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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67화 (67/100)

67화

“선정 옹주께옵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옵니다.”

준백은 마치 안타깝다는 것처럼 낯빛을 꾸미면서도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옹주께서 서결 장군을 마음에 두어 밤낮으로 시름에 젖으시니, 그 애틋한 마음이 궐문을 넘어 달빛 아래 족적을 남긴다는 소문이 파다하옵니다.”

그 말에 이선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소문의 뜻인즉, 선정이 밤마다 몰래 궐담을 넘어 서결과 밀회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왕실을 모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한 이선이 어성을 높이고 말았다.

“경이 지금 감히 내 앞에서 근거도 없는 소문으로 나와 옹주를 능멸하려 하는 것이오?!”

“고정하시옵소서, 전하.”

이선의 호통에도 준백은 미동 하나 없었다.

오히려 독사의 그것과 같은 눈으로 느긋하게 이선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서결 장군에게도 마땅한 보상과 예우를 베풀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사옵니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렇듯 사대부들의 뜻이 강건하온데…….”

준백은 서서히 임금을 몰아붙이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갔다.

“저희들 없이, 전하께서 이 조선을 어찌 이끌어나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영상!”

“부디 소신들의 충심을 헤아려주시옵소서.”

선을 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 준백에 이선이 용상을 꽉 부여잡았다.

심하게 동요하는 이선의 반응을 보며 준백은 이미 승기가 자신의 쪽으로 넘어왔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종묘사직이 왕실과 사대부의 몫이라고는 하나, 왕실의 일원인 외명부에서 중심이 서지 않으면 어찌 그 안위가 온전하다 하겠사옵니까.”

준백이 허리를 깊이 숙여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옹주 아기씨께서도 나이가 차면 지아비를 얻으시어 출가를 하고 나라에 근심이 없도록 성심으로 도우심이 마땅하온데, 그 뜻이 이토록 굳건하시니.”

힘없는 왕을 주무르기란 이토록 쉬운 일이니.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누가 감히…… 내 뜻을 거스를까.

준백의 입술이 사특한 뜻을 품고 길게 늘어졌다.

***

향오문 앞을 지나던 선정이 잠시 걸음을 멈추어 두려움 어린 눈으로 앞을 보았다.

한밤중에 아바마마께서 자신을 부를 일이라곤 차밖에 없었다.

하나 오늘만큼은 비단 차 때문만으로 부르신 것이 아님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영상이…… 결국 말을 꺼내었구나.’그 상황을 직접 보고 듣진 못하였지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엄청난 파란이 일었을 것이란 걸.

분명 아바마마께서도 진노하셨으리라.

“옹주 아기씨, 걸음을 지체하지 마시옵소서.”

앞서가던 상선이 멈춰 선 선정에게 나긋이 말하였다.

“가세.”

선정은 몰래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침전의 문이 열리자, 선정은 잔뜩 혼이 날 것을 각오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선정의 자리에 차제구가 놓여 있었으나 물은 보이지 않았다.

차는 역시나 핑계에 불과하단 뜻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자리에 앉은 선정은 고개를 푹 숙이고서 이선의 꾸중을 기다렸다.

그런데 당장 호통이 떨어질 거란 예상과 달리 이선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무거운 침묵만이 선정의 어깨를 짓누를 뿐이었다.

이대로 피를 말리실 성심이신가.

더 이상 침묵을 견디지 못한 선정이 먼저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려던 그때였다.

“그자가, 그리도 탐이 나더냐.”

이선의 한마디에 선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하여서, 이 아비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을 영상에게 말했던 것이냐.”

고개를 드니 잔뜩 흐려진 이선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대신들의 압박에 시달려 고단해진 눈가가 선정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마냥 철없는 마음에 저지른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아바마마를 저리 힘들게 만든 원인이 자신이란 생각에 선정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을까.

남준백이 서결을 해하지 않는 조건으로 자신을 이 일에 끼어들게 하였노라고.

도저히 이 방법 외에는 서결을 구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그리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그를 연모하노라고.

그가, 너무도 갖고 싶었노라고.

“송구하옵니다, 아바마마…….”

하나 선정은 그 어떤 것도 쉬이 말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다.

준백의 꾀에 넘어갔다고만 하기에는 그녀의 의지가 영 없던 것도 아니었기에.

이선의 말대로, 결이 탐이 나 준백의 손을 잡은 것 또한 명백히 사실이었기에.

차라리 처음부터 아바마마께 말씀을 드렸다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외면하고 욕심을 따른 것 역시 그녀의 죄라면 죄였다.

“하아…….”

제 앞에 엎드린 선정을 보며 이선은 낮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영특하던 선정이 어찌하다 이런 일에 휘말렸는가.

‘영상……. 도대체 그자에게 몇 명이나 놀아나고 있는 것인가.’그러잖아도 서현왕후 역시 근래에 들어 선정 옹주의 부마 간택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느냐며 은근히 말을 꺼내왔었다.

