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도련님!”
대문이 열리기 무섭게 덕원이 뛰어나와 결을 맞이하였다.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다른 가솔들 역시 한달음에 달려 나와 결을 맞이하였다.
보선 어멈 역시 그들과 함께 다가오던 찰나.
그녀의 시선이 결과 단이의 뒤에 있는 충선에게로 향하였다.
“……영감님?”
“오랜만이구나, 순이야.”
순이?
단이의 시선이 보선 어멈과 충선 사이를 왔다 갔다 하였다.
서로 일면식이 있어 보이는 두 사람에 단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선 아주머니께서도 아시는 분이어요?”
보선 어멈은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을 대충 갈무리하고서 입을 열었다.
“이분이 내가 일전에 말하였던 술도가의 주인, 박 노인이시다.”
“예?”
예상치 못한 인연에 단이가 놀란 눈으로 다시 충선을 보았다.
충선은 번거로운 골칫덩이를 끌어안은 심각한 얼굴로 일단 들어가자며 고갯짓을 하였다.
사람들을 모두 물린 후, 세 사람은 곧장 결의 방으로 들어갔다.
찻상을 봐오겠다던 보선 어멈이 돌아올 때까지 방 안엔 서먹한 긴장감만 흘렀다.
‘왜 저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시지…….’힐긋 충선을 보았던 단이는 다시 슬그머니 바닥에 눈길을 두었다.
그러잖아도 인상이 사나운 충선은 오늘따라 더욱 매서운 눈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런 충선을 경계하듯 결도 아까부터 냉기가 흐르는 눈으로 충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오가면 좋으련만.
한쪽은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 노려보기만 하시고, 한쪽은 그 불까지 얼려버릴 기세로 냉기만 뿜고 계시니.
그 가운데 낀 단이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속으로 보선 어멈이 얼른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찻상 들이겠습니다.”
때마침 이 폭풍 같은 기류 속으로 보선 어멈이 돌아왔다.
서로를 경계하던 두 사람도 그제야 잠시 신경을 누그러트렸다.
“도련님 몫은 네가 내리도록 하거라.”
“예, 보선 아주머니.”
단이는 보선 어멈의 옆에 꼭 붙어서 함께 차를 우리기 시작하였다.
충선은 보선 어멈보다 단이가 하는 제다에 더 집중하였다.
차관에 물을 붓는 손길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전부 살피는 눈동자가 제법 예리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기막힌 인연에 대해 속은 한없이 가라앉았으니.
‘망할 노인네……. 그러게 왜 그리 일찍 뒈져가지고.’공연히 자리에 없는 왕 노인만 속으로 탓하고 있었다.
왕 노인이 살아 있었다면 단이가 이리 결을 따라 조선에 올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런 헛된 생각을 하며.
마침내 단이와 보선 어멈이 비슷하게 차를 마련하였다.
각각의 잔이 결과 충선 앞에 놓였다.
보선 어멈의 차를 한 모금 마신 충선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마셔줄 만하군.”
“다행입니다. 혹여 손이 녹슬었다 하시진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좋아하지 말거라. 내가 안주에 있을 적에 그 절 땡중 놈들이 차로 탕국을 끓이질 않나, 꿀에 재여서 내오질 않나 하는 통에 혀가 다 마비돼서 맛을 제대로 못 보고 있으니.”
충선은 말을 험하게 하면서도 보선 어멈의 차를 내려놓지 않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여간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닌 듯했다.
차를 마실 때만큼은 온전히 집중을 하는지, 충선은 차부를 다 비울 때까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는 건 결 또한 마찬가지라.
방 안엔 적막과 차 따르는 소리만 번갈아 이어졌다.
차를 전부 비우고 나서 먼저 입을 연 것은 충선이었다.
“다니올라는 내가 데려가겠다.”
뜻밖의 발언에 단이는 물론이고 보선 어멈 또한 놀란 눈으로 충선을 보았다.
당황하여 결의 표정을 살핀 보선 어멈은 곧 소리를 낮추어 말을 꺼내었다.
“영감님, 그러잖아도 단이가 차에 관심이 지대하여, 영감님께 돌아오시면 인사차 보여드리려 하였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않으셔도…….”
“그래? 잘 되었구나. 내 밑에만 있으면 차는 원 없이 배울 수 있을 게다.”
