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그럼…… 오늘 밤을 제게 주시어요.”
“…….”
“저를 나리의 여인으로 만들어 주시어요.”
결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틈이라도 벌어지면 그 사이로 단이가 빠져나갈까, 어떻게든 작은 몸을 그러안던 팔이 전보다 조금 느슨해졌다.
행여 이 작은 아이가 자신의 섣부른 손길로 인해 다치게 될까 두려웠다.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너무 큰 것을 잃게 되진 않을까 두려웠다.
하나 단이는 그 마음을 알 리 없으니.
“어찌 망설이시어요?”
사뭇 고민이 엉켜든 눈빛에 이번엔 단이가 그의 옷자락을 쥐어 살짝 끌어당겼다.
행여 그의 마음속에 자신이 걱정한 그대로의 고민이 있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결은 흔들리는 이성을 애써 붙잡았다.
“너를 취하는 것은 쉽다.”
“…….”
“하나 그 일로 네 마음속에 상처를 내지 않기란 어렵다.”
혼례를 하지 않은 남녀가 정을 통함에 있어, 사내보단 여인이 감수해야 할 것이 더 많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단이는 머뭇거리기는커녕 옷자락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세상의 시선이 무슨 상관이고, 훗날의 일이 무슨 상관일까.
결과 이리 눈을 마주치고 사랑을 속삭일 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가 없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부마 간택령이 떨어진다면 영영 그의 곁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결이 거절한다 한들 부마 간택은 나라의 국법이 아닌가.
국법을 피하면 엄벌에 처해질 터이니, 아무리 결이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단이였다.
예니 법도니 그런 것은 모른다.
정숙이니 정결이니 그런 것도 모른다.
그저 하룻밤.
단 하룻밤만이라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온전히 결의 여인이 될 수만 있다면.
그리된다면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을 제 마음만 확실히 알 뿐이었다.
무엇보다 나리께서도 나를 이리 원하고 계시지 않은가.
지금도 나리의 손안에 잡혀 팽팽하게 당겨진 저고리가 그 증거이니.
결의 목을 끌어안은 단이가 진심을 담아 애원하였다.
“나리의 정을 받는 일에 어찌 상처가 뒤따를까요. 나리께 안길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제겐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
“그러니…… 제발요.”
단이가 고개를 들어 애절하게 결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결의 두 눈에서 주저함이 지워지지 않으니, 결국 단이가 먼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어설픈 입맞춤은 되레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결의 인내심을 끝내 바닥나게 만들었다.
느슨해졌던 팔이 다시 바짝 조여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다시 단이의 숨결을 탐하던 결이 손을 올려 그녀의 목에 둘러졌던 손수건을 풀어내었다.
힘없이 떨어져 나간 손수건 아래, 그녀의 희고 고운 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촉, 촉.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잔뜩 부푼 입술을 희롱하던 결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목선을 따라가던 입술이 멈춘 곳은 흉터가 있는 자리였다.
감히 안일한 생각으로 그녀를 다치게 하였던 그날의 상처.
그에겐 후회의 흔적이었고, 평생 짊어져야 할 책임의 흔적이었으며, 동시에 단이의 마음을 새삼 깨닫게 하는 흔적이었다.
이리 커다란 상처를 입고도 제 곁을 떠나지 않는 단이의 마음을.
이리 커다란 아픔을 겪고도 이보다 더한 것까지 감내하겠다는 단이의 마음을.
결의 입술이 숭고한 흉터 위에 깊은 온기를 남겼다.
“…….”
그 낯설고도 생경한 감촉에 단이가 어깨를 움츠리며 얕은 숨을 터트렸다.
그 숨이 갈망에 열기를 더한 듯, 단이의 뒷머리를 감싼 결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닥에 누였다.
단이를 다루는 손은 한없이 신중하면서도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초조한지라.
드르륵, 다탁을 밀어내는 손길에 남아 있던 차가 일렁이다 흘러넘쳤다.
흥건히 젖은 다탁 아래 두 사람이 틈 없이 겹쳐졌다.
단이의 체취가 짙어질수록 결은 더욱더 애가 끓었다.
분명 조금 전 차를 마셨는데도 며칠씩이나 아무것도 마시지 못한 것처럼 목이 탔다.
하여 입술이 닿는 곳마다 갈증을 풀 것을 찾으니, 해갈의 색은 붉은빛이라.
곧 단이의 몸 곳곳에 영산홍 같은 붉은 꽃잎이 수 놓였다.
결의 입안에 남아 있던 짙은 차향이 붉게 피어난 꽃잎마다 스며들어 그녀를 한 송이 꽃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향기가 짙어질수록 단이는 제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다가도 한순간 푹 꺼져 아득해지니, 세상이 뒤흔들리고 하늘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입술이 닿는 곳은 기껏해야 한 치가 될까 말까 한 작은 부분인데, 어찌하여 뒤틀리는 것은 온몸인지.
