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의자에 묶인 결은 단 하루 새에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얼굴 곳곳에 생채기가 났으나, 그나마도 아직 본격적인 문초가 시작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리 증좌가 있는데도 감히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오?”
감찰이 결의 앞에 타다 만 종이를 들이밀었다.
반 정도가 불에 타 온전한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남은 글자로는 결이 여진족을 이용하여 일을 도모하고 그것을 모두 영의정 남준백에게 뒤집어씌울 것이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거기다 하필 결의 것과 흡사한 필체니.
사헌부는 결이 이전에 올린 문건들과 비교하여 그의 것이라 확신하였다.
결은 한 치의 틈도 없는 눈빛으로 종이를 보며 말하였다.
“몇 번을 말했지 않소. 그 오두막에 간 것은 맞으나 영상 대감의 집 담벼락을 넘은 흑객을 뒤쫓은 것이었고, 나는 오히려 그 흑객에게 습격까지 당했었소. 오두막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그 안과 밖을 수색하였지만, 내가 고발한 밀서 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소.”
“그래서 우리가 추가로 조사를 하니 이런 것이 나왔다지 않소. 심지어 필체까지 똑같은데 어찌 부정하는 것이오?”
그 말에 결은 한순간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남준백, 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나를 보내려는 것이냐.’어금니에서 바득 사나운 소리가 나왔다.
결은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감찰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언뜻 보기엔 비슷하지만 내가 쓴 것이 아니오. 나와 함께 오두막에 갔던 병조 좌랑 한성조가 모든 걸 증명해 줄 것이오.”
“그런 사실 없다고 하던데.”
감찰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한 좌랑에게 이 일을 물었으나, 귀관은 아무것도 모른다 하였소. 오히려 왜 이런 일에 자신의 이름이 나왔는지 모르겠다며 화를 내시더군.”
결이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라 생각한 감찰이 허리를 바짝 숙여 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제 순순히 자백하시지 그러오.”
매섭게 비틀어진 입꼬리가 결을 겁박하였다.
“하…….”
그러나 결은 되레 헛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것을 짧게 흘리며 그런 감찰을 같잖다는 듯 보았다.
벗의 배신에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하건만.
결은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웃음이나 흘리고 있었다.
실성을 한 것인가, 체념을 한 것인가.
난데없는 웃음에 감찰은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지, 지금 감히 웃은 것이오?”
“한성조가 모른다고 했다라…….”
서서히 고개를 모로 기울인 결은 뚝 웃음을 그치며 그런 감찰을 날 서린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그 거짓말은 영상께서 시킨 것이오?”
“…….”
“아니면 아들을 끔찍이 아끼시는 좌찬께서?”
감찰의 동공이 옅게 떨렸다.
일부러 그의 기세를 꺾으려 거짓말을 하였건만.
결은 아주 쉽게 그것이 거짓이란 걸 간파하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성조가 결의 문제에 있어선 무모할 정도로 발 벗고 뛰어드는 인물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감히 그런 성조를 가지고 거짓말을 하려 했으니.
하늘이 땅이 됐다는 말보다 더 어이가 없는 거짓말이었다.
결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감찰의 눈을 보며 말하였다.
“누가 꾸민 농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알량한 거짓을 떠올릴 시간에 당장 북방의 약탈 건 먼저 새로이 조사하시오. 분명 약탈당한 물품들이 다시 영상 대감의 손을 거쳐 조선 내 시장에서 돌고 있을 터이니.”
“그 또한 죄인이 영상 대감께 누명을 씌우려 한 것을 모를 줄 아시오?”
“…….”
“여연에 있을 적, 죄인이 오랑캐들과 작당을 하고 몰래 뒷주머니를 채우고 있었다는 정보까지 들어왔소.”
감찰은 결의 말이라면 한마디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로 다시 상체를 꼿꼿이 폈다.
“뭐, 이건 그 계집을 취조해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겠지. 죄인의 모든 작당이 다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 계집. 더 듣지 않아도 단이를 가리키는 말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공작에도 내내 평정을 유지하던 결은 한순간 타오르듯 과민하게 반응하였다.
