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러니까, 옹주 아기씨와 함께 본 소설 내용이 서글퍼서 그리 눈물을 흘렸다?”
코를 훌쩍인 단이가 성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성조 역시 진위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단이를 보았다.
하나 속에 품은 생각만큼은 달랐으니.
‘벌써 부마 간택에 대한 이야기가 나도는 모양이군.’
선정을 만나고 온 뒤에 저리 상심한 얼굴이니, 자연 그리 생각할 수밖에.
사실 이번 일은 아는 신료가 거의 없을 만큼 극비에 부쳐진 상황이었다.
대신들조차 이것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논의인지 알고 있으나, 차마 준백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음이라.
체면을 생각하여 누구도 이 일을 쉬이 퍼트릴 수 없던 까닭이었다.
하나 조정에서의 논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결국 모두가 알게 될 일.
그 이야기가 옹주궁에서 먼저 새어 나왔다는 것은, 이 일에 선정이 어느 정도 개입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 걸 알고 있는데도…… 결은 아무 내색도 하지 말라 하니.’
사실 오늘 훈련원을 찾은 것도 서결이 부마로 내정되었단 말도 안 되는 소문 때문이었다.
이미 관직에 오른 데다 감히 동자봉단조차 올리지 못할 자를 부마로 만들 것이란 기함할 내용이라.
뭐라도 대책을 세워야 할 성싶어 한달음에 온 길이었다.
한데 결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간택령은 내려지지 않을 것이다.’
‘자네……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옹주 아기씨께서 직접 그 뜻을 물리실 것이다.’
이미 결이 한발 앞서 이선에게 찾아간 일을 알지 못하니, 결의 뜻도 이해할 수 없을 수밖에.
그 가운데 듣게 된 단이 어머니의 정체와 선대부인, 즉 숙부인 민 씨의 대나무 통 문양에 대한 이야기 역시 속을 어지럽히긴 마찬가지였다.
하여 성조는 그저 결의 뜻대로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한데 있지도 않은 작자를 어찌 그리 원망스럽게 노려볼까.’
성조는 단이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엔 어김없이 차를 마시고 있는 결이 있었다.
평소처럼 차를 마신 결의 반응을 살피는가 여기기엔 그 눈빛이 한없이 서러웠다.
보는 이의 가슴이 다 미어질 만큼.
원망 같기도 하고, 애통함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포기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아까 읽었다던 그 거짓 소설의 사내가 마치 결인 것처럼.
그 아릿한 빛에 성조의 가슴까지 체한 듯 답답해졌다.
‘그런 눈, 적어도 내 앞에서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럼 내가, 자꾸만 너를 빼앗고 싶어지잖으냐.
성조는 입안에 쓰게 고이는 단어들을 애써 목뒤로 삼켰다.
마음 같아선 차라리 속 시원히 다 얘기하라며 결에게 화라도 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나 왕실의 체면을 위하여 함구하겠다는 임금과의 약속을 결이 어길 리 없으니, 이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옆에서 다향이나 얻어 맡을 요량으로 왔건만.
차도 마시지 않았는데 입안이 떫고 씁쓸해졌다.
단이에게서 눈을 떼기도, 그렇다고 그 애달픈 눈빛을 계속 보고 있기도 어려웠다.
하여 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욕심처럼 단이의 눈을 가려 버렸다.
“어이 다동, 누가 보면 서결이 너를 울린 줄 알겠다.”
무슨 뜻이냐 시선을 들어 보이는 결에게는 시침을 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곤 장난치듯 아이의 얼굴을 쓸어내리니.
“아……! 아픕니다, 성조 나리!”
그제야 평소의 뾰로통한 얼굴을 보이며 저를 흘겨보는 단이였다.
이제야 온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라.
만족한 성조가 싱긋 웃으며 새 잔을 꺼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울상은 그만 짓고 남은 차 있으면 나도 한 잔 따라 주거라. 내 요즘 속이 허하여 오늘은 좀 참으려 했다만, 향만 맡고 있자니 머리가 어질할 정도구나.”
“정말, 나리께서는 저를 하루라도 괴롭히시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으시나 봅니다.”
“돋고말고. 이리 즐거운 것을.”
단이는 입술을 삐죽 내물며 알아서 따라 드시라, 퉁명스럽게 차부를 내밀었다.
남은 심란해 죽겠는데.
속도 모르고 이리 희롱을 하시니 절로 입술이 삐죽거렸다.
정작 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고 말이다.
‘어쩌면…… 이리 마주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옹주와 혼례를 올리면 첩도 안 된다 하였으니, 몸종도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이 마음을 조금씩 정리해야 했다.
