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비, 아찔하게 흐르는-72화 (72/100)

72화

“옹주 아기씨께서 떠나셨다고요……?”

“그래. 이미 오늘 아침에 온양행궁으로 떠나셨다.”

결에게서 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단이는 그저 황망할 수밖에 없었다.

부마니, 석고대죄니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찌 일언반구도 없이 그 무거운 짐을 홀로 지셨냐며 죄송함과 감사함을 전하고도 싶었다.

하여 언제나 그랬듯 선정에게 향하려는데, 결이 그녀를 찾아와 이런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이 역시 옹주의 뜻이었다며.

“저…… 잠시만 밖에 다녀올게요.”

“이미 옹주께서는 도성 밖으로 떠나셨다.”

“그래도요, 그래도 지금이라도 가면 멀리서라도 행차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 잠시만이라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단이의 얼굴에 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오거라. 데려다줄 터이니.”

진위에게 잠시 훈련원을 맡긴 결이 곧 단이를 흑마에 태웠다.

“이랴!”

함께 올라탄 그가 곧장 숭례문으로 향하였다.

하나 이미 늦은 것인지, 단이는 길고 긴 행렬의 끄트머리마저 볼 수 없었다.

‘이젠 내가 미우신 건가…….’이미 선정의 흔적이 사라진 도성 문 너머를 보며 단이의 어깨가 힘없이 축 처졌다.

처음 결의 부마 소식을 들었을 때, 선정에게 부정하듯 물어보았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있던 차였다.

내가 얼마나 미우셨을까.

그 힘든 시간을 견뎌내시며 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우셨을까.

이젠 알 길이 없는 선정의 마음에 못내 서운하고 또 속상하여 눈물을 짓던 그때.

“혹 서결 장군의 다비 되시오?”

웬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맨 처음 선정을 보았을 때와 꼭 같더라.

잠시 반가운 마음이 일었으나 곧 쓰개치마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처음 보는 이였다.

한순간 기대하였던 단이는 실망한 마음을 애써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예. 제가 서결 나리의 다비이온데, 무슨 일로…….”

“다행이오. 그러잖아도 훈련원으로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그대가 이곳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뒤따라온 것이오.”

궁녀는 품에서 고풍스러워 보이는 봉투를 하나 꺼내 단이에게 건네었다.

“선정 옹주께옵서 보내신 서신이오.”

“옹주 아기씨께서요……?”

“그렇소. 급히 떠나야 하는 길이라 서신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것을 이해해 달라 전하셨소.”

단이는 일렁이는 눈동자로 봉투를 바라보았다.

결과 함께 소다옥으로 돌아온 그녀는 곧장 봉투 속 서신을 꺼내 펼쳤다.

색이 고운 화초지 위에는 선정을 닮아 정갈하고도 아담한 필체가 새겨져 있었다.

-단이, 나의 애정하는 차벗.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사이에 너에게 미안하다 말할 것이 셀 수도 없이 많아졌구나.

못나진 얼굴을 보이기 부끄러워, 떠나는 길에 이리 서신으로 대신 인사를 전하는 나를 용서해 주렴.

잠시나마 너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던 나의 어리석은 욕심도 함께 용서를 빈다.

치자꽃 같은 너를, 은방울꽃 같은 너를, 나는 언제까지고 잊지 않으련다.

하니 단이야.

행복하거라. 한없이 행복하거라. 하여 눈물일랑 짓지 말고 영원토록 웃거라.

네가 물들인 춘풍 꽃물이 겨울에 나릴 눈까지 다 녹일 수 있도록.

항상 건강하렴, 단이야.

눈이 녹아 너를 닮은 봄이 올 때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원해 본다.

그때 다시 함께 찻잔을 나누자꾸나.

너를 아끼는 벗, 선정이.

단이는 선정의 서신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그녀를 향한 선정의 우애와 진심이 가득 담겨 있는지라.

잠시나마 서운하였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져 더욱 애틋한 감정이 되었다.

벗이라 적은 한 글자가 그 어떤 문장보다 더 깊이 그녀의 마음을 울렸다.