“그 아이는 가만 놔두시오! 내 다비는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소.”
단 한순간도 흔들린 적 없던 결이 단이라는 이름에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그 모습에 의기양양하게 입술을 비튼 감찰이 우위에 선 눈으로 말하였다.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판단할 몫이지.”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결이 몸을 결박한 줄을 끊을 기세로 몸부림쳤다.
곧 나장들이 우르르 몰려와 그를 사정없이 짓눌렀다.
아무리 결이라도 몸이 묶인 상태로 장정 여럿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아아아악!”
맹수의 울음과도 같은 포효가 사납게 허공을 뒤흔들었다.
***
깊은 밤.
횃불 두어 개가 겨우 밝히고 있는 옥사 안으로 두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옥사 안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그들은 곧바로 좁고 긴 길을 지나 어느 죄인 앞에 멈추어 섰다.
좁은 칸 안에 홀로 꼿꼿이 앉아 있던 결은 제 앞에 드리운 그림자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처음엔 검은 인영으로만 보이던 사내가 서서히 몸을 낮추어 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전하.”
결이 자세를 고쳐 앉고 이선에게 절을 하였다.
일그러진 눈으로 그를 보던 이선이 어깨너머로 고갯짓을 하였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내금위장이 들고 온 보따리를 옥사 안으로 넣어 주었다.
안에는 술병과 삶은 계란, 그리고 주먹밥 두 덩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그대가 영상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다니. 여진족 약탈 건을 꾸몄다니! 전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애가 끊어지는 듯한 음성 속에는 당장 결을 꺼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죄책감이 가득하였다.
결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말하였다.
“소장은 결백하옵니다. 저들이 발견하였다는 밀서는 제가 쓴 적이 없는 위조된 것이옵고, 소장의 다비에 대한 소문 역시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트린 것이옵니다.”
“나 역시 그대를 믿는다. 곧 수일 내로 그대를 의금부로 보낼 것이니, 그때까지만 조금 더 참아다오.”
의금부라면 임금의 직속 수사기관이니, 지금처럼 준백의 의도대로 흘러가긴 어렵게 될 터.
이선 역시 그것을 생각하여 결을 사헌부에서 의금부로 압부하려 하는 것이었다.
“그대만큼은 과인이 끝까지 지킬 것이다. 나의 사람을 더 이상 잃을 순 없으니. 하나…….”
이선이 한층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대의 다비가 문제다.”
다비란 말에 결이 절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정녕 제 다비까지 추포된 것이옵니까.”
얼어붙어 있던 눈동자가 이리도 황망히 흔들리는 것은 처음 보는 터라.
뜻밖의 모습에 잠시 놀란 이선은 곧 한숨처럼 말하였다.
“그대의 다비는 무사하다. 그러잖아도 그대가 걱정할까 싶어 사람을 보내 알아보고 온 참이다.”
그제야 결이 길게 숨을 내쉬며 경직되었던 몸을 풀었다.
그러곤 감사의 뜻으로 이선에게 다시 한 번 깊이 머리를 숙였다.
‘겨우 계집종 소식 하나에 이리도 좌지우지될 줄이야…….’이선은 착잡해지는 어심을 애써 다스렸다.
떠돌던 풍문이 기어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만 탓이라.
오랑캐 계집이 오랑캐를 죽이던 장수를 속여 이 땅으로 몰래 발을 들였다는.
그로 인한 파급력은 감히 임금으로서도 잠재우기 힘든 것이라.
결이 품은 여진 아이의 존재는 너무도 위험하고 또 불안정한 것이었다.
“만약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과인은 그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단이를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하나 결이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목숨을 내걸어서까지 지켜온 여인이거늘.
단이에게 있어 결이 그러하듯, 결에게 있어 단이란 이 끔찍한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거늘.
“……소장은, 그 아이를 선택할 것입니다.”
결은 이 문제만큼은 타협할 수 없다는 듯 굳건한 의지를 내보였다.
“감히 전하께 말씀 올리기 황공하오나.”
“…….”
“그 아인, 세상에 미련 없는 저에게 유일하게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는 아이옵니다.”
