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하나 결의 입술은 단이의 손목 이상으로는 절대로 넘어오지 않았다.
사내 된 자로서 마음에 품은 여인에게 눈길과 손길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녀를 아끼고 배려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하여 결은 애꿎은 단이의 손만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었다.
한겨울 얼어붙은 호수 같던 나리는 그 속에 꺼지지 않는 불을 품으셨던가.
입술이 지나는 곳마다 불길이 일어 살갗을 홧홧하게 만들고 마침내 온몸이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 낯설고도 생경한 느낌이 어색하여 손을 빼려 하여도 도통 놓아주질 않으니.
결에게 잡혀 있는 내내 단이는 눈앞이 번쩍번쩍하고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그러나 사내를 모르는 그녀가 그 아득하고도 이상야릇한 감촉을 어찌 풀어낼까.
해서 단이는 턱턱 막히는 숨을 애먼 헛기침으로 달래야만 했다.
덕분에 이제는 한 손으로 차를 우리는 경지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이제 차를 드시어야지요.”
잔뜩 어깨를 움츠린 단이가 여린 음성으로 말하면,
“네가 먼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결은 여전히 맥박이 뛰는 손목 위에 입술을 붙인 채 나른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잔뜩 풀어진 눈매와 달리, 그 안에 든 검은 눈동자는 마치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바짝 조여 있었다.
단이는 그 시선이 자신의 목을 그러쥐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한 모금, 입안에 머금기 무섭게 그 위로 내려앉는 불.
붉은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결이 순식간에 그 안에 고인 차를 앗아갔다.
비록 삼키는 건 차뿐만이 아니었지만.
찻물이 사라진 빈 공간을 공연히 휘젓는 것은 아쉬움의 흔적이었다.
그러곤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듯 단이와 찻잔을 번갈아 보았다.
다비가 비워야 하는 건 첫 잔 전부이니, 단이는 다시 차를 머금을 수밖에.
그러면 어김없이 결이 고개를 숙여 또 그 안에 담긴 차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셨다.
차가 뜨거워 한 번에 많이 머금을 수 없으니 한 잔을 비우는데 족히 한 다경이 걸렸다.
그렇게 느릿하게 첫 잔을 비우고 나면 남은 차는 이미 식어버려 도로 차로에 올려야 했다.
타닥타닥, 작게 타오르는 솔방울 숯을 보며 두 사람은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을 즐겼다.
이 아늑한 시간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검은 손길이 서서히 뻗쳐오는 줄도 모른 채.
***
다음 날.
훈련원은 때아닌 사헌부 관원들의 등장으로 소란이 일었다.
허락도 없이 내부로 발을 들인 사헌부 감찰은 곧바로 결이 있는 집무실까지 들어갔다.
벌컥, 난데없이 열린 문에 결이 날 서린 눈으로 불청객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목화가 집무실 안에 성큼 발자국을 남겼다.
결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오.”
“서결 장군을 명과의 교역품과 진상품 약탈 및 위조의 죄로 추포하라는 명이 내려왔소.”
무역품과 진상품 약탈, 그리고 위조.
이것은 전부 자신이 준백을 고발했던 내용이 아니던가.
‘결국, 이리 나오겠다는 것인가.’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준백이 수를 써서 그 죄를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듯하였다.
차오르는 분노에 결은 잠시 숨을 고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가 자리에서 꼼작도 않으니, 지레 긴장하고 있던 감찰이 뒤에 서 있던 나장들에게 고갯짓을 하였다.
우락부락한 나장들이 곧 포승줄을 손에 들고 결에게 다가오려던 찰나.
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들이 모두 주춤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모두 북방 귀신의 위세를 아는 까닭이라.
결은 그런 나장들을 무심한 눈으로 보며 이내 자리에서 나왔다.
“힘 빼지 마시오. 내 발로 갈 테니.”
그러곤 스스로 오라를 받고 그들과 함께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사헌부 관원들에게 끌려가는 결의 모습에 훈련원 군사들이 전부 몰려나왔다.
소란은 곧 소다옥까지 들려왔다.
“무슨 일 있나?”
어수선한 소리에 밖으로 나왔던 단이는 두 팔이 결박당한 채 어딘가로 끌려가는 결을 보고 순간 가슴이 철렁하였다.
한눈에 보아도 좋지 않은 상황.
불안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나리, 서결 나리……!”
“물렀거라!”
놀란 단이가 헐레벌떡 뛰어오자, 그녀를 알지 못한 나장 하나가 거칠게 밀어내려 하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순순히 뒤를 따르던 결이 한순간 냉기를 품으며 나장의 어깨를 짚었다.
“손대지 마시오.”
“…….”
“내 다비오.”
뒷골이 서늘해질 만큼 위압적인 목소리라.
나장은 자신도 모르게 얼른 단이를 놓아주었다.
나장에게서 풀려난 단이가 아무렇게나 결의 옷자락을 그러쥐며 울먹였다.
“나리, 어디로 가시는 것이어요? 이 사람들이 어찌 이리 나리를…….”