결은 잠시나마 누그러졌던 날을 다시 세우며 그런 충선을 응시하였다.
“제 다비를, 어찌 영감께서 함부로 데려가신다 하는 것입니까.”
그 말에 단이를 보던 충선이 다시 언짢은 눈을 결에게 두었다.
묵직한 신음을 흘린 그는 턱을 치켜세우며 마른 속이 훤히 보이는 말투로 말하였다.
“다니올라는 나의 가장 친한 벗인 왕제헌이 친손녀처럼 키우던 아이다. 이젠 그 벗이 죽고 이 아이 혼자 남았으니, 당연히 내가 데려가는 것이 맞지.”
“지금은 제가 이 아이의 주인이입니다.”
“값이 얼마냐? 혹 빚진 것이라도 있다면 내가 대신 지불하마.”
“제 다비는,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에 주변 공기까지 얼어붙는 듯하였다.
북방 귀신의 해괴한 저주에 대해서는 충선도 언뜻 들은 바가 있는 터라.
‘곡이하 따위의 엄살은 확실히 아니렷다.’다동 고르기가 상당히 까다롭다더니, 어렵사리 구한 다비를 빼앗기는 게 싫은가 보다 생각되었다.
충선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새 다동을 뽑을 때까지 시일을 주지. 하지만 그 이후에 바로 다니올라를 데려갈 터이니…….”
“단이는.”
충선의 말허리를 자른 결이 항의라도 하듯 힘주어 단이의 이름을 말하였다.
“이 집 식구입니다.”
“…….”
“이 아이가 아닌 다른 이를 다비 자리에 들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결국 참다못한 충선이 버럭 화를 내었다.
“염병, 젊은 놈이 뭐 이리 고집이 세? 몸종이야 이놈이 할 때도 있고 저놈이 할 때도 있는 거지!”
잘 있는 남의 다비를 다짜고짜 데려가겠다며 억지를 부리니,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거늘.
목소리는 또 어찌나 큰지, 쩌렁쩌렁한 노인의 고함에 단이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하나 보통 사람이라면 흠칫할 만한 드센 호통에도 결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바위처럼 버티었다.
“한낱, 몸종 따위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가 힘주어 발음한 탓에 ‘몸종’이란 단어는 거의 뭉개지듯 나왔다.
단이를 몸종 따위에 비교한 충선의 말에 반기를 표한 것이었다.
그 불온한 기색을 충선도 모르지 않은 바.
호랑이 같은 눈으로 가만히 결을 보던 충선이 외마디 답을 내놓았다.
“……접어라.”
그 눈빛 속에 섞여 있어선 안 될 다른 것까지 보아 버린 탓이었다.
“이 빌어먹을 인연, 더 엮으려 하지 말거라. 그게 너한테도 좋고 이 아이한테도 좋을 것이다.”
충선은 그 말을 끝으로 봇짐을 메고 삿갓을 집어 든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더 이상의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것이어요.”
단이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다시 잡기 전까지는.
“지금 뭐라 한 게냐?”
“저는 할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을 것이어요.”
“뭬야?”
충선이 날카로운 얼굴로 홱 돌아보자 단이가 흠칫 어깨를 떨며 시선을 떨구었다.
하나 입술만은 용기를 잃지 않고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하게 말하였다.
“할아버지께서 아무리 가자 하시어도 저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어요.”
단이는 마지막까지 제 뜻을 정확히 전하였다.
“저는, 나리의 다비입니다. 나리의 사람이어요.”
“…….”
“그러니 나리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저도 가지 않을 것이어요.”
허락하신다 한들, 그녀가 되레 그 명을 거부할 테지만.
단이의 말에 충선의 얼굴이 더욱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결에게서 보았던 그것이 저 아이에겐 더욱 크게 비친 까닭이라.
‘이 염병할 월하노인 같으니라고. 붉은 실을 꼬아 놔도 아주 더럽게 꼬아 놨군.’또 세상이 떠나가라 호통을 치실까.
당장이라도 버럭 소리를 지를 모양에 단이가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며 긴장하던 그때.
불같은 성질을 꾸역꾸역 삼켜낸 충선이 한 김 식은 목소리를 내었다.
“……순이야.”
“예, 영감님.”
그는 아까의 그 낯선 이름으로 보선 어멈을 불렀다.
그러곤 메고 있던 봇짐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휙 던져 주었다.