“그 아이가 너를 위험케 할 오랑캐라 하더라도 말이냐.”
결은 미동 없이 올곧은 눈으로 이선을 마주 보았다.
“신분의 귀천이 중요하지 않듯, 그 아이의 피 역시 제겐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이가 오랑캐든 조선인이든, 그런 건 이미 상관없어진 지 오래였다.
“믿을 뿐이옵니다. 제 사람이니.”
그 아이는 그저 다비일 뿐이다.
나의 다비인 단이.
나의 목숨인 단이.
나의…… 단이.
***
결이 사헌부에서 의금부로 압부된 지도 며칠이 지났다.
임금의 직속 수사 기관인 만큼 사헌부에 있을 때보다는 대우가 훨씬 나아졌지만, 그럼에도 이선은 아직까지 결을 풀어줄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무고한 이에게 없는 죄를 만들어 추궁하니 당연히 나오는 것이 없을 수밖에.
하나 아무리 임금이라도 혐의가 남아 있는 결을 함부로 풀어줄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사헌부에서 탄핵을 들고 나와, 조정 대신들이 전부 관직을 두고 물러나 시위를 하는 일까지 생길 수 있었다.
때문에 이선도 심사숙고하여 최대한 결의 무혐의를 입증하는 방법으로 상황을 끌고 나가야만 했다.
그 사이 여름의 무더위는 한풀 꺾여 아침저녁으로 한기가 스며들었고, 결이 없는 집은 다시금 이전처럼 황량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온 단이는 그날로부터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소문이 결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던 가솔들도 점차 세간에 나도는 소문을 듣고 단이에게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기 시작하였다.
개중엔 아예 대놓고 단이를 험담하는 이들도 있었다.
“은혜도 모르는 것.”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 하였거늘.”
앞에서나 뒤에서나 저 들으라는 듯 수군거리는 통에 집 안에서조차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나리께서 그리되신 거야.’풀려난다는 소식도 없이 자신의 죄만 더 크게 불어나니.
끼니조차 거르고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단이는 오도카니 웅크린 채 눈물로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분수도 모르는 것.”
“저 때문에 장군께서 험한 고초를 겪고 계신데, 혼자 편하게 방구석에 있는 모양이라니.”
“나 같으면 송구스러워서 당장 관아 앞에 무릎 꿇고 석고대죄라도 할 텐데…….”
방문 너머로 계집종들 서넛이 몰려와 험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들은 결의 목욕 시중을 함께 들던 여종들로, 이전부터 단이를 굴러들어온 돌 취급하며 무리에 끼워주지 않던 이들이었다.
단이가 자신에게 주는 벌인 양 그네들의 아픈 말들을 다 듣고 있던 그때.
“예서 잡담할 시간에 가서 먼지나 닦거라. 도련님께서 안 계신다고 집안 관리까지 소홀히 할 셈이냐!”
언제 온 것인지 보선 어멈의 날 선 호통이 날아왔다.
듣기만 해도 눈물이 쏙 빠질 만큼 여종들을 호되게 혼낸 후.
보선 어멈은 작은 소반을 들고 뒤따라온 덕원에게 눈짓하였다.
덕원이 함께 가자 고갯짓하였지만 보선 어멈은 됐다며 심드렁하게 손만 저었다.
결국 덕원 혼자 단이의 방 앞에 섰다.
“단이야. 자느냐?”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단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얼마나 울었는지, 두 뺨은 핼쑥해지고 두 눈은 죄 빨개져 보는 것만으로도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쯧쯧……. 애먼 것이 맘고생만 하는구나.”
덕원은 들고 온 소반을 단이 앞에 놓아 주었다.
그 위엔 묽게 쑨 미죽과 김치, 그리고 약과가 올라와 있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상을 보던 단이가 고개를 들었다.
닫히지 않은 문 너머, 보선 어멈이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이가 끼니를 거를 때마다 한 번씩 이렇게 보선 어멈과 덕원이 찾아와 그녀에게 먹을거리를 챙겨 주었던 것이다.
비록 대부분을 그대로 버려야만 했지만.
“그리 있다간 네가 쓰러질 판이다. 이리 앉아 이거라도 좀 들거라.”
