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때는 아주 오래전, 생명이 움트는 춘삼월.
겨울잠에서 깬 숨이 도처의 굴마다 터져 나오던 계절의 시작.
아직은 겨울 자락이 채 가시지 않아 보얗게 입김이 피어오르던 때였다.
이름만 양반일 뿐, 오랫동안 과거를 준비하느라 가산이 기울어지는 줄도 몰랐던 한 진사는 불혹을 넘겨서야 겨우 한미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오랜 숙원을 이룸과 동시에 봄과 함께 찾아온 늦둥이 막내아들을 복덩이라며 심히 어여뻐하였다.
막내아들을 자신의 신이한 합격 비결이라며 자랑하고 싶었던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일찍 관료들의 삶을 익히게 하고 싶은 뜻이었던가.
그는 가는 곳마다 막내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여기저기 얼굴도장을 찍게 하였다.
막내아들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 뒤만 쫓으며 낯선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녔다.
어느 정도 머리가 커서도 인사를 다니는 일은 여전하였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아버지를 많이 도와주고 계신 분이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거라.”
“예, 아버지.”
대문을 나설 때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씀을 듣고서 나선 길.
입춘의 푸르른 생동에 마냥 마음이 들뜬 막내아들은 평소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대궐 같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집이었다.
대문짝이 사대문만 하다는 생각을 하며 열리는 문 너머를 바라본 순간.
“…….”
막내아들, 정회는 세상의 시간이 모두 멈추는 것을 목격하였다.
마당 한구석에서 꽃가지를 살피던 한 소녀가 그의 시간을 붙들어 놓은 것이었다.
시간은 멈췄으나 그녀만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가.
소녀는 홀로 항아인 듯 직녀인 듯 자유로이 움직였다.
대문 열리는 소리에 뒤늦게 고개를 돌린 소녀가 정회와 눈이 마주쳤다.
싱긋, 웃어 보이는 그 어여쁜 미소가 순식간에 정회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이팔방년을 지나는 사내아이에게 그녀는 한 떨기 영산홍과도 같았다.
그것이 정회와 선영의 첫 만남이었다.
선영은 그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렸으나 현숙하고 범절이 높아 벌써부터 사대부가 사이에서 그 소문이 자자하였다.
고명딸인 탓에 일찍이 들어오는 혼처마저 그 집 대감이 미루고 미뤄 아직까지 버티고 있던 차였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아버지의 부단한 노력 덕분인지, 정회는 그 이후로도 간간이 그 댁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처음엔 먼발치에서만 한 번씩 시선을 마주쳐 오던 선영은 어느 순간부터 한 번씩 정회와 말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정회는 숫기 없는 마음에 선뜻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였지만, 그런대로 오라버니로서의 몫을 톡톡히 해내었다.
늘 막둥이 대접만 받던 그에게 선영은 처음으로 어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었다.
어느 날은 마당에 환히 핀 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에 그 곁에 함께 앉아 꽃구경을 하였다.
“오라버니, 그거 아시어요? 제 이름자가 선할 선 자에 꽃부리 영이라는 거.”
“그럼, 알다마다. 새삼스레 이름자는 왜?”
“제 이름에 꽃이 들어가서 그런가. 저는 어쩐지 제 삶이 꼭 이 꽃만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꽃과 같지. 아리땁고…… 또 어진 마음이 향기롭지 않느냐.”
제 딴엔 나름 용기를 건넨 칭찬이건만.
무엇을 생각하는지, 선영은 가만히 꽃만 들여다보며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그 옆얼굴이 못내 눈에 걸렸다.
“꽃을 닮은 것이 싫으냐?”
하여 조심스럽게 물어보니.
“꽃은 금방 지잖아요. 나는 소나무처럼 오래오래 푸른 것이 좋은데…….”
돌아온 것은 그녀의 미소만큼이나 쓸쓸한 대답이었다.
듣고 보니 그녀가 이리 마음 상해하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마침 선영의 생일을 나흘 앞두고 있던 때라.
잠시 고민하던 정회는 곧 흙바닥에 손으로 꽃부리 영(英) 자를 그렸다.
그러곤 글자를 이리저리 파자하고 흘기기를 반복하더니, 아기자기하고도 깔끔한 문양 하나를 완성하였다.
무릎을 펴고 일어난 정회가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보던 선영을 향해 뿌듯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자, 이것은 지지 않는 꽃이다.”
“지지 않는 꽃이요?”
“그래, 지지 않는 꽃. 네가 쓰는 물건마다 이것을 너의 표식이란 뜻으로 새겨 놓으면, 꽃도 지지 않고 네 물건도 잃어버릴 일이 없을 테니 일석이조가 아니더냐.”
“…….”
“물론, 네 마음에 들어야 쓰겠지만.”
마음이 앞서 너무 부담을 주었나.
뒤늦게 걱정이 들던 찰나.
