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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68화 (68/100)

68화

찻잔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차츰 옅어졌다.

하나 옅어진 연기만큼 어색함은 짙어져, 단이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찻잔에만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차마 선정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조금 전 들은 이야기로 가득 찬 탓이었다.

‘부마라면 분명 임금님의 사위를 뜻하는 말일 텐데……. 옹주 아기씨께서 어째서 서결 나리와…….’

순간 찻잔을 쥔 단이의 손이 잘게 떨려왔다.

일전에 결을 바라보던 선정의 눈빛이 다시금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저 기우이기만을 바랐는데. 괜한 걱정이기만을 바랐는데.

전부 헛된 소망이었나 보다.

감히, 욕심을 내어선 안 될.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욱신거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상대가 옹주라니.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선정 옹주 아기씨라니.

‘이건……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내가 진 거잖아.’

맞서고 싶어도 그럴 자격조차 없었지만, 무엇보다 상대가 선정이라면 도저히 미워할 수도 없었다.

이미 단이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벗이 되었기에.

조선에서 결 다음으로 그녀를 아끼고 챙겨주던 이였기에.

그런 사람을,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단이는 울컥거리는 감정을 억누르려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단이야.”

그때, 내내 침묵만 지키던 선정이 조심스럽게 단이를 불렀다.

움찔하던 손끝을 말아 쥔 단이가 고개를 들어 선정을 보았다.

선정 역시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단이 못지않게 흐려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단이가 아까의 말을 들은 것을 크게 신경 쓰는 것처럼.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 상처가 많이 아픈 것이냐?”

동시에 일부러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것처럼.

아마 외면하고픈 진실은 단이의 마음이리라.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본 단이는 선정이 손수 무명천으로 돌돌 감싸준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이 정도는…… 아프지 않습니다.”

기실 가슴속이 아려 살갗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터라.

단이는 도로 고개를 숙였다.

어찌해야 좋을까.

감히 천한 계집종 따위가 웃전의 혼례에, 그것도 옹주의 혼례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얹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모른 척,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인연을 보내야 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까 항아님께서 하셨던 말씀…….”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사실이어요?”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는 가슴만 모를 뿐이었다.

하여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입술이 먼저 진실을 물었다.

“정말…… 옹주 아기씨께서 저희 나리와 혼례를 올리시는 것이어요?”

감히 하여선 안 될 말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눈시울까지 붉히고서.

그 모습에 선정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 당황뿐이겠는가.

마음 깊이 아끼던 차벗이 이리 서러움 가득한 얼굴로 정녕 혼례가 사실이냐 묻는 것이 속상하고 원망스럽기도 한 것을.

하여 선정은 쉬이 아니다 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단이를 보기만 하였다.

처음엔 어찌할 바를 몰라서였고, 그다음은 심술이었고.

마지막은 의지와 상관없이 마주해버린 진실 때문이었다.

‘그자의 시선이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음을 어찌 모르느냐.’

‘마주 볼 수 없는 자를 바라보지 말거라, 선정아. 너만 힘들어질 뿐이다.’

사실 영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구중궁궐에 갇혀 사는 옹주라지만, 그녀에게도 바깥소식을 대신 듣는 귀가 있었고 전해주는 입이 있었다.

그러니 어찌 모를까.

결과 단이 사이에 떠도는 풍문들을.

결이 사람들 앞에서 단이에게 보여준 모습들을.

처음 단이에게 결의 춘풍 꽃물 이야기를 전한 것도 선정이었으니.

그것을 다 알고도 아닐 거라 애써 외면하며 마음을 키워온 것 또한 준백의 손을 잡은 것만큼이나 잘못이었다.

‘서결 장군의 시선이 향한 곳…….’

그리고 그에게 향한, 자신의 것이 아닌 또 다른 시선.

이미 맞닿아 깊게 얽혀버린 그 시선의 끝을, 선정은 마주한 단이의 말간 눈동자 속에서 그만 보고 말았다.

