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서결 장군을 제 지아비로, 부마로 만들어 주십시오.”
“…….”
“그자를 당장 풀어달란 말입니다!”
선정은 제 자존심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치맛자락을 꼭 부여잡았다.
몇 날 며칠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심하였더랬다.
결의 투옥 소식에 철렁이던 가슴을 생각하면 지금도 바닥이 푹 꺼질 만큼 아득하였다.
처음엔 그저 경고라고 생각하였다.
한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결을 풀어주었단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모진 고문에 그의 몸이 많이 상하였다느니, 조금 있으면 아예 거동조차 못 할 것 같다드니 하는 흉흉한 소문만 바람결에 떠돌았다.
의금부로 옮겨졌단 이야기를 들었을 땐 잠시나마 안도하였으나, 결이 풀려나지 못하는 건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직접 아바마마를 찾아가 간곡히 청하기도 하였다.
돌아온 대답은 그저 이 일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정치니 뭐니 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몰랐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건 있었다.
‘영상이, 나를 이용하려 서결 장군을 구속하려는 것이로구나.’
선정이 끝내 결정을 하지 못하여 이대로 놔둔다 하여도 결박.
선정이 결심하여 그를 의빈으로 맞이하여도 끝내는, 결박.
이것이야말로 진퇴양난이라.
선정은 외면으로서 그를 저버릴지, 아니면 제 손으로 직접 그를 묶어두어야 할지 선택해야만 했다.
게다가 준백이 남기고 간 말은 비단 결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은 그저 경고겠지만. 그다음은, 끝을 보고서야 마무리가 될 것이옵니다.’
결의 소식 끝자락마다 들려오던 ‘여진족 계집아이’ 역시 준백의 경고였다.
준백이 말했던 ‘그다음’은 단이였고, 끝이라 함은 그 아이의 목숨까지 앗아가겠다는 뜻일 터.
이제껏 그 아이만큼 소중한 차벗은 없었거늘.
결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단이 또한 결코 잃을 수는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였지만 더 이상 달리 할 방도가 없었다.
결국 선정은 속이 타는 듯한 초사 끝에 준백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연모하는 이를 살리는 길이야. 내가 연모하는 이를, 내 곁에 두는 길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이 결정으로 인해 어떤 파란이 일어나게 될지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지금은 결과 단이를 지켜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러잖아도 옹주 아기씨의 답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거늘.”
준백이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사특한 미소를 지었다.
“심사숙고하신 결과이니, 번복할 여지는 없으신 것이겠지요.”
선정은 당장이라도 저 간악한 자의 뺨을 올려치고 싶었다.
하나 상황을 틀어쥐고 있는 건 준백이었으므로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
선정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말하였다.
“분명 영상께서 약조하신 겁니다. 서결 장군을 부마로 만든다면 더 이상 그를 건드리지 않겠다고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옹주 아기씨.”
“…….”
“건드리지 않겠다가 아니라,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것이지요.”
끝까지 자신의 뒤가 밟힐 만한 말은 하지 않는 자였다.
선정은 그 뻔뻔한 얼굴을 노려보며 약조를 지키라 거듭 재촉하였다.
“그 약조, 어기게 된다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엇을 걸고 한 약조인데.”
“…….”
“곧 상감마마께 주청을 올리도록 하지요.”
준백의 가느다란 입술 끝이 기분 나쁘게 말려 올라갔다.
쳐놓은 덫에 어여쁘고도 방자한 사슴 한 마리가 제 발로 뛰어들었다.
커다란 호랑이를 뒤에 단 채.
***
빛이 바랜 누런 도포에 얼굴을 죄 가릴 만큼 커다란 삿갓.
단출한 등짐을 멘 채 짚신을 신은 노인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언뜻 보면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풍객 같기도 하였고, 또 언뜻 보면 아주 오랫동안 학문을 갈고닦은 지방의 노선비 같기도 하였다.
고개를 든 노인이 삿갓 아래 형형한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았다.
넓게 둘린 성벽 안으로 줄지어 들어가는 사람들 너머,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낯익은 한양 땅이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옘병……. 이 지랄맞은 곳에 또 돌아왔군.”
사나운 말투만큼이나 옹고집 같은 두 눈매, 얼굴을 가득 수놓은 주름의 수에 어울리지 않게 꼿꼿하게 선 허리.
첫마디부터 걸쭉하게 욕을 내뱉은 노인, 박충선이 오랜 여정에 더워진 콧김을 흥 내뿜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기다란 나무 지팡이로 땅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무 주걱으로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성벽을 비껴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걸음 세 번에 욕 한마디가 나오는 것이 여간 예사롭지 않은 노인이었다.
“오셨습니까.”