“정녕 이것이 제 이름자로 만드신 것이어요? 너무 예쁘다…….”
선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만개하였다.
그녀는 곧장 몸종에게 일러 종이와 휴대용 먹, 붓을 가져다 달라 부탁하였다.
그러곤 정회가 바닥에 그려놓은 문양을 얼른 종이에 옮겨 그렸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앞으로 제 물건마다 이 표식을 새길게요. 그럼 도처에 꽃이 피어난 것처럼 보이겠지요?”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 모습만큼은 결코 잊지 못하겠구나.
정회는 그 순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 아이를 진심으로 연모하게 되었음을.
선영을 만나는 날이 거듭될수록 그녀를 향한 마음 역시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만 갔다.
짙어진 연심은 불 위에 끓어오르는 물처럼 열기를 더해갔고, 끓어오른 열기는 정회를 점점 더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날이 커져만 가는 마음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던 정회는 비로소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 혼인하고 싶은 여인이 생겼네.”
그 결심을 입 밖으로 꺼낸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게 누군가?”
“……있네. 나중에 혼담이 정식으로 오가게 되면 자네에게도 말해주겠네.”
아니면 벗, 현덕에게 여인의 이름을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어느 댁 여식인지만이라도 알려달라는 현덕에게 정회는 끝까지 그 이름을 숨겼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 줄도 모른 채.
몇 날 며칠을 더 고민하다 드디어 아버지에게 제 뜻을 밝히던 날.
정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고 말았다.
“민성환 대감의 그 고명딸?”
“예, 아버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
“……예?”
“그 댁 여식은 이미 혼담이 오가는 집이 있단 말이다.”
순간 발밑이 꺼지듯 아득해졌다.
가슴이 죄이는 듯 숨이 막혀왔다.
정회는 굳어버린 목에 억지로 힘을 주어 겨우 이름을 물었다.
“그게…… 누구란 말입니까?”
“네 벗이 얘기해주지 않더냐?”
“벗이라니…… 누구…….”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은 곧장 소리를 입고 귀로 들려왔다.
“현덕이 말이다. 네가 가장 절친한 벗이라 말하던 서현덕. 둘이 오래전부터 혼담이 오갔다고……. 얘, 정회야! 어디 가느냐!”
정회는 그 길로 곧장 집을 뛰쳐나가 현덕의 집으로 내달렸다.
부서져라 대문을 두드리니 놀란 현덕이 그를 맞이하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이리 다급하게……. 혹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민 소저와 정혼하였다는 게 사실인가.”
“겨우 그거 물으러 이 시간에 그리 달려왔는가?”
“어서 대답하게.”
“……그러잖아도 곧 자네에게 말하려 하였는데.”
현덕은 쑥스러운지 이마를 긁적이며 곧 새신랑이 될 이의 미소를 보였다.
“뭐, 그리되었네. 자네에겐 내 직접 말하려 하였는데, 본의 아니게 다른 곳에서 먼저 듣고 온 모양이구먼. 미안하네.”
현덕의 입으로 확인한 사실은 더욱 정회의 가슴을 짓눌렀다.
정회의 가슴이 무너지는 줄도 모르고, 모든 걸 가진 잘난 벗은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일전에 말한 그 댁에 사주단자는 보냈나?”
정회는 대답도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현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돌아보면, 하여 벗의 얼굴을 본다면, 이 분노와 원망을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잘난 벗이었다.
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났고, 학문으로나 무예로나 모든 것이 저보다 뛰어난 벗이었다.
지독한 열등감은 자신이 유일하게 바라 마지않던 여인까지 벗의 차지가 되고 나서야 뒤늦게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하나 아무리 분이 차오른들 이제 와 무얼 할 수 있을까.
이미 여인은 벗의 아내가 되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그녀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것뿐.
결국 정회는 선영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순간조차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굳은 얼굴로 그들의 혼례를 지켜보았다.
시간이 흘러 정회 역시 적당한 집안의 여식과 혼례를 올리고 가정을 꾸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현덕과의 관계 역시 전과 다름없이 이어졌다.
한동안은 머리 튼 부인 함부로 만나면 안 된다는 핑계로 선영을 피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제법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아들들도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끈끈한 연을 맺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나름 괜찮아 보이는 날들을 보냈다.
“내 요즘 눈에 상당히 거슬리는 이가 있는데.”
“대감께서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어떻겠소, 대제학. 이쯤 되었으면 가문을 한번 크게 일으켜야 하지 않겠소?”
“…….”
“그깟 벗이야, 높은 곳에 오르면 더 넓게 사귈 수 있는 것을…….”
준백의 그물에 현덕이 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군.”
성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얘기를 해도 괜찮은가 내내 걱정하던 행랑아범도 이 순간만큼은 딱하다는 얼굴을 보였다.