‘감사해요, 옹주 아기씨……. 참으로 감사하여요.’답신을 보낼 길이 없어 그저 서신에 대고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 다시 따스한 봄이 올 때, 이전처럼 함께 향긋한 차를 마실 수 있기를.

돌아올 적엔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가 다시 환하게 피어나기를.

단이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선정의 평온과 그녀와의 재회를 빌었다.

***

붉은 단풍이 하늘을 수놓나 싶더니 어느 순간 하나둘 바닥을 물들여갔다.

예년보다 빠르게 다가온 추위에 사람들은 일찍이 겨울을 날 준비를 시작하였다.

단이 또한 어느 때보다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곧 겨울이 되면 적어도 청명(淸明) 전에 나오는 명전차(明前茶)가 나오기 전까지 차를 구하기 어려운 까닭이라.

하여 부지런히 겨울을 날 찻잎을 구비해 놓아야 했다.

“산수유 육질은 물과 가까이 있으면 금세 곰팡이가 피기 쉽다. 조심하여 다루거라.”

“예, 보선 아주머니.”

단이는 보선 어멈의 말에 따라 말린 산수유 열매가 가득 든 함을 다신당 선반에 고이 올려놓았다.

단이가 옛 벗의 딸이라는 걸 안 이후에도 그녀를 대하는 보선 어멈의 태도엔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차에 있어서 엄격하였고, 또 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무뚝뚝하였다.

하나 매일 새벽마다 먼저 다신당의 촛불을 밝히는 것 또한 여전하였고, 또 가끔씩은 단이가 좋아하는 약과를 따로 챙겨두었다가 다신당 정리가 끝날 때쯤 슬쩍 건네고 가기도 하였다.

이따금 둘만 있을 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곤 하였다.

이제 단이에겐 보선 어멈이 이모와도 같은 존재였다.

“알맹이가 사이에 껴서 뚜껑이 벌어져 있질 않느냐! 공기에 자주 닿으면 산화가 빨리 된다 그리 일렀거늘!”

“으앗, 죄송합니다!”

물론 잘못을 했을 때엔 여전히 인정사정도 봐주지 않는 매서운 스승이었지만.

서둘러 다함을 정리한 단이는 잠시 밖으로 나와 숨을 돌렸다.

결이 등청을 하지 않는 날이라 오랜만에 밀린 다신당 일을 하였더니 온몸이 다 뻐근하였다.

쭈욱 기지개를 펴 찌뿌둥한 어깨를 푼 단이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유영하는 아득한 구름이 더없이 평온하게 느껴졌다.

구름을 향해 손을 뻗으니 차가운 바람이 하얀 손가락에 휘감겼다.

따사로운 햇살과 다르게 이젠 한낮에도 온도가 많이 떨어져 제법 한기가 느껴졌다.

심 다점에서 지낼 땐 이 정도 추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조선의 계절에 몸이 적응된 모양이다.

‘천도 슬슬 바꿔야겠다.’단이는 목에 둘러진 얇은 손수건을 매만졌다.

처음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가리기 시작했던 흉터는 어느 순간부터 결의 눈으로부터 숨기기 위해 계속 무언가를 두르게 되었다.

자신의 목을 볼 때마다 결이 죄책감 어린 눈을 하는 것이 싫은 까닭이었다.

결 역시 의도하지 않은 사고였고, 결국 그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 상처로 끝나지 않을 밤이었으니까.

하여 단이에겐 무엇보다 잊을 수 없으면서도 가장 숨기고 싶은 상처였다.

“엣취!”

날이 추운 탓일까. 오래 바람을 쐬고 있었더니 절로 재채기가 나왔다.

고뿔이 오려는 건지 어제저녁부터 코가 간질간질하던 참이었다.

코를 훌쩍거린 단이는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옷자락을 단단히 여미었다.

“엣취!”

그럼에도 어김없이 나오는 재채기.

그래도 하늘이 예뻐서 조금 더 미적거리고 있자니, 과연 버틴 보람이 있게 다신당으로 걸어오는 결의 모습이 보였다.

“나리!”