“송구하옵니다, 옹주 아기씨. 제가 그만 실언을…….”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깨달은 단이가 얼른 고개를 숙여 사죄를 하였다.

그런 단이를 보며 선정은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한없이 허탈한 마음에서 나온 미소였다.

자신의 연심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이 아이가 미워야 하건만.

‘너를…… 미워하고 싶지가 않구나.’

오히려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분명 서결을 향한 마음이 그리 얕지 않거늘.

매일같이 그를 그리다 애달픈 마음으로 잠에 들고,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우연에 빌어서라도 볼 수 있을까 헛된 희망을 품었거늘.

먼발치에서라도 그를 본 날이면 종일 구름을 걷듯 몸이 가볍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거늘.

그런, 평생에 다시없을 애틋한 연심이었거늘.

“단이야.”

“……예, 옹주 아기씨.”

선정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감돌았다.

보는 사람의 마음이 다 먹먹해질 만큼.

“나는 아무래도, 네가 더 소중한가 보다.”

“예……?”

그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진정한 벗 하나 없이 외로이 지내던 나와 함께 차를 마셔주는 네가 그토록 소중한 까닭이리라.

‘억지로 연을 엮는다 한들 장군 역시 나를 봐주지 않겠지만…….’

쓴침을 삼킨 선정이 식어버린 단이의 차를 붓고서 새로이 따듯한 차를 채워 주었다.

“네 실언을 눈감아주겠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아까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저 조금이나마 더 이 거짓된 희망을 붙들어보고 싶어서.

한 번쯤 못된 욕심을 부려보고 싶어서.

“대신 아까 들은 그 말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함부로 떠들어선 아니 될 말이니.”

어차피, 머지않아 깨어져 버릴 욕심일 테니까.

“자, 어서 남은 차를 즐기자꾸나, 단이야.”

“…….”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잖으냐.”

선정은 그렇게나마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보았다.

이 가련하고도 어여쁜 차벗을 위하여 곧 버려질 제 마음을.

***

하나 선정의 그 유치한 욕심이 단이에겐 넘을 수 없는 태산과도 같았으니.

소다옥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단이는 내내 시름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옹주 아기씨께서 별달리 아니란 말씀을 안 하셨으니, 정말로 혼례를 올리시는 거겠지…….”

어색하게 말을 돌리던 선정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쩌면 선정 역시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리 미안한 눈빛을 보였던 것이리라.

그리 생각하니 괜스레 더 서러워졌다.

“나리께서 부마가 되신다면…… 나는 어찌 되는 것이지?”

나리의 다비니 나도 함께 가게 되는 것일까?

그럼 나는 나리와 옹주 아기씨께서 부부로서 살아가는 모습을 평생 지켜보아야 하는 걸까?

내가 아닌 다른 여인과 나란히 걸으시고, 내가 아닌 다른 여인과 손을 잡으시고, 내가 아닌 다른 여인과 한 방에 드는 나리의 모습을 모두…….

“흑, 그런 게 어디 있어…….”

단이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야 겨우 나리의 마음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야 겨우 나리께 내 마음을 전하였는데.

마치 헛된 욕심을 부렸다고 비웃는 양 결을 포기하게 만드는 상황이 단이는 원망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나리께 내 마음을 고백할 것을.

품은 정을 차마 나리께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간직하게 생겼으니, 남은 것이 곪기라도 하는 양 더욱 마음이 아팠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벌써 이리저리 상상하며 눈물을 흘리던 그때.

“어이, 장군께서 잠시 일이 있으셔서 조금 늦으신다고…….”

벌컥, 허락도 없이 소다옥 문을 열고 들어온 진위는 난데없이 눈물바람이 난 단이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슨 일이냐. 누가 또 네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린 것이냐?!”

일전에 군사들이 찾아와 으르던 것을 생각한 진위가 버럭 화부터 내었다.

놀란 단이는 허겁지겁 눈물을 지우고선 눈을 도르르 굴렸다.

“아니요. 저, 그러니까 그게…….”

이를 어쩌나. 옹주 아기씨께선 분명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이르셨거늘.