“그때 대감마님께서 내색은 안 하셨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상심하시는 듯하였습죠.”
“어머니께서도 그 사실을 아시는가?”
“어렴풋이 알고 계시는 듯도 한데, 따로 드러내신 적은 없으셔서 쇤네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아마 어머니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니 결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단순히 역모에 휘말린 집안, 그 이상을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셨던 것이겠지.
성조는 착잡한 눈빛을 눈꺼풀 너머로 밀어내며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네. 알려주어 고맙네.”
“저, 이 이야기는 절대로 대감마님께는…….”
“걱정 말게. 자네는 내가 그리 살가운 효자로 보이는가.”
성조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려 보이고선 행랑채를 나왔다.
의문은 어느 정도 가셨으나 이야기를 듣기 전보다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둔 두 사내.
그 익숙한 이야기가 세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으니.
불현듯 박 노인의 거친 말씨가 떠올랐다.
“……진짜 빌어먹을 연이네.”
오랜 세월을 지나오며 세상만사를 꿰뚫어 보는 눈이라도 가졌는가.
그들의 관계를 이만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토록 괴로운, 이토록 원망스러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간절한.
나의 벗, 서결.
그의…… 단이.
“……원망이라도 쉬웠으면.”
쓸쓸히 혼잣말을 중얼거린 성조가 이내 발길을 돌렸다.
말을 끌고 대문을 나선 그는 오래도록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여서, 인정의 마지막 종이 울릴 때쯤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빛을 잃은 눈동자가 불이 꺼져 있는 사랑채로 향하였다.
“…….”
달이 한 뼘 기울도록 한참을 갈등하던 성조는 불씨 하나 없이 텅 빈 사랑채 안으로 들어갔다.
병풍을 거두자 역시나 작은 책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마른침을 삼킨 그는 자세를 낮추어 그 안을 살폈다.
쌓여 있는 여러 서책들을 들추던 가운데.
드디어 그의 손끝에 반으로 접힌 종이 하나가 딸려 나왔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반으로 찢은 자국이 있는 종이.
그 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복잡하게 접은 자국.
심장이 세게 뛰어 속이 울렁거렸다.
성조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접어 품에 넣고 나머지 서책을 뒤져보았다.
달빛마저 흐린 밤이라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조는 어떻게든 어둠에 눈을 적응시켜 서책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날짜와 모임의 장소, 참석한 이들의 이름, 그리고 간단한 그림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계회도(契會圖)인 듯하였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인 계회도와 다르게 그림은 모임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기록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것들을 빠짐없이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넘긴 성조의 눈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빼곡히 적힌 이름 가운데 익숙한 두 이름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정회…… 남준백.’
그리고 준백의 이름 옆에 새겨진 익숙한 문양.
원 속에 새겨진 용의 사나운 얼굴이 성조의 눈동자에 선명히 새겨졌다.
이것은 그저 단순한 계회도가 아니었다.
계회도를 빙자한 회합록(會合錄)이었다.
그들의 위험한 계획을 위한.
한 번 발을 들이면 누구도 쉬이 빠져나갈 수 없는, 진흙탕 같은 감옥.
***
며칠 뒤, 휘영청 밝은 달이 높이 뜬 어느 밤.
거대한 상단으로 보이는 행렬이 숙정문을 지난 어느 한적한 마을에 모여 있었다.
장사치라기엔 다들 지나치게 풍채가 좋아 보이긴 하였으나, 하나같이 이르게 겨울 복식을 껴입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윽고 그들 앞에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한 사내가 섰다.
사내, 결은 자신의 군사들을 향해 굳은 목소리로 명하였다.
“놈들을 맞닥뜨릴 때까진 절대로 누구에게도 너희들의 정체를 들켜선 아니 될 것이다. 행여 발각되어 적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경계선에서 적들을 만날 경우 최대한 생포하여 잡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거라.”
“예, 장군!”
결의 시선이 진위에게 가닿았다.
준백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결이 직접 갈 수 없는 만큼, 그를 대신하여 진위가 이번 작전의 지휘를 맡게 된 것이었다.
도 아니면 모가 될 이번 작전에서 진위가 짊어진 부담 또한 만만치 않을 터.
아끼는 부하 장수를 보내야 하는 상황에 결은 괜스레 마음이 무거웠다.
“일전에 보아서 알겠지만, 결코 만만한 놈들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여선 아니 된다.”
“걱정 마십시오, 장군. 반드시 놈들을 생포하여 잡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진위는 씨익 웃으며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곧 상단으로 꾸민 군사 행렬이 북방으로 향하였다.
부대는 함경과 평안으로 나누어져 북방 경계선 일대에 퍼질 예정이었다.
‘부디 저들 중 한 곳에 그 자객이 걸려들어야 할 텐데.’
결은 멀어지는 부대를 눈에 담으며 진위와 부하들의 무운을 간절히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