“이 통, 잘 썼다. 진즉 돌려줘야 할 것이, 이 늙은이 노망 때문에 이제야 겨우 제 주인 찾아가는구나.”
보선 어멈의 손에 떨어진 낯익은 형체의 무언가.
그것을 가까이에서 본 단이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 대나무 통…….”
단이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보선 어멈의 손에 든 대나무 통을 바라보았다.
모양과 크기는 물론이고 뚜껑에 음각된 문양까지, 엄마가 남기고 가셨다던 그 통과 꼭 같은 것이었다.
설마 내 것을 주파 할아버지가 가져가셨나?
아주 잠깐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쳤으나, 충선은 분명 보선 어멈에게 이 통을 ‘빌렸다’고 하였다.
그 말인즉, 통의 주인은 엄연히 보선 어멈이란 뜻이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억누른 단이는 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보선 어멈에게 물었다.
“이걸…… 어찌 보선 아주머니께서 갖고 계신 것이어요?”
“이 통 말이냐?”
보선 어멈이 통을 들어 보이더니 무의식중에 힐긋 결을 보았다.
어째 통을 본 결의 낯빛 역시 단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 통을 건넨 충선조차 의미심장한 눈으로 저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홀로 영문을 알지 못하는 보선 어멈은 괜스레 통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본디 주인마님…… 그러니까, 도련님의 어머니께서 주신 것이다.”
“나리의…… 어머니요?”
무언가 둔탁한 것이 머리를 세게 치고 간 듯하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들이 밀려와 도리어 머릿속에 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뒤죽박죽이 된 단이의 표정을 본 충선이 반쯤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육시랄……. 나도 드디어 갈 때가 됐나 보군. 쓸데없이 괜한 오지랖에 함부로 주둥이나 놀리고.”
무어라 욕지거리를 내뱉은 충선이 도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단이의 앞에 서서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난리 통에 잃어버렸느냐, 아니면 예까지 갖고 왔느냐?”
무엇이라 정확하게 말하진 않았지만 단이는 그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대나무 통은 나리와 비밀로 하기로 했는데…….’
대나무 통을 가져와도 될까.
결을 바라보니 그는 한참을 고심하던 끝에 단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단이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하여 장 안에 넣어 두었던 대나무 통을 꺼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에 든 종이는 장에 깊숙이 넣어 두고, 통만 가지고서 다시 결의 방으로 돌아왔다.
단이의 손에 들린 대나무 통에 가장 놀란 것은 역시나 보선 어멈이었다.
“네가, 네가 그것을 어찌 갖고 있느냐?”
“저희 어머니께서 남기고 가셨다던 물건이어요.”
“너희 어머니가? 그걸 대체 어찌…….”
보선 어멈이 말을 맺지 못하고 순간 입을 다물었다.
설마, 하는 두 글자가 그녀의 낯빛 위에 스쳤다.
답을 알고 있는 이는 하나뿐이라.
떨리던 눈동자가 이내 충선에게로 향했다.
죄 몰린 눈들이 성가셨던 충선은 어김없이 욕을 뇌까리며 털퍼덕 자리에 주저앉았다.
세 치 혀는 저 혼자 놀아났고, 이미 쏟아버린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이 상황이 못마땅하여도 별수 있나.
‘이게 거지 같은 내 팔자인 게지.’
길게 콧숨을 내쉰 충선이 한층 누그러진 눈빛으로 그들을 차례로 보았다.
“나도 아는 건 많지 않다. 내가 아는 게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워낙 오래된 일이라 이 늙어빠진 머리가 잊어먹은 게 있을 수도 있고.”
마지막으로 단이에게 가닿은 눈동자가 여러 복잡한 감정으로 혼탁해졌다.
저 작은 아이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 말도 안 되는 인연에 대한 원망.
그리고 먼저 떠난 벗에 대한 울화와 그리움.
그 모든 것이 한데 뭉쳐 주름진 눈가를 허물어지게 만들었다.
눈꺼풀 아래로 그 모든 것을 밀어낸 충선이 다시금 형형하게 눈빛을 다듬으며 단이에게 물었다.
“그래도, 듣고 싶으냐.”
단이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 어미에 대한 이야기니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
저 아이도, 진실은 알아야 할 테고.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눈이 아주 많이 오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충선은 가만가만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가며 이야기를 꺼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