그리 생각하니 이 순간들이 더없이 아득하고 아까운지라.
단이는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그저 홀로 애태울 수밖에 없었다.
***
원래도 어미 닭 쫓는 병아리인 양 결만 쫓던 눈길이 오늘따라 더욱 떨어질 줄을 모르니.
깊은 밤, 해초시 마지막 차를 우리던 단이가 애처로이 바라보는 눈동자에 결이 그녀와 눈을 맞춰 왔다.
마치 속을 헤아리려는 듯 지그시 들여다보는 눈동자.
그제야 뒤늦게 눈길을 돌린 단이가 모른 척 차관에 물을 따랐다.
그런 단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결은 결국 화두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말해줄 때도 된 것 같은데.”
“무엇을…… 말이어요?”
결은 대답 대신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 시선이 어쩐지 제 속까지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 단이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향하였다.
결은 정수리만 내보이는 단이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어찌 종일 그리 떠날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애써 걸어 잠그고 있던 마음속 빗장을 건드렸다.
울컥 치솟는 감정을 억누른 단이가 빈 차관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입안에 맴도는 말을 고르고 골라 겨우 입 밖으로 내었다.
“그냥…… 언젠가는 나리와 제게도 끝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순간 결의 미간이 어긋났다.
한창 서로를 갈망하여도 모자랄 때에 끝이라니.
감히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단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에 결은 발밑이 사라지듯 아찔한 감각마저 들었다.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은 역시나 선정 옹주라.
결은 단이를 다그치는 대신 달래듯 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느냐. 내가 다시 전쟁터에 나가기라도 할까 봐 그러느냐.”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니면.”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단이의 가슴을 묵직이 눌렀다.
“조정에서 나를 부마로 만들 것이란 소문 때문이냐.”
단이가 놀란 눈으로 결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두 눈을 흐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수긍의 뜻이었다.
“……말이란 게 어찌 이리 무서운지.”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는 단이를 보며 결이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톡톡, 손끝으로 다탁을 두드려 그녀의 시선을 이끌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갯짓을 하는 모양은 제게 가까이 오라는 뜻이라.
단이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앙금앙금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래도 훌쩍이는 소리와 아른거리는 눈물이 멎지 않으니.
둘 사이에 남은 거리와 울음을 삭이는 단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결이 그녀의 팔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
한순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단이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그대로 결의 무릎 위에 안착하였다.
놀란 단이가 결의 팔을 꾹 잡고 밀었지만, 겨우 그 정도 힘으로 결이 밀릴 리 없었다.
“나리……! 누가 갑자기 오시면 어떡해요.”
“내 허락 없이 누가 들어온다고.”
결은 단이를 내려주는 대신 그녀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었다.
꼭 맞춘 듯 품에 안긴 작은 몸이 꼬물거리며 한껏 얼굴을 붉혔다.
“울어도 좋다.”
“…….”
“대신 내 품에서만 울거라.”
내가 이리 눈물을 닦아줄 수 있게.
결은 단이의 눈가에 이슬처럼 방울진 눈물을 훔쳐 주었다.
“하나 네가 지금 우는 이유가 선정 옹주 때문이라면, 울지 말거라. 네가 걱정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세차게 두근거리는 가슴과는 별개로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뜨겁게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여 단이는 억지로 눈물을 삼키지 않고 그저 흐르는 대로 두었다.
눈가에서 도르륵 떨어져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것은 턱에 맺히기도 전에 결의 손끝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비단…… 옹주 아기씨 때문만은 아니어요.”
그 커다란 손에 얼굴을 기댄 단이가 울먹이는 입술을 열었다.
“옹주 아기씨가 아니더라도, 저는 나리의 여인이 되지 못할 것이어요.”
“어찌하여?”
“저는 나리와 달리 비천한 몸종이니까요.”
순간 가슴속에 커다란 바위가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은 처음으로 얼굴빛을 굳혔다.
‘또 누가 함부로 이 아이 앞에서 입을 놀렸는가.’제일 먼저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일전에 단이를 둘러싼 헛소문이 돌 때에도 몇 군사들이 겁 없이 입에도 담지 못할 말을 하지 않았던가.
혹 옹주의 궁녀들이나 뭣도 모르는 이들이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려 단이의 마음에 상처를 낸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결은 들끓는 화를 조용히 누르며 단이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누가 그리 말하더냐. 네가 나와 달리 비천하다고.”
“아무도……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면 너 혼자 그리 생각했다는 것이냐.”
무언가를 말하려던 입술이 잠시 달싹이다 일자로 다물어졌다.