해맑게 웃으며 한달음에 달려가니 결이 그녀를 향해 다정히 웃어 주었다.

“혼자 있던 것이냐.”

“예. 아까는 보선 아주머니도 계셨는데, 정리를 마치고 가시었어요.”

“하면 할 일은 다 끝난 것이냐.”

“네! 저녁에 백 씨 아저씨께서 백반 가루를 가져오실 때까진 쉬어도 좋다고 하시었어요.”

말갛게 웃으며 재잘거리던 단이가 갖추어 입은 결의 옷차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어디 나가시는 것이어요?”

“잠시 장터에 다녀올 것이다. 함께 가겠느냐.”

“네! 저도 데려가 주시어요. 가고 싶어요.”

“그럼 채비하고 오너라. 옷이 얇아 보이는구나.”

“이대로 나가도 괜찮습니다! 어서 가요, 나리.”

결이 단출한 단이의 옷차림을 보고 잠시 걱정을 비추었지만, 어차피 여기서 더 입을 만한 것도 없기에 단이는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은 함께 대문을 나서 종루로 향하였다.

나리와 함께 걷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라.

하여 말도 없이 걷는 결의 뒤를 단이는 가까워지니 멀어지니 하며 종종종 뒤따라 걸었다.

결은 그런 단이의 보폭에 맞추어 부러 느릿느릿 속도를 늦추었다.

하여 걸어서 한 식경이면 도착할 장터에 꼬박 반 시진을 허비하였다.

그럼에도 함께 걷는 것만으로 길이 즐거운 터라.

결은 장터에 온 이유도 잠시 뒤로하고 부러 가지 않아도 될 골목까지 발길을 두었다.

덕분에 단이는 이것저것 실컷 구경을 하며 오랜만에 콧바람을 쐬었다.

이따금 한 번씩 결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배시시 웃어 보이는 건 덤이었다.

결은 몇몇 가게에 들러서 주인장에게 돈 꾸러미를 건넸는데, 이상한 것은 돈만 건네고 아무런 물건도 받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주인장들은 돈을 받을 때마다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아무것도 건네지 않았고, 결도 마치 당연하다는 듯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다고 나리께서 외상을 하셨을 리도 없거늘.

가는 돈은 있는데 오는 물건은 없으니, 단이의 눈에 퍽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리, 어찌 돈만 주시고 물건은 받지 않으시어요?”

하여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으니, 돌아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제사 음식들을 미리 받아놓으면 죄 상할 것 아니냐. 우리 집은 보통의 제사보다 그 양이 훨씬 더 많으니, 미리 대금을 치르고 날에 맞춰 받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내가 직접 해오던 일이라 남에게 맡기지 않는 것이고.”

제사. 그 한 단어에 단이는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결의 가족들이 전부 끔찍한 일을 당하여 한날한시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 막상 그 제사를 결이 준비해야 한다는 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부모의 제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울진대, 하물며 형제들과 일가친척의 제까지 함께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심정일까.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리기가 힘들어 단이의 낯빛이 되레 어두워졌다.

“괜찮다. 익숙해진 지 오래니.”

그런 단이의 생각을 알았는지, 결은 부러 아무렇지 않은 듯 입가를 늘였다.

어찌하여야 하나.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가슴이 먹먹하여 쉬이 웃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계속 울상을 하고 있는 것도 결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한 표정만 짓고 있던 그때.

“엣취!”

“…….”

“엣취이!”

심각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대차게 재채기가 나왔다.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주위에서 어이쿠 소리가 뒤따라올 정도였다.

행여 콧물이라도 나왔을까 얼른 손으로 입가와 코를 가린 단이가 힐끔힐끔 결의 눈치를 살폈다.

단풍처럼 빨갛게 물든 얼굴이 귀여워 낮게 웃음을 흘리는 결이었다.

그러나 눈은 곧 걱정을 품고 그녀의 옷을 살폈다.

“몸이 한기를 느끼는 모양이구나.”

“그리 얇게 입고 나오지는 않았는데…….”

“원래 목이 따듯하여야 감모가 들지 않는다.”

결의 손끝이 단이의 목에 두른 손수건을 스쳤다.

