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휴우…… 끝났다!”
다신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단이가 둥근 보름달이 뜬 밤하늘을 보며 기지개를 폈다.
모처럼 생긴 여유 시간이라 오랜만에 다신당 청소나 하고 나온 참이었다.
무슨 중한 일이 있는 모양인지, 결은 퇴청 후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나가버렸다.
해초시에 마실 차와 내일 새벽 파루에 마실 첫 차를 미리 가죽 부대에 넣어 달라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일 아침에야 돌아올 생각인 듯하였다.
어디 가시느냐 묻는 말에 그는 군사 기밀이라 알려줄 수 없다며 미안하단 답변만 할 뿐이었다.
위험한 곳에 가는 건 절대 아니라기에 단이는 그것이면 족하다며 조심히 다녀오시라, 그리 배웅만 해주었다.
다녀오마. 그 한마디만 굳게 믿으며.
한참 쓸고 닦고 하다 보니 소란하였던 마음까지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단이는 뿌듯한 얼굴로 다신당 문을 닫고 이만 잠자리에 들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막 소세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어……?”
제 방 뒤쪽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단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조 나리!”
급히 고개를 돌리려던 성조가 그녀의 부름에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이쪽을 보았다.
말을 타고 있는 건지 제법 높은 담장 너머로 그의 얼굴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여 단이는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긴 어쩐 일이시어요?”
“그냥…… 지나가는 길에 잠깐.”
“오시었으면 대문으로 들어오시지, 도둑처럼 몰래 담장이나 훔쳐보시구.”
농담을 던져도 어째 돌아오는 웃음이 시원치 않다.
평소의 성조답지 않게 눈빛 또한 어두웠다.
달도 밝은 밤에 어찌 저리 흐린 