이대로 두었다간 진위가 밖으로 나가 아무 군사나 붙잡고 멱살을 뒤흔들 기세라.

단이는 급한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 아까 옹주 아기씨께서 보여주셨던 책이 너무 슬퍼서요……!”

“……뭐?”

“내용이 너무 슬퍼서, 계속 곱씹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부끄러움에 얼굴이 홧홧해진 단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진위가 못 믿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니, 단이 또한 참말이라는 듯 순진한 표정을 꾸며대었다.

“주인공이 너무 안 되어서…….”

울먹이며 한 번 더 말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 참. 울 일도 없다.”

단이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진위가 이내 다반 위에 놓여 있던 무명천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곤 천을 던지듯 단이에게 건넸다.

“닦아라. 흉하다.”

“……감사합니다, 진위 나리.”

단이는 진위가 건넨 천을 주섬주섬 집어 들어 눈가를 닦았다.

퉁퉁 부은 눈가가 벌써 화끈하게 느껴졌다.

그런 단이가 걱정이 되었던 건지, 진위는 힐긋 그녀를 보며 답지 않게 말을 건넸다.

“대체 책 내용이 어떻기에 그리 펑펑 울었던 거냐? 뭐 나라라도 잃은 이야기인 거냐?”

“그런 건 아니옵고…….”

단이는 아직도 물기가 아른거리는 눈을 깜빡였다.

급하게 내용을 꾸미려다 보니 조금 전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곧 책의 내용이 되었다.

“양반 나리와 계집종이 서로 연모하는 사이인데, 사내가 갑자기 부마가 되어 여인을 떠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허! 한낱 애정 소설 따위를 읽고 그리 초상 치르듯이 운 거냐?”

“저는 슬펐단 말이어요.”

아랫입술을 삐죽 빼물며 다시금 울먹이는 단이에 진위가 끙, 이마를 짚었다.

하여간 계집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그는 제 딴엔 단이의 마음에 공감이라도 해줄 양으로 말을 덧붙였다.

“뭐…… 작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퍽 고약한 인물이긴 하구나. 부마라면 첩도 두지 못할 텐데.”

“예? 첩도 두지 못한다고요?”

아주 짧은 순간, 결과 혼례를 올릴 수 없다면 비첩이라도 될 순 없을까 생각하던 단이라.

유일하게 기대던 희망마저 사라지니 눈앞이 더욱 캄캄해졌다.

“정말 부마가 되면 첩도 따로 두지 못하는 것이어요?”

“그렇긴 한데……. 이봐, 야! 왜 또 우는 거야? 소설이잖아, 소설!”

“소설…… 소설이긴 한데……. 아니, 소설이었으면 좋겠는데에…… 흐윽.”

결국 참지 못하고 서럽게 눈물을 터트리는 단이에 진위가 한껏 당황하던 찰나.

“어이, 다동. 뭔 소리가 이리 요란하게…….”

때마침 또 한 번 열리는 문 너머로 결과 성조가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진위와 서럽게 울고 있는 단이의 모습이니.

“……지금 뭐 하는 것이냐.”

한순간 공간을 얼려버릴 듯 서늘해진 결의 눈빛과 당장이라도 매타작을 벌일 듯 험악해진 성조의 얼굴에 진위가 파랗게 굳은 얼굴로 두 손을 저었다.

“저 아닙니다.”

“…….”

“저 정말로 아닙니다!”

“나와.”

결의 차가운 명령에 상처를 받은 진위가 되레 억울하다는 듯 단이와 꼭 같은 표정이 되었다.

단이 역시 진정도 하지 못한 채 진위의 앞을 팔로 막았다.

“저 정말 아니란 말입니다…….”

“진위 나리 때문에 그런 것 아니어요…….”

우락부락한 팔척장신의 진위와 그의 절반이나 될까 말까 한 단이가 동시에 울먹이는 꼴이란.

“…….”

영문을 알지 못하는 결과 성조는 이 어이없는 광경에 잠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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