“쉬이. 울지 말거라.”
단이와 눈높이를 맞춘 결이 그녀의 눈가에 차오른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전할 여유는 없는 터라.
그는 나지막이 단이를 달래고 주의를 당부하는 것에 남은 시간을 썼다.
“오늘은 함께 퇴청하지 못할 듯하니, 진위에게 일러 먼저 집으로 가 있거라. 행랑아범이 묻거든 내가 조사를 받으러 갔다고만 말해주고.”
“무슨 조사요? 나리께서 어찌, 무슨 죄가 있다고……!”
낮게 흘러드는 목소리가 한없이 다정하여 단이는 더욱 애가 탔다.
금방이라도 저 멀리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나리께서 영영 돌아오시지 못할 것만 같아서.
하여 단이는 동아줄처럼 결의 옷자락을 더욱 단단히 움켜쥔 채 물었다.
“그러면 언제 오시는 것이어요? 오늘 바로 오시는 것이어요? 아니면 내일?”
결은 대답 대신 그저 애틋한 눈으로 단이를 바라보았다.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준백이 어디까지 일을 꾸몄는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였는지에 따라 어쩌면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모를 일이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은 처음으로 지킬 수 없는 약조를 하였다.
단이의 눈물을 멎게 하고 싶어서.
이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그러니 걱정 말고 있거라.”
결은 또다시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선 이내 숙였던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자신을 잡고 있는 작고 여린 손등을 톡톡 두어 번 다독이며.
그 손길에 옷자락이 서서히 단이의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나리, 가지 마시어요. 나리!”
“조사를 받아야 할 죄인이다. 이만 비키거라.”
“나리!”
결의 옷을 꽉 잡고 놓지 않으려는 단이를 나장이 팔로 막았다.
결국 단이는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그러쥐고 있던 한 줌의 옷자락마저 놓치고 말았다.
비첩이니 작당이니, 북귀와 그의 다비에 대한 묘한 소문을 숙설거리던 이들마저도 지금은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희 나리를 어찌 죄인이라 하시는 것이어요! 저희 나리께서 무슨 잘못을 하시었다고, 어떤 죄가 있다고……!”
단이의 애달픈 항변에도 결을 호송하는 이들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내어 훈련원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저만치 멀어지는 결의 뒷모습에 단이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낌을 삼켰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어찌해야 좋을까.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해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과 발밑에 불이 떨어진 듯하여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흐느끼는 입을 손으로 꾹 막고 발만 동동 굴리기를 잠시.
단이는 곧 눈앞에 있는 진위를 발견하고서 그에게 달려갔다.
진위가 착잡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장군께 얘기 들었다. 일단 장군의 말씀대로 집에…….”
“성조 나리께 가야겠습니다. 저를 성조 나리께서 계신 곳으로 데려다주시어요.”
“네가 좌랑께 가서 무얼 한다고?”
“성조 나리라면 분명 해결책을 찾으실 터이니, 한시라도 빨리 그분께 이 상황을 알려야 해요. 잠시라도 좋으니 그분을 뵙게 해주시어요. 네?”
말려 봤자 들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병조 앞으로 가도 그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을 텐데…….”
난감한 듯 이마를 짚던 진위는 일단 가 보기나 하자며 길을 나섰다.
하나 한낱 여인이 어찌 병조에 함부로 들어갈 수 있을까.
입구에서부터 가로막혀 사정을 하던 그때.
“한 좌랑, 어디 가는가?”
“내 잠시 훈련원 좀 다녀오겠네.”
“업무 시간에 그곳을 왜 간다고……. 한 좌랑, 이보게!”
때마침 그들을 발견한 성조가 동료에게 흘리듯 빠르게 말하곤 단이와 진위를 데리고 나섰다.
앞장서 훈련원으로 들어온 그는 곧장 소다옥으로 향하였다.
지금으로선 이곳이 가장 이야기를 나누기 안전한 곳이므로.
단이는 소다옥 문을 닫기 무섭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서결 나리께서 조금 전에, 갑자기 어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나도 안다. 사헌부에서 결을 데리고 갔다더군. 그러잖아도 소식을 듣고 나도 사람을 보내 알아보려던 참이야.”
성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아직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언뜻 듣기로는 결이 밀서를 발견했다던 곳에서 그의 이름이 적힌 또 다른 밀서가 타다 만 채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그날 오두막이 불타는 것을 결은 물론이고 자신 또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불길은 거의 산 전체를 태울 만큼 맹렬한 것이었다.
한데 그 불길 속에서 또 다른 종이가, 그것도 결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나왔다니.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날 놓친 자객이 분명 준백의 명을 받고 수를 쓴 게 분명하였다.
‘지금의 대사헌은 그 누구보다 영상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아들과 사촌이 지난해 영상의 도움으로 요직으로 기용되었으니.’문제는 사헌부가 풍문거핵(風聞擧劾), 즉 소문만으로도 고위 관료를 단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임금께서 총애하는 장수라도 사헌부의 탄핵에 걸리면 해결하기 어려울 터.