고민하듯 커다란 눈을 깜빡이던 단이가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리께선…… 저 같은 몸종 아이 말고, 더 높으신 분과 연을 이루셔야 하니까요.”
“뭐?”
“그때가 되면, 저는 나리의 곁을 떠나야만 하겠지요.”
소다옥에서 그토록 눈물을 쏟았던 것이 이 때문이었는가.
옹주와 혼례를 올리지 않겠다 하는데도 이미 속으로 포기를 준비하고 있으니.
결로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라도 힘을 풀면 이것이 마지막이라며 제 곁을 떠날 것 같더라.
하여 작은 몸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나와 연을 이룰 이는 내가 정하는 것이거늘, 누가 감히 나의 연을 정한다는 말이냐.”
“나리께서는 양반이시고, 저는 여진인으로나 조선인으로나 천한 출신이온데…….”
“그만.”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어 결은 단이의 말허리를 단호히 잘라버렸다.
자신이 연모하는 이가 고작 출신 따위로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듣기 싫었다.
“너는 내게 그 누구보다도 귀한 여인이다.”
“나리께서 그리 보신다 한들, 제 피는 바뀌지 않습니다.”
“바꿀 것이다. 내가 전부 바꿔줄 것이다.”
어깨를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여린 살갗이 커다란 손에 우악스럽게 눌렸지만 그는 잡은 어깨를 놓지 않았다.
안은 몸을 놓을 수 없었다.
설령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는 신분이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결이 선택할 미래는 단 하나뿐이었다.
“만일 네가 나에게로 올라올 수 없다면.”
단이를 제 곁에 두는 것.
“내가 너에게로 내려갈 것이다.”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단이의 곁에 있는 것.
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럼에도 단이는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고개를 내저었다.
“하오나…….”
“그만하라고 하였다.”
“곧 부마 간택이…….”
울음 섞인 목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단이의 뒷머리를 그러쥔 결이 그대로 끌어당겨 입을 맞춘 탓이었다.
눈물에 젖은 입술을 베어 물듯 삼킨 결이 단박에 그 안을 가르고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일전에 나누던 입맞춤과는 확연히 달랐다.
조급하고, 애절하고, 또 괴로울 만큼 고통스러워 결은 매달리듯 그 작은 몸을 부서져라 안았다.
지독한 갈증 끝에 접한 차처럼 단이의 숨결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눈물과 헛된 생각까지 전부 다 집어삼킬 요량으로.
거칠게 안을 헤집는 움직임에 단이는 숨조차 고르지 못하고 그에게 휩쓸렸다.
숨이 막혀와 그의 어깨를 밀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결은 더욱 깊이 단이에게 밀려들었다.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에 가뜩이나 부족한 숨이 빠르게 고갈되었다.
결은 단이의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에야 겨우 숨이 드나들 만한 틈을 벌려 주었다.
그마저도 한 치 남짓한 거리라.
“하아, 하…….”
단이가 연신 몰아 내쉬는 밭은 숨이 고스란히 결에게 가닿았다.
간신히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입술 위로 다소 화난 듯한 음성이 뜨겁게 쏟아졌다.
단이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들어 올린 순간.
“너는 나를 떠날 수 없다.”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 듯 숨이 막히고 가슴에 짙은 통증이 번져왔다.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나리께서 눈물을 짓고 계셨다.
나의 세상이, 나의 하늘이.
얼음 같이 차갑던 눈 속에 뜨거운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나를 보고 계시었다.
끝을 말한 나의 한마디에.
“너는 나의 것이라 하였으니, 내 허락 없이는 그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세상을 잃은 것보다 더 괴로운 얼굴로.
“누구도 너를, 내게서 떨어트리지 못할 것이란 뜻이다.”
“…….”
“설령 그 누군가가 너라도 말이다.”
분명 명령하는 말투였으나 단이의 귀엔 그것이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숨을 쉬기 어려울 만큼 가슴이 먹먹하여 단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실은 그녀 또한 두려웠다.
결이 다른 여인의 남자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두려웠지만, 무엇보다 그가 쉽게 자신을 저버릴까 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이리도 나를 깊이 붙드시는 분이거늘.
지레 겁을 먹고 그를 밀어내려 하였던 스스로가 미워질 지경이었다.
‘그래……. 어차피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지금 이 한때라도 온전히 사랑을 받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이 마음을 붙들 수만 있다면.
아니, 이 하룻밤이나마 한 자락 잘라 내 속에 새길 수만 있다면.
결심한 단이가 결의 옷깃을 붙들며 말하였다.
“그럼…… 오늘 밤을 제게 주시어요.”
“…….”
“저를 나리의 여인으로 만들어 주시어요.”기꺼이,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