
“아직 결정을 내리시기 어려운 것이라면, 제가 명분을 하나 만들어드리지요.”
“명분이라니요?”
“옹주 아기씨께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실 수 있는, 그런 명분 말입니다.”
준백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그걸 보시면, 아마 옹주 아기씨께서도 잔가지를 쳐내시기 훨씬 수월하실 겁니다.”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처음은 그저 경고겠지만.”
준백은 선정의 말을 가볍게 끊어내며 턱을 치켜들었다.
독사의 그것과 같은 눈동자가 간악하게 빛났다.
“그다음은, 끝을 보고서야 마무리가 될 것이옵니다. 잊지 마시옵소서.”
***
생각만큼 빠르게 진척이 되지 않는 조사를 보며 결은 또 한 번 현실의 벽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준백은 담을 넘은 자객을 도둑이라 하며, 되레 없어진 물건이 있으니 그날 밤 사건을 보았다던 결과 관련이 있지 않느냐 물었다.
또한 여진족 약탈 건에 있어선 무고한 자신을 음해하려 거짓 선동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이 역시 결을 물고 늘어졌다.
여러모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준백에 분이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준백의 위치라.
이미 조정에서는 왕보다 영의정의 실권을 더욱 두려워하기에 이르렀으니, 그의 주장을 감히 거스를 이가 많지 않았다.
가장 확실한 것은 준백과 밀서 속 인장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인데, 현재로선 가장 어려운 일이니.
정승이 장수 하나 짓밟는 것은 저들에게 그저 한낱 얘깃거리밖에 되지 않을 판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결 역시 평탄할 수만은 없었다.
여진족 약탈과 관련하여 그에게까지 조사가 내려왔던 것이다.
준백이 그의 발목을 잡고 어떻게든 나락으로 떨어트리려 하니, 상황은 매일같이 급변하여 사후를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다.
‘검을 뽑아들기 전까진 내 기척을 철저히 숨겼어야 했거늘. 섣부른 판단이 내 뒤의 절벽을 보지 못하게 하였구나.’촛대 위에서 일렁이는 촛불이 결의 그림자를 흔들리게 하였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나리, 차를 올리겠습니다.”
마지막 차를 올리기 위해 온 단이의 목소리가 방문을 넘어왔다.
그러자 동트는 아침에 안개 걷히듯 그를 괴롭히던 상념 역시 일시에 사라졌다.
이제 결에겐 단이가 햇살 그 자체였다.
“들어오거라.”
문을 열어주니 단이가 찻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단이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결의 얼굴빛부터 살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였다는 기쁨에 겨워하기도 잠시.
준백의 흉계에 매일같이 시름하는 결을 보니 자연 단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은 최대한 단이 앞에서 내색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그게 어찌 가능할까.
단이에게 결은 곧 세상이요, 이제는 삶이 되었거늘.
세상의 하늘과도 같은 깊은 눈동자에 들어찬 짙은 어둠을 단이가 모를 리 없었다.
하나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차를 올리는 것 하나라.
“박하와 국화를 함께 우린 차여요. 소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숙면에 도움을 준다 합니다. 간밤에도 일찍이 잠에 드시지 못하는 것 같아 준비하였습니다.”
요 근래엔 그의 심신이 안정되고 잠자리가 편안할 수 있는 차만 골라 내오고 있었다.
결은 차를 준비하는 단이의 흰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
“밤에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냐.”
어쩐지 웃음기가 묻어 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에 단이가 부끄러워하며 눈을 굴렸다.
“그런 게 아니오라…… 새벽에 잠시 깨어 밖으로 나온 참에 나리의 방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 것이어요.”
세상이 소란스러우니, 그 세상 안에 살고 있는 그녀가 어찌 편안할까.
더군다나 자신을 둘러싼 소문 또한 여태 잠잠해지질 않고 있는 까닭에 단이 또한 걱정으로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았다.
하여 단이는 새벽에 깰 때마다 습관처럼 결의 방이 있는 곳을 보았더랬다.
어느 날은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캄캄한가 하면 또 어느 날은 달빛이 내려왔나 싶을 만큼 환하였다.
그의 방이 어둠일 땐 단이도 편히 잠들 수 있었고, 빛일 땐 단이도 오래도록 잠들 수 없었다.
그것을 어렴풋이 짐작한 결이 단이의 하얀 손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나 때문에 공연히 네가 힘들어지는구나.”
마디마디마다 파고드는 길고도 단단한 손가락에 단이가 잠시 얼굴을 붉혔다.
조심스럽게 그 손을 맞잡으며.
“저는 하나도 힘든 것 없습니다. 그저 나리께서 무탈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라…….”
“내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 걱정 할 것 없다.”
결이 맞잡은 단이의 손등에 지그시 입술을 갖다 대었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생각이니.”
말씀은 비장하게 하시면서 입술로는 어찌 이리 감미로운 감촉을 주시는 건지.
손등을 꾹 누르는 말랑한 입술과 그 아래 흐르는 뜨거운 숨결에 단이는 어떤 반응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다신당에서의 깊고 짙은 입맞춤을 기점으로 결은 이렇게 둘만 있을 때마다 스스럼없이 단이에게 애정을 표하곤 하였다.
특히 결은 이처럼 단이의 손에 깍지를 껴 그 위에 입을 맞추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였다.
희고 보드라운 살결이 주를 이루는 손등에서부터 곧게 뻗은 유려한 손가락, 그리고 그 아래 연홍빛이 도는 손바닥.
그리고 맥박이 뛰는 손목까지.
결은 마치 길을 내듯 차례로 입을 맞추며 어쩔 땐 촉, 촉 아찔한 소리까지 내었다.
일부러 놀리려는 듯이.
혹은, 일부러 자극을 하려는 듯이.
그들을 둘러싼 문제는 죄 사라지고, 마치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금방이라도, 그 손목을 넘어 더 짙은 길을 낼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