가뜩이나 단이에 대한 소문이 나돌고 있는 이때, 사헌부 행은 결에게 그리 좋은 경과가 아니었다.
‘한데 어찌 이 아이를 두고 결만 잡아갔단 말인가?’
아까부터 이상하게 찝찝하였던 마음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사실 확실한 증좌가 필요한 일이라면 굴복시키기 어려운 결보다는 힘없고 나약한 단이를 공략하는 편이 훨씬 더 쉽고 빠를 터.
한데 준백은 그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서결만 잡아들이도록 판을 꾸몄다.
‘여진족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누가 보아도 단이가 얽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죄목을 꾸며 놓고서 말이다.
꼭 누군가에게 일부러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저 결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인가, 아니면 다른 목표가 있는 것인가.’
아무리 고심해도 성조조차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단이가 언제든지 저들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으로선 결의 목을 틀어쥐기에 가장 좋은 패였으므로.
‘일단은 이 아이에 대한 소문이라도 거두어내야 결의 죄목이 하나라도 줄어들 텐데.’
고작 타다 만 종이만으론 확실하게 증좌라 들이밀기 어려울 테니, 그들은 어떻게든 단이와 관련된 추문을 들고 결을 압박하려 들 것이다.
하나 심 다점의 전 고객들을 찾기도 전에 일이 이렇게 꼬여 버렸으니.
‘차라리, 아버지한테 가서라도…….’
성조는 정회를 떠올리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이라면 정회는 자신을 가둬서라도 결을 돕지 못하게 만들 게 분명했다.
일단은 정회까지 손을 써서 막기 전에 자신이 직접 증좌가 거짓임을 주장해야만 했다.
그 사이 등짐장수 석 씨가 부상단을 이용하여 단이의 무고함을 증명해 줄 증인들을 최대한 빨리 찾아와주길 바라는 수밖에.
저들이 단이까지 잡아들이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복잡한 눈으로 단이를 보던 성조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다동, 혹 네가 이전에 말한 이들 외에 더 찾아볼 만한 자는 없더냐.”
“심 다점의 고객들 말씀이어요?”
“그래. 추국이 시작되면 저들은 너와의 소문을 제일 먼저 화두에 올릴 것이다. 한 명이라도 빨리 찾아 네 소문의 진위를 가린다면 어떻게든 결에게 유리한 방면으로 틀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저와 그나마 친분이 있던 분들은 그때 말씀드린 이름이 전부이온데…….”
울음 섞인 숨을 삼킨 단이는 황망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기억을 하나둘 들춰 보았다.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여진족이 아닐 수도 있을 거라 증언해 줄 만한 상인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잘 알 만한 사람. 나와 심 다점을 잘 알 만한 사람. 심 다점을, 잘 아는 사람…….’
그때, 단이의 머릿속에 왕 노인이 떠올랐다.
“아!”
어찌 자신을 아는 조선인만 생각하려 했을까.
심 다점을 맡은 지 겨우 2년밖에 안 된 자신보다는 왕 노인을 아는 조선인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왜, 무어 더 생각난 것이 있느냐?”
“왕 할아버지, 그러니까 저를 키워주신 분과 아주 절친하게 지내시던 분이 계시었습니다.”
성조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 그분은 누구시냐?”
“성함은 알지 못하지만, 왕 할아버지께서 그분을 항상 주파(酒杷) 옹이라 부르셨습니다.”
“주파 옹이라.”
“예. 항상 술 주걱을 들고 다니셔서 그런 별칭으로 부르시었어요. 기억하기론 술을 주로 거래하시던 분이시었습니다.”
“좋아. 당장 사람을 보내어 그런 별칭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부디 살아계셔야 할 텐데.”
“정정한 분이시었으니, 변고가 없는 한 무탈하실 것이어요.”
심 다점을 떠나기 불과 석 달 전만 해도 그의 이름으로 제사용 술이 왔더랬다.
무엇보다 주파 옹이라면 왕 노인이 유일하게 깊은 속내까지 털어놓던 벗이 아닌가.
한 성격하는 왕 노인마저 밀릴 만큼 성격이 드세고 강퍅한 데다, 술은 물론이고 차에 있어서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깐깐한 이라.
한번은 그가 보는 앞에서 찻잎이 담긴 봉투를 함부로 다루었다가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이 났던 단이였다.
하여 단이는 늘 그를 무서워하고 멀리하였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왕 노인에겐 둘도 없는 벗임엔 틀림없었다.
필시 그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 또한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이야기까지 알고 계실지도 몰라.’
예컨대, 엄마에 대한 이야기 같은.
‘그분 손에 부디 이번 일을 해결할 실마리가 들려 있어야 할 텐데…….’
단이는 이 순간에도 결에게 무슨 험한 일이 있진 않을까, 불안으로 뭉친 가슴을 꾹 눌렀다.
부디 하루빨리 결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가 무사히 제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단이는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