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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아찔하게 흐르는-75화 (75/100)

75화

깊은 밤.

잔에 술을 따른 이선이 그것을 들어 맞은편 자리에 놓았다.

안에 담긴 붉은 술이 일렁이며 달빛을 담았다.

“그래. 준비가 끝났다고.”

잔을 받은 결이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예. 어명만 내려주시옵소서. 언제든 각 임지로 보낼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이선이 낮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동안 잠잠하였던 북방 경계선의 약탈이 새로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토벌로 인하여 손실이 컸던 여진족이 다시금 과거의 잘못을 잊고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거나.

‘상황을 지켜보던 이곳의 누군가가, 다시 일을 벌이고 있거나.’

하여 결은 은밀히 상단인 척 군사들을 꾸려 의심이 되는 장소에 각각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전에 결의 주장을 유일하게 흘리지 않고 들은 이선의 뜻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혹 그 자객을 잡는다 한들, 그것이 영상의 꼬리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걸세.”

“상관없습니다.”

결의 눈동자가 날 서린 빛을 뿜었다.

“이제부터는 닥치는 대로 영상의 수족을 자르고, 눈과 귀를 막을 것입니다.”

“…….”

“그러다 보면, 몸통을 잡을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날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위협을 드러내는 준백이었다.

하니 잡는 것이 그의 꼬리가 되었든, 수족이 되었든, 혹은 눈과 귀가 되었든.

결은 흔적을 쫓을 수 있는 건 전부 쫓아 모조리 움켜쥐고 잘라낼 셈이었다.

그렇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끝낼 수 있을 테니.

이선은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얽힌 눈빛으로 빈 술잔을 채웠다.

“그렇지. 그렇게라도 하나하나 잘라내야겠지. 감히…… 겁도 없이 옹주에게까지 손을 뻗친 자이니.”

선정이 온양행궁으로 떠난 일에는 자신의 책임도 일부 있는 터라.

결이 고개를 숙여 그날의 과오를 사죄하였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대를 탓하는 것이 아니네. 그 일은 어디까지나 옹주가 잘못 발을 들여 벌어진 일이었으니. 과인의 덕이 부족하여, 옹주에게조차 믿음을 주지 못한 것이 그저 아비로서 한탄스러울 뿐이네.”

결은 이선의 속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그 복잡한 심경을 위로하며, 그는 하루라도 빨리 이 오랜 싸움을 끝내야겠다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고 준백의 간악한 욕심에 왕실과 조정이 뒤흔들리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므로.

그 뜻을 이선 또한 통감한 것일까.

술잔을 기울여 남은 술을 모두 비운 이선이 사뭇 굳은 눈으로 상선에게 명하였다.

“상선. 그것을 내와 주게.”

“예, 전하.”

곧 상선이 기다란 함을 가져와 이선 앞에 놓았다.

이선은 손으로 느리게 함을 쓸어보고는 뚜껑을 열어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꺼내었다.

달빛에 비친 그것의 모습이 결의 검은 눈동자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이선은 친히 그것을 결에게 건네었다.

“그대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방패다.”

상방검.

임금의 군사 지휘권을 양도받아 군사를 진두지휘할 수 있는 검.

이것을 내어준다는 것은 나라의 군권을 일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온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자에게만 내리는 검을 결에게 하사한 것이다.

“과인은 두렵네.”

두 손으로 검을 받아든 결을 보며 이선이 말을 이었다.

“늘 살얼음판 같은 조정이었지만, 지금만큼 두려웠던 적이 없단 말일세.”

“……무엇이 전하의 어심을 흩트리고 있는 겁니까.”

“나의 무능함.”

이선의 목소리가 묵직한 밀도를 갖고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저 간악한 뱀들이 나의 목을 점점 죄어 오고 있는데, 그것을 차마 끊어내지 못하는 나의 무력함.”

“…….”

“과인은 그것이 두려울 뿐이네.”

조선의 왕권이 사대부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된 것은 실로 오래된 악폐였다.

선왕조차 그 간악한 뱀들에게 마지막까지 목을 죄이시다 붕어하시지 않았는가.