그때만 해도 그저 혼기 지난 옹주의 앞날을 걱정하는가 싶었거늘.

지금 생각해 보니 국구(國舅)에게 무슨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필시 영상이 꾸민 일이렷다.’하나 선정마저 이리 인정해버린 지금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제는 단순히 대신들의 상서를 물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선정에게까지 화가 미칠지도 모를 상황.

이선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들끓는 분을 삭였다.

복잡하게 엉킨 생각들을 억지로 끊어낸 이선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서결 장군은 이미 오래전에 관직에 올라 오랜 세월 조선의 국경을 수호하기 위해 일해 온 자다. 또한 그의 가족은 억울한 일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하였고, 조정의 대신들은 호시탐탐 그의 등 뒤만 노리고 있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죽음길에 오른다는 뜻이다.”

“…….”

“그런데도, 그자를 갖고 싶으냐.”

선정은 울먹이는 눈을 바닥에 두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였다.

다 아는 이야기였다.

결은 결코 부마 간택에 오를 수 없는 이라는 것도, 그런 그를 부마에 올렸다간 왕실이 조롱거리가 될 거란 것도.

자신 또한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고 싶었습니다.”

선정은 눈물로 이선에게 읍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자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

“지킬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 감히 소녀가 그의 날개를 꺾으려 하였나이다.”

하니 멈추게 하실 거라면 지금이라도 멈추게 하여 주시옵고, 지킬 방도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를 지켜주시옵소서.

소녀의 손으로 그자를 가두게 하지 마시옵소서.

“소녀도…… 괴롭사옵니다.”

후드득. 방울져 떨어진 눈물들이 선정의 손등을 적셨다.

그 눈물을 바라보는 이선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둡게 변하였다.

길게 한숨을 내쉰 이선은 안타까움이 가득 어린 눈빛으로 선정을 바라보았다.

아비 된 자로서 어찌 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까.

이선 역시 처음엔 부마 간택을 윤허해야 하나 깊이 고민하였더랬다.

목숨보다 자신의 다비를 선택하겠다던 서결의 옥중 고백도 외면하고, 흉계를 품었을지도 모를 준백도 외면하고, 그렇게 딸의 소원을 이루어주고만 싶었다.

그런 이선의 마음을 돌린 것은 바로 서결이었다.

세상이 모두 잠든 새벽, 자신을 찾아왔던 그 때문에.

‘소장은 이미 생을 내건 여인이 있사옵니다.’

‘……그저, 옆에만 있어주는 것도 아니 되느냐.’

‘어찌 옹주 아기씨께 저라는 불행을 내리시려 하십니까.’

‘…….’

‘제 삶의 이유는 오직 그 아이게 있으니, 그 아이만이 저를 살아 있게 할 뿐입니다.’

‘하면, 내가 어찌해야 좋겠는가.’

‘전하께옵서 옹주 아기씨의 마음을 돌려주시옵소서. 소장이 직접 나선다면 빠르게 일단락될 것이나, 행여 옹주 아기씨께서 세간의 웃음을 사실까 저어되는 까닭이옵니다.’

짧은 대화였으나 이선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자신의 딸이 들어갈 틈은 조금도 없음을.

강제로 그 틈을 벌려 보았자 자신의 딸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한평생 그 뒷모습만 바라보며 비구니만 못한 생을 살게 될 것이리라.

그리 불행해질 바에야, 차라리 그 마음을 끊게 하는 것이 나았다.

그 역시…… 이 아이에겐 지독히도 잔인한 일이 되겠지만.

“나는 내 딸이 지아비의 굄을 가득 받으며 한평생 행복하기를 바란다.”

“……아바마마.”

“누구보다 내 딸을 아끼고 마음 깊이 품어줄 이에게 너를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

“하지만 그자는 너에게 아니다.”

선정의 눈동자가 잘게 떨려왔다.

마지막 남은 미련의 끈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혹 법도가 문제라면, 아바마마께서 이번 한 번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소녀가…… 그리도 못났단 말입니까? 장군의 마음에 들 수조차 없을 만큼 소녀가 부족한 까닭이옵니까?”

“너의 탓 또한 아니다, 선정아.”

설움에 북받친 선정이 입술을 꾹 맞다물었다.

딸아이의 애처로운 흐느낌에 이선은 마음이 잠시 흔들렸다.

하나 그는 끝끝내 옹주의 마음을 접게 할 수밖에 없었다.

강제로 돌리려 하기엔, 이미 서결의 마음이 너무도 굳건하기에.

“그자의 시선이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음을 어찌 모르느냐.”

“…….”

“마주 볼 수 없는 자를 바라보지 말거라, 선정아. 너만 힘들어질 뿐이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가 아닌, 아버지로서 전하는 진심이었다.

딸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아버지로서.

이선은 다시 아비가 아닌 임금으로 돌아와 선정에게 하명하였다.

“이만 물러가거라. 오늘 네게 들었던 말은 모두 잊도록 할 테니.”

“아바마마…….”