그마저도 달아날 수 없게 꽉 붙들려 단이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접문을 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외설적이라.
“나리…….”
애원하듯 부르는 목소리가 전과 같지 않다.
하나 나리는 대답 대신 더 짙게 다향을 새겨 넣으신다.
다시금 의도하지 않은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밭은 숨이 앓는 듯 우는 듯 새어 나와 민망하건만.
그럴수록 결의 눈빛은 흡족하다는 듯 깊어졌다.
그것이 부끄러워 손으로 입을 막으면 결이 긴 팔을 뻗어 손을 걷어내었다.
다시 입을 막지 못하게 마디마디에 자신의 길고 곧은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내게서 아무것도 숨기지 말거라. 전부 다 알고 싶으니.”
하면 단이는 제 것이면서도 제 것이 아닌 숨이 목을 긁으며 나오는 것을 가만둘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행여 바깥에서 누군가 들을까 안간힘으로 삼키면, 결은 또 시험하듯 단이를 더욱 달아오르게 하였다.
단이는 벌써부터 기진하여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맹랑하게 그의 여인으로 만들어 달라 한 것에 대한 대가는 이제 시작일진대.
벌써부터 잔뜩 흐트러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단이에 결은 제 인내심 또한 바닥을 드러내고 있음을 느꼈다.
결은 더없이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는 얼굴로 단이를 눈에 담았다.
촛대 위에서 불꽃이 일렁일 때마다 그녀의 모습 또한 신기루인 듯, 환상인 듯 흔들렸다.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는데 제 눈이 멀었던 것인가.
아니면 흘러간 계절에 비로소 꽃이 만개를 하였는가.
처음엔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단이는 어느새 농염한 색을 지닌 아리따운 여인이 되어 있었다.
몸을 낮춰 단이의 이마에 입을 맞춘 결이 물기 어린 눈을 마주 보았다.
말간 눈동자 안에 들어찬 자신의 얼굴은 스스로조차 낯설 만큼 행복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오로지 이 여인으로 인하여.
온기도 없이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자신을 단숨에 녹여버린, 봄꽃 같은 이 여인으로 인하여.
“단이야.”
열기에 잠겨 갈라진 부름이 다정하게 단이의 귓가를 감쌌다.
“내가 너의 세상이라 하였느냐.”
지옥 같은 세상에 살던 나에게 내려온 유일한 구원.
나의 삶, 나의 이유.
나를 가질 수 있는 건 오로지 너뿐이니.
“그 세상에선 네가 나의 주인이다.”
결의 절실한 고백에 단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슴이 벅찰 만큼 거대한 감정이 밀려와 온몸을 적시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만큼은 곧 닥쳐올 미래도, 처한 현실도, 신분도 무엇도 없었다.
오로지 결과 자신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단이는 눈앞에 검은 비단처럼 부드러이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스쳐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오로지 주인만 있고, 속한 것은 없으니, 서로가 서로의 주인이 되면 어찌 되는 것이어요?”
목소리에 스며든 웃음소리가 열기와 어울리지 않게 순박하고도 맑았다.
결은 뺨에 닿은 손바닥에 입술을 묻으며 그녀와 비슷한, 그러나 조금 더 열망에 젖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방에서만큼은 내가 너에게 속한 것으로 하자.”
“…….”
“네가 나를 품는 것이니.”
단이가 결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겨우 한 다경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세상을 끌어안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벅찼으나, 그 어떤 기쁨보다도 비교할 수가 없더라.
서로가 서로의 향으로 물들어 그 어떤 다향보다 깊게 취하니.
하여 방 안에는 달이 기울도록 짙은 향과 뜨거운 열기가 가실 줄을 몰랐다.
***
어두운 밤하늘에 떠오른 반달이 은은한 빛으로 세상을 보살피던 무렵.
이마 위를 간질이는 감각에 단이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나둘 돌아오는 감각에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던 잠도 서서히 밀려 나갔다.
언제 잠이 들었는가. 기억을 되짚어 보니 나리의 품에 맞춘 듯 꼭 안겨 가쁘게 숨을 몰아쉰 것이 마지막이었다.
서늘한 공기를 피해 온기를 파고들다 따스한 체온에 파묻혀 까무룩 곯아떨어지고 만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니 살갗에 사부작거리며 닿아오는 이불이 사뭇 낯설었다.
단이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 옆으로 누운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결의 얼굴이 보였다.
이마를 간질이던 감촉의 정체는 머릿결을 정리해 주던 결의 손길이었다.
끔뻑, 끔뻑. 아직 잠에 취한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길 잠시.
“일어났느냐.”
나른한 목소리가 달콤하게 귓가에 내려앉았다.