이선은 어떻게든 이번 대에서 왕권을 바로잡고 사특한 무리들을 처단하고 싶었다.

“근자에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수상한 움직임이라 하심은…….”

“아무래도 영상이 다른 뜻을 품고 있는 듯해.”

한순간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감히 함부로 말을 얹기에도 위험할 만큼 중대한 사항이었다.

결은 이선의 낯빛에서 답을 찾으려는 사람처럼 한참 동안 용안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그리 생각하시는 연유가 있으십니까.”

“나도 확실한 정황은 없네. 다만 근래에 거두어들이는 곡식의 양을 비정상적이다 싶을 만큼 늘이고, 지난달에는 군기시를 여러 번 시찰한 적도 있더군.”

쉬이 넘길 만한 자취는 아니었다.

사실 지금이라면 저들이 언제든 칼과 창을 들고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니.

반역.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될 순간이었다.

그러니 이선에게 있어 이 위험을 막을 수 있는 적임자는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서결.

자신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도, 과거의 악연을 바로잡는 사람도, 위태로운 조선을 지킬 수 있는 사람도 오로지 이 장수뿐이었다.

“그대가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나를 위해 애써달라던 말 기억하는가.”

“소장이 어찌 전하의 어명을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부디 그대가 그 검을 쓰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겠지만…….”

이선이 결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날이 오거든, 약조를 잊지 않아주었으면 하네. 이 환란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있는 자는 그대뿐이니.”

상방검을 받아든 결은 이선을 향해 깊이 절하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이것은 더 이상 준백과 자신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조선의 안위가 걸린 싸움.

결은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조선을, 이 땅을 지키기 위해서도.

그리고 이 땅에서 안전히 살아갈, 나의 단이를 위해서도.

***

“한 좌랑. 퇴청 안 하시오?”

“…….”

“한 좌랑!”

“어, 음?”

멍하니 앉아 있던 성조가 동료의 부름에 흠칫 고개를 들었다.

주위를 보니 이미 다른 관료들은 모두 자리를 정리하고 관청을 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멍해 보이는 성조를 보며 동료가 짧게 실소를 쳤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불러도 통 대답이 없소? 요즘 정말 뭔 일이라도 있소?”

“일은 무슨…… 그냥, 조금 생각할 것이 있어서.”

“이건 또 뭘 그리 적어 놓은 것이오? ……대나무 통?”

빠르게 생각의 여운을 정리한 성조는 어지러이 낙서된 종이를 빠르게 팔 밑으로 감추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냥 낙서요, 낙서.”

“뭔데 그러시오. 어디 고고한 기생한테 잘못 걸리기라도 했남?”

“기생집 끊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 그 소리오.”

“딱 보니 여인 얽힌 얼굴이구먼. 혼자만 좋은 곳 알지 말고 우리한테도 좀 알려주시오. 같이 데려가 주면 더 좋고.”

“허튼소리 말고 얼른 가시오. 나도 이만 퇴청해야겠으니.”

동료를 가볍게 타박한 성조는 부러 부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관청을 나섰다.

말을 타고 밖으로 나오니 어두워진 사위가 그의 눈동자를 뒤덮었다.

잠시나마 생각을 비웠던 머리가 어지럽게 흐트러진 달무리에 물들었는가.

애써 뒤로하였던 생각들이 짚단에 옮겨붙은 불씨처럼 다시 머릿속을 잠식하였다.

‘아버지와 선대부인께서 아는 사이셨다…….’이건 결의 아버지인 서현덕이 정회와 오랜 벗이라 하였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선대부인께서 쓰시던 문양을 아버지가 이리 기억하시는 연유는 또 무어란 말인가?’사대부가의 아낙이 본인만의 인장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문양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역시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민 씨의 망일에, 이토록 선명한 기록이란.

정회가 그녀를 그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그렇다 한들,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성조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였다.

아버지와 선대부인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날 들었던 대화가 귓가에 잔인하게 맴도는 까닭이었다.

혼인. 정인. 서로의 마음을 달콤하게 속삭이던 밀어들.

전부 그의 가슴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제껏 결을 위해 달려왔던 길조차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성조는 자조 섞인 실소를 흘리며 허망한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이런 마음을 먹다니……. 역시 그른 놈이군.”