그러잖아도 점점 날이 추워지는데 여전히 얇은 손수건만 두르고 있어 눈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밋밋한 무명천을 두르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

“따라오거라.”

잠시 고민하던 결이 이내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무어 더 살 것이 남으셨나, 단이는 의아한 눈을 하며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결의 발이 멈춘 곳은 입전(立廛)이었다.

대개 명에서 들여온 고급 비단만을 취급하는 곳이라.

값이 상당하여 부유한 양반들만 주로 이용하는 점포였다.

입구부터 화려한 비단의 향연에 단이는 지레 움츠러들어 결의 뒤에 바짝 붙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찾으십니까?”

“여인의 목에 두를 목도리를 하나 사려 하는데.”

그 말에 단이가 곤란한 표정으로 결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당기며 속삭이듯 말하였다.

“나리……! 이곳에서 파는 물건들은 제가 두르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어요.”

“두르면 그저 천이고, 이왕 사려면 좋은 것을 사는 것이 맞지.”

“하오나 이런 입성에 비단 목도리라니, 과합니다.”

결이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단이의 저고리부터 치마, 언뜻 드러난 신으로까지 내려간 시선이 다시 천천히 올라와 말간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럼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바꿔주랴.”

단이가 단박에 거절할 것임을 알고서 한 말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단이는 더없이 눈을 크게 뜨며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니오라……!”

“그럼 목도리만이라도 내 뜻대로 하자꾸나.”

“…….”

“이거 하나만이라도. 안 되겠느냐.”

단이가 흉터를 숨기기 위해 더운 여름날에도 손수건으로 목을 가리는 것을 늘 안타깝고 미안하게 생각하던 결이었다.

자신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생긴 상처였고, 죄업처럼 남은 흉터라.

하여 이렇게나마 그녀의 흉을 가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마음을 단이가 어찌 모를까.

두 눈에 다시금 차오르는 자책에 단이는 어쩔 수 없이 결이 하자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 눈빛을 품지 않게 하려고 가리는 것이었으니.

단이가 수긍의 빛을 보이자 결이 주인장에게 눈짓을 하였다.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를 훔쳐보던 주인장은 곧 잽싸게 가게 안 목도리들을 가져와 그 앞에 펼쳐 놓았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느냐.”

“전부 다 어여뻐서 무얼 골라야 할지…….”

결은 신중하게 진열된 목도리들을 살펴보았다.

이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담은 듯한 쪽빛의 비단 목도리가 그의 손에 들렸다.

끄트머리에 자수로 수놓은 흰색 은방울꽃이 꼭 단이와 닮은 모양이었다.

결은 손수 그것을 단이의 목에 둘러주었다.

조심스럽게 목도리를 둘러주는 그의 손길에 단이의 두 뺨이 하늘에 번지는 노을처럼 발그레해졌다.

“잘 어울리는구나. 마음에 드느냐.”

단이는 목 아래 늘어진 목도리를 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부드럽고도 도톰한 감이 마치 포근하고 따스한 구름을 만지는 것 같았다.

설령 거칠고 빳빳한 것이라 한들 어찌 마음에 안 들 수 있을까.

결이 손수 선물하여 주는 것인데.

단이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듭니다. 참으로 어여뻐요.”

“다행이구나.”

결이 단이를 따라 부드럽게 입가를 늘였다.

그는 곧장 주인장에게 값을 치르고는 두어 개의 목도리와 장갑을 추가로 더 샀다.

근처 이전에서 단이가 신을 만한 겨울 신까지 한 켤레 샀다.

결국 단이가 거부한 치마와 저고리 빼고는 전부 산 셈이었다.

함께 가게를 나서자, 햇살 아래 자신이 선물해 준 옆꽂이와 목도리를 한 그녀의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눈에 찼다.

어여쁘다. 가을 하늘의 햇볕보다 더 눈이 부실 만큼 어여쁘다.

이렇게 이 아이가 하나둘 나의 손길로 채워져 가기를 바랐다.

온통 나의 색으로 물들어 가기를, 나의 향으로 배어들기를 바랐다.

내가 그러한 것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