그때, 남산 아랫마을인 다산권 안으로 막 발을 들인 노인의 앞에 웬 양반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그를 맞이하였다.
충선은 못마땅한 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옷차림을 훑어보다 한마디 툭 던졌다.
“날 찾았다는 게 네놈이냐?”
첫마디부터 아랫사람 대하듯 함부로 하대를 하건만.
고개를 든 양반, 성조는 싱긋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충선을 마주 보았다.
“예,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하였군그래.”
충선은 그런 성조를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찌나 애타게 자신을 찾던지. 가는 곳곳마다 놈이 보낸 전령이 있어 한양으로 돌아가시라, 돌아가시라 그리 이르는 것이었다.
결국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청을 듣고 나서야 학을 떼며 한양으로 오게 된 충선이었다.
“꼭 뵙고 싶었습니다, 영감님. 아니…….”
성조는 그런 충선에게 변함없이 싱긋 웃어 보이며 예를 차렸다.
“주파 옹이라 불러드려야 할까요?”
주파 옹. 단이를 거두어 길러주었던 왕 노인의 생전 가장 절친했던 벗이 바로 이 노인이었던 것이다.
충선은 속없이 웃는 성조를 보며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건방진 것.”
“하하,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요즘 관아는 기생오라비도 들이나 보군. 사내놈이 계집보다 고우니, 원.”
“그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한때 사온서에서 영(令)으로 계셨다던가.
소문대로 참으로 괴팍한 기운이 풍기는 노인이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지내실 만한 거처를 따로 마련해 두었습니다.”
“거처는 무슨. 내 집 놔두고 애먼 데서 왜 자?”
충선은 단박에 성조의 호의를 거절하며 홱 발길을 돌렸다.
단 일각이면 누구든 호형호제하게 만들 만큼 친화력이 뛰어난 성조에게도 충선은 상당히 어려운 상대였다.
‘애 좀 먹겠군.’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일자로 맞다문 성조가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부러 따돌리려는지 노인의 보폭은 상당히 넓었다.
말도 없이 제 뒤를 졸졸졸 따라오는 성조에 충선이 성가시다는 듯 눈을 흘겼다.
“왜 따라오느냐?”
“영감을 모시러 온 것이었으니, 댁으로 무사히 도착하실 때까지 길을 살피는 것이 도리이지요.”
“영감은 무슨 얼어 죽을 영감. 그놈의 빌어먹을 관직 때려치운 지가 언젠데. 귀찮으니 더 따라붙지 말거라. 괜히 험한 말 듣고 질질 짜지 말고.”
“하하, 영감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제가 울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부모 욕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느냐?”
“상관없습니다.”
우뚝, 자리에 멈춰 선 충선이 힐긋 성조를 보았다.
이놈이 얼굴에 가면을 썼는가.
아까부터 그린 듯 만면에 퍼진 미소가 썩 보기 불편하였다.
“후레자식이 따로 있는 게 아니군.”
“예. 제가 천하의 불효막심한 놈입니다.”
그 말에도 하하, 속없이 웃는 놈의 속이 참 새까맣게 타 있구나 싶었다.
“……제기랄, 별 해괴한 놈한테 다 걸렸군.”
충선은 혼잣말로 뇌까리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전보다 걸음의 속도를 현저히 늦춘 채로.
이윽고 충선이 도착한 곳은 남산의 중턱에 위치한 초가집이었다.
오랫동안 비운 것인지 곳곳에 얇은 천처럼 보이는 거미집이 널려 있었고, 마당에는 썩은 나뭇잎이 누가 부러 버린 듯 쌓여 있었다.
대낮에도 귀신이 나올 풍경이건만.
충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사립문을 열고 들어갔다.
성조 역시 비단옷에 거미줄이 걸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
먼지가 수북한 마루에 털썩 주저앉은 충선이 제 앞에 바르게 선 성조를 뚫어져라 응시하였다.
초가을의 냉랭한 바람이 건조한 공기를 몰고 두 사람 주위를 맴돌았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 끝.
이내 못 이기겠다는 듯 충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이렇게까지 뻗대는 이유나 한번 들어보자.”
그때까지 인내심 있게 버티던 성조가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서 입을 열었다.
“압록 이북 치원에 있던 심 다점을 아십니까.”
“……심 다점? 왕제헌이 운영하던?”
“네, 맞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던 계집아이도 혹 기억을 하시는지요.”
계집아이란 말에 충선이 언뜻 경계하는 눈초리를 보였다.
성조는 그 미묘한 변화를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가 현재 근거 없는 추문에 시달려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하여 영감께서 그 아이를 위해 증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니올라에게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게야.”
충선의 심각한 얼굴에 성조는 곧 그간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충선의 표정은 점점 더 구겨져만 갔다.