숨 쉬듯 하던 자책이라 그마저도 무뎌졌는가.

스스로를 꾸짖어 보아도 진흙처럼 끈적해진 마음이 다시 단단해지진 않았다.

오히려 더 가라앉기만 할 뿐.

쓴침을 삼킨 성조는 정처 없이 몰던 말 머리를 돌려 집으로 향하였다.

집에 도착한 성조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가는 대신 사랑채로 향하였다.

가야 할 갈피는 잡지 못하였어도 불순물처럼 떠다니는 의문을 지우고 싶은 탓이었다.

정회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남청색으로 물든 창호지만 그를 맞이하였다.

주위를 살핀 성조는 아무도 몰래 사랑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호롱에 불을 붙이자 일렁이는 불빛에 여러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서탁과 그 아래 서랍, 서가와 장롱 속을 차례로 손길이 훑고 지나갔다.

나전 목기의 책장 안 역시 세심히 살폈다.

하나 아무리 들추어 보아도 수상쩍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일전에 보았던 민 씨의 문양 역시 그 사이 버린 것인지 감춘 것인지 찾을 수 없었다.

‘방이 아닌 건가.’살핀 흔적이 남지 않게 책의 각도마저 되돌려 놓은 성조는 다시 한번 유심히 사랑 안을 살폈다.

어둠을 헤집던 시선이 문득 병풍 위에 멈춰 섰다.

겉보기엔 그저 단조로운 5폭의 수묵 병풍이었으나, 오히려 단조로워서 이 방과는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걸어간 성조가 망설임 없이 나뭇대를 잡았다.

병풍을 밀어낸 그의 미간이 옅게 구겨졌다.

그 뒤에 작은 책장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던 것이다.

‘어찌 병풍 뒤에 이런 책장이 숨어 있는 것인가.’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휘감았다.

마른침을 삼킨 성조가 굳게 닫힌 책장의 문으로 손을 뻗은 그때.

“…….”

하필 이때 정회가 돌아왔는지 아득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성조는 재빨리 병풍을 원래대로 돌려놓고서 사랑채를 빠져나왔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간발의 차이로 중문을 넘어선 성조가 정회에게 허리를 숙였다.

묵중한 눈동자를 마주했을 땐 괜스레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하였다.

다행히 그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는지, 그대로 성조를 지나쳐 사랑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성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아랫사람들이 죄 자리를 떠나고, 홀로 마당에 남은 성조는 사랑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찰나의 순간, 책장 안 책들 사이에서 보았던 민 씨의 문양이 그려진 종이.

그 아래 빼곡히 쌓여 있던 여러 권의 책과 문서들.

분명 예사로운 것들이 아니었다.

한동안 의미심장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성조는 이내 발길을 돌렸다.

하나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방이 아닌 바깥행랑채였다.

난데없이 찾아온 성조에 행랑아범이 주름진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쇤네에게는 무슨 일로…….”

“자네가 가친(家親)께서 나시기 전부터 이 집안에서 일하던 이라지.”

“예, 그러하옵니다.”

“자네에게 긴히 묻고 싶은 것이 있네.”

“하문하십시오, 도련님.”

“기억나는 대로 소상히 말해주어야 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성조는 주위를 살피곤 행랑채 안으로 들어가자 눈짓하였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그는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어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젊으실 적…… 알고 계시던 여인에 관한 물음이네.”

***

정회가 호롱에 불을 밝혔다.

어딘가 석연찮은 시선으로 방을 둘러보던 그의 눈길이 습관처럼 병풍으로 향하였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정회가 걸음을 옮겨 병풍을 걷어내었다.

책장은 그의 의심을 다독이듯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낮게 한숨을 내쉰 정회가 몸을 숙여 책장을 열어 보았다.

몇 권의 책을 들자 그 사이에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서현덕의 아내, 숙부인 민 씨가 사용하던 문양이 그려진 종이.

정회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이 문양.

그것을 보니 오래되어 빛이 바랜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선영아.”

그녀에게 직접 이 문양을 선물하였던, 젊은 날의 그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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