단이는 아직 잠이 묻어 나오는 눈으로 결을 보았다.
“아직 날이 어두워요……. 조금 더 주무시어요, 나리.”
그 말에 피식 입가를 늘인 결이 단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누가 한숨도 못 자게 하던데.”
“예? 누가요……?”
“밤사이 고뿔이 들까 요를 깔고 이불을 덮어 주었더니, 기어이 자꾸 품을 파고들어서.”
무슨 말인가 싶어 의아한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니, 결은 푸스스 웃으며 그녀를 품 안에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아니다. 좋았다는 뜻이다.”
가만가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무척이나 다정하여 금방이라도 다시 잠에 들 것만 같았다.
생전 겪어본 적 없는 곤함이 온몸을 짓누르는 탓이었다.
하나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운지라.
꼬물거리며 결에게 폭 안긴 단이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이마를 기대었다.
나리의 품은 바다처럼 아늑하였다.
바다는 여름에나 겨울에나 차갑다고 하였는데, 나리의 바다는 마치 따듯한 목욕물처럼 몸을 눅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치 불을 품은 듯 스스로 끓어오르니.
미련인 듯 여운인 듯 오목한 허리선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열이 옮겨붙은 단이의 하초가 금세 달아올랐다.
하나 결은 단이에게 다시 정을 새기는 대신 가벼운 입맞춤만 이어나갔다.
“여인은 첫 밤을 무리하게 치르면 열병을 앓는다 들었다.”
라는 이유를 대며.
이 이상은 생각도 못 할 만큼 이미 충분히 시달리게 하였으면서 말이다.
하나 점잖은 말과는 다르게 손길은 여전히 단이를 원하니.
곤함에 녹녹히 젖은 몸을 다시 움직일 수도, 그렇다고 손길을 피할 수도 없는 단이로선 곤욕도 이런 곤욕이 없었다.
슬금슬금 몸을 웅크리며 올려다보는 눈길에도 나리는 조금 더 눈을 붙이거라, 말씀만 다정히 하시고서 한시도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으셨다.
나리께 이리 짓궂은 면도 있던가.
간지럽단 핑계로 몸을 돌리니, 되레 배를 감싸 더욱 틈 없이 끌어안는 결이었다.
더 이상 물릴 힘도 없어 단이는 하는 수 없이 결이 하는 대로 놔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 거절할 수도 없을 만큼 그의 손길이 따스하고 감미로운 까닭이었다.
하나 동짓날 밤도 짧을 연인들에게 아직 추분에 이르지 못한 밤은 찰나와 같았으니.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하늘에 새벽달도 서녘으로 숨어들고, 차츰 밝아오는 동창이 아침을 재촉하고 있었다.
행여 다른 이에게 들킬까.
단이가 몸을 일으켜 옷가지를 챙기려는데, 결이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어디 가는 것이냐.”
목덜미에 내려앉은 짙은 숨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단이는 홧홧하게 열기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부끄러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제 곧 날이 밝아서, 들키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려고…….”
“차제구는 아직 저기 있다.”
“…….”
“평소보다 일찍 차를 올렸다 하면 되지 않느냐.”
“하나 물이 없사온데…….”
“상관없다. 등청하여 조금 늦게 마시면 되지.”
철석같이 지키던 다시까지 어기며 단이와 조금 더 있고 싶은 마음이었다.
단이의 동그란 어깨에 고개를 묻고 깊이 체향을 들이마신 결이 뜨거운 입김을 흘렸다.
“단이야.”
“예, 나리.”
“내가 어제 너에게 한 말, 잊지 말거라.”
어제 단이가 했던 말이 여태 불안으로 남아 있던 걸까.
결은 한 번 더 단이의 마음속에 자신의 말을 새겨 넣듯 진심을 다하여 말하였다.
“나의 세상에선 네가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결의 손등을 감싼 단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이외에 여인이란 내게 없다.”
“…….”
“네가 나의 유일한 정인이다.”
단이는 다시금 북받치려는 감정을 삼키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기서 어찌 더 바랄 수 있을까.
이리 나리의 정을 받았고, 진심을 느꼈고, 또 모든 것을 내어드렸는데.
그저 결의 마음 한 자락에 새겨진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훗날 흐르는 시간에 쓸리고 닦여 저 마음이 흐려진다 하더라도, 이 이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리라.
“나리께서도…… 오늘을 잊으시면 아니 되어요.”
“어찌 잊겠느냐. 내 삶에서 가장 값진 날이거늘.”
“네. 그리 간직해 주시어요.”
단이는 결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잊지 말고, 평생 그리 소중히 간직해 주시어요.”
그러곤 보이지 않는 얼굴을 더욱 베개에 묻으며 눈물을 꾹 참았다.
곧 어떤 소식을 듣게 될 줄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