“또한 일을 여기까지 벌려 놓은 것은 너의 책임이니, 그 책임을 조만간 단단히 지게 할 것이다.”

그 말에 선정의 눈동자가 크게 떨려왔다.

다른 형제들에겐 엄한 아버지였을지언정 선정에게만큼은 언제나 자애롭고 다정한 아버지였다.

이선이 선정의 어머니인 귀인 양 씨를 가장 총애하기도 하거니와, 선정이 형제들 중 유난히 총명하고 어진 성품인 까닭이었다.

그런 선정을 이선이 처음으로 엄히 다스리겠다 하니, 선정도 놀랄 수밖에.

당황한 선정에게 이선이 그녀의 마음을 다잡을 말을 던졌다.

“네가 무슨 마음으로 처음 이 일에 뛰어들었는지, 그 이유를 잊지 말거라.”

이 일에 뛰어들었던 이유.

결을 지키겠다는 마음.

그를 갖고 싶었던 마음.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마음 중 하나를 억지로 뜯어 버려야 하는 선정은 가슴이 무너질 듯 아파졌다.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던 선정이 바닥에 깊이 몸을 숙여 절하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아바마마.”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설움에 눈물은 밤이 늦도록 침전의 바닥을 적셨다.

***

그러나 선정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은 생각보다 더 복잡해지고 말았다.

“옹주 아기씨, 참으로 이제 혼례를 올리시는 것이어요?”

“뭐……?”

멍하니 찻상이 준비되는 것을 지켜보던 선정이 그 말에 미간을 좁혔다.

처음 말을 꺼낸 궁녀는 잔뜩 들떠서 말을 이었다.

“저도 우연히 들은 것이어요. 곧 금혼령이 떨어질 거라고 하던데!”

선정은 순간 둔탁한 것으로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바마마께서 분명 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허하지 않으시겠노라 하시었거늘.

어찌 저런 이야기가 도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선정은 눈앞이 어질해지는 것을 느끼며 궁녀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궁녀가 곧장 답하지 않으니, 선정이 결국 언성을 높였다.

“무슨 소리냐 물었다!”

궁녀가 잔뜩 겁을 먹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다른 궁녀들은 공연히 입을 함부로 놀린 그녀를 노려보며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천 상궁이 있었다면 당장 상황을 수습하고 아이들을 물렸겠으나, 안타깝게도 중재를 해줄 사람이 자리를 비운 터라.

처음 말을 꺼냈던 궁녀는 눈치도 없이 울먹이며 곧이곧대로 옹주의 물음에 답하였다.

“그것이, 정난이가 어제 지나가다가 대감들께서 하시는 말씀을 우연히 들었다는데……. 곧 부마 간택령이 내려질 것이라 사대부가에서 동자봉단을 올릴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온데…….”

“하온데?”

“이미 부마로는, 서결 장군이 내정되어 계시다고…….”

쨍그랑!

그때였다.

난데없이 들린 파열음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그곳엔 천 상궁과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단이가 있었다.

물건을 떨어트린 건 단이였는지, 그녀의 발 앞에 비단보에 싸인 무언가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 소, 송구하옵니다.”

낯빛이 하얗게 질려 황망해하던 단이가 얼른 몸을 숙여 물건을 들어 올렸다.

“아…….”

안에 유리 같은 것이 깨졌는지, 단이의 손끝에서 금세 붉은빛이 번져나갔다.

놀란 선정이 궁녀에게 일러 얼른 치료할 것을 가져오라 일렀다.

그러곤 한달음에 단이에게 다가가 손을 살폈다.

“어디 보자. 많이 다치었느냐?”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옹주 아기씨.”

“괜찮기는. 이리 피가 나는 것을. 대체 무엇에 다친 것이냐?”

“그게, 지난번 주신 차와 다과가 감사하여 소소하게 답례라도 하고자 챙겨온 것인데…… 이리 망가져 버려서…….”

단이는 그릇이 깨지는 바람에 볼품없이 축 늘어진 보따리가 부끄러워 슬그머니 뒤로 감추었다.

선정과 함께 먹을 생각에 간밤에 잠까지 미루며 만든 다식이건만.

깨진 유리 때문에 맛도 보여드리지 못하고 죄 버리게 생겼다.

“천 상궁, 단이가 또 다칠 수도 있으니 얼른 치워주게.”

“예, 옹주 아기씨.”

천 상궁이 재빨리 단이의 손에서 보따리를 가져가 다른 궁녀에게 전하였다.

단이는 궁녀와 함께 멀어지는 보따리를 보며 눈빛을 흐렸다.

선정 옹주의 선물에 감히 비교도 안 될 만큼 초라한 자신의 선물.

그마저도 깨어져 엉망이 된 비단 보따리가 꼭 자신의 처지와 닮아 보였다.

‘서결 나리께서…… 옹주 아기씨와 혼례를…….’

주제도 모르고 결과 행복한 미래를 그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어리석고도 아둔한 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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