단이는 다시금 홧홧해지는 눈시울을 아래로 내리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 없습니다.”
“그래도 먹어야 한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잖느냐.”
“나리께서 저 때문에 고초를 당하고 계신데…….”
결국 참았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치맛자락을 적셨다.
단이는 죄인처럼 더욱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감히 무슨 염치로 주린 배를 달래고, 두 발 뻗어 편히 누울 수 있겠습니까.”
“단이야…….”
덕원은 제 가슴이 다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에 선뜻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쭙잖은 위로로 그녀의 마음을 달랠 수 없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밥상을 앞에 두고도 미적거리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던 보선 어멈이 결국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곤 단이의 손에 억지로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먹어라.”
“저는…….”
“얼른 먹으래도!”
불호령을 내린 보선 어멈은 아예 자리까지 잡고 앉아 단이의 손을 잡고 대신 미죽을 펐다.
“그래야 나중에 도련님께 석고대죄를 하든, 네 억울한 오해를 풀든 할 것 아니냐. 이대로 손가락질만 받으며 아무것도 않고 허송세월만 할 셈이냐!”
보선 어멈의 말들이 단이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여려 빠져가지곤.”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자 보선 어멈이 직접 옷소매로 눈을 닦아주었다.
“정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을 생각이 아니라면 먹어라. 먹고서 힘을 내. 해서 아니라고 발악을 하든, 멍석 깔고 싹싹 빌며 머리를 조아리든 해.”
“…….”
“네가 해야 할 건 그런 것들이다. 이리 매가리 없이 축 처져 있는 게 아니라.”
울컥 설움이 북받친 단이가 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참았다.
그 모습에 길게 한숨을 내쉰 보선 어멈이 손수 숟가락 위에 김치를 올려주었다.
“널 향해 무어라 손가락질하는 연놈들이 있거든 그저 입만 살았다며 콧방귀나 뀌거라. 도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네 뒤엔 나와 행랑아범이 있어 줄 터이니.”
“보선 아주머니…….”
“울지 마라. 꼴사납다. 얼른 먹고 다신당 정리나 해. 이 집에서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감사하단 말을 하고 싶은데 눈물이 죄 목구멍을 막아버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소리를 내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더라.
하여 단이는 보선 어멈이 떠준 미죽과 김치를 입에 넣고 울음과 함께 꼭꼭 씹어 삼켰다.
보선 어멈의 말이 옳았다.
이리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을 시간에, 차라리 결이 붙잡혀 있는 곳 앞에 가서 멍석을 깔고 무릎을 꿇는 것이 더 나았다.
그렇게 뭐라도 해야만 했다.
이곳은 또 다른 전쟁터이니. 내 몸을 내가 챙기지 않으면 결국엔 짐만 될 뿐이었다.
하여 단이는 속이 얹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수저질을 하였다.
음식을 다 먹고 나면 정말로 의금부가 있는 곳으로 향할 기세로.
그렇게 남은 미죽을 거의 비워가던 그때.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대문 밖에서 다급한 성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 나리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순식간에 얼굴에 핏기가 가신 단이가 신조차 신지 않고 버선발로 대문을 향해 뛰어갔다.
있는 힘껏 대문을 여니, 급하게 말을 몰고 온 성조가 얕게 숨을 몰아쉬며 단이를 내려다보았다.
“혹 나리께, 나리께 무슨 일이라도……!”
“찾았다.”
“……예?”
성조가 상기된 얼굴 위에 미소를 띠었다.
“주파 옹. 네 무고함을 입증해 줄 그 노인 말이다.”
***
하지만 상황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영상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선정의 말에 준백의 얇디얇은 입술이 더욱 가늘게 늘어졌다.
그는 부러 못 들은 척 선정에게 되물었다.
“지금 무어라 하시었습니까? 옹주 아기씨.”
준백을 똑바로 응시한 선정이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 말하였다.
“서결 장군을 제 지아비로, 부마로 만들어 주십시오.”
“…….”
“그자를 당장 풀어달란 말입니다!”
결국 준백이 파놓은 구덩이 앞으로 선정이 한 걸음 발을 내디디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