이윽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충선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빌어먹게 잘못 얽혀 버린 연에 눈앞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이런 육시랄……. 연이 꼬여도 무슨 이렇게까지 꼬여.”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조의 물음에도 한참 동안 혼자서 무어라 중얼거리던 충선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아이, 그 집에서 당장 나오게 해라. 엮여서 좋을 연이 아니다.”
“연유라도 알려주십시오. 그걸 알아야 저희도 대처를…….”
“계집의 어미가 그 집안 때문에 죽었단 말이다!”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사실에 성조도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 무어라고…….”
단이의 어머니가 결의 집안 때문에 죽었다니.
아니, 그것보다 단이의 어머니가 어찌 결의 집안과 연이 있다는 말인가?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북방에 계신 분은 결의 외숙부님뿐이었거늘…….’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나 진실을 알고 있는 충선은 더 이상 해줄 이야기가 없다는 듯 성조의 옆을 홱 지나쳤다.
잠시 넋이 나가 있던 성조가 그의 뒤를 쫓으려 하였으나, 노인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그는 삽시간에 산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젠장…….”
낮게 욕을 뇌까린 성조는 급한 대로 일단 산을 내려갔다.
처음엔 온통 혼잡하여 아무것도 생각지 못하던 머리는 어느 순간부터 단 하나의 말만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 아이, 그 집에서 당장 나오게 해라. 엮여서 좋을 연이 아니다.’ 어찌하여 노인의 그 말을 곱씹고 있는 것인지는 스스로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속에 불순한 색 하나가 섞여들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런데 도성 안으로 들어온 성조에게 이번엔 더욱 놀랄 만한 소식이 찾아왔다.
“서결 장군께서 풀려나셨답니다!”
마침 그를 찾아 헤매던 청지기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말을 전하였다.
“……뭐라 하였느냐?”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좌가 아무것도 없어, 결국 무고로 풀려나셨답니다. 이번엔 오히려 대감들께서 나서서 장군의 무죄를 주장하셨다고…….”
가뜩이나 충격적인 소식에 머릿속이 복잡했던 성조는 아예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렇게나 결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조정 대신들이 앞장서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니.
분명 무언가 있다.
발을 들여선 안 될 위험한 무언가가.
“대체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이야.”
불안한 예감이 폭풍처럼 가슴에 휘몰아쳤다.
***
‘나리, 나리……!’단이는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하고서 정신없이 길을 내달렸다.
결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무작정 대문을 나선 길이었다.
어차피 기다리면 곧 집으로 돌아올 것을.
그 잠깐의 시간을 기다릴 수가 없어 단이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달렸다.
“아……!”
하나 신조차 제대로 신지 않고 달린 탓에 그만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픈 무릎조차 제대로 돌볼 새 없이 곧바로 일어나려던 그때.
그녀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괜찮으냐.”
“…….”
꿈에서조차 듣지 못해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결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훈련원을 나설 때와 다르지 않은 차림새였지만, 얼굴만큼은 고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리……!”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울음을 삼키던 단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결의 품에 안겨들었다.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는 그녀에 결도 곧 말없이 그 등을 다독여 주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하시었잖습니까. 어찌, 어찌 이리 늦게 오신 것이어요……!”
쏟아낸 원망은 차라리 더 화를 내주었으면 싶을 만큼 서럽고 애잔한 것이었다.
흐려진 검은 눈동자는 변명을 찾는 대신 눈꺼풀 뒤로 숨어들었다.
“미안하다. 오래 기다리게 하여서.”
훌쩍이며 고개를 든 단이가 결의 얼굴을 살폈다.
고된 옥살이에 얼굴이 상하시진 아니하였나.
모진 고문에 몸이 상하시진 아니하였나.
상처가 하나둘 눈에 들어올 때마다 떨어지는 눈물의 크기도 더욱 커졌다.
“저 때문에, 나리께서 이리…….”
“누가 너 때문이라 하더냐. 이 일은 너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오나, 사람들이 나리께서 저를 거두시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거라고…….”
“그리 말한 사람들이 누구더냐.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떠들지 못하게 할 것이다.”
“되었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고개를 세차게 내저은 단이가 눈을 질끈 감아 눈물을 죄 떨어트렸다.
그러곤 다시 결을 보았다.
“나리께서 이리 무사히 돌아오시었으니, 저는 다 괜찮습니다.”
애써 설움을 감추는 그 얼굴이 못내 가슴을 아프게 헤집었다.
하나 시선들이 달라붙는 길거리에서 언제까지고 울게 만들 수는 없는 터라.
“이만 가자. 집으로.”
“예, 나리.”
결은 단이를 일으켜 함께 집으로 향하였다.
“오랜만이구나. 다니올라.”
“……주파 할아버지?”오래지 않아 그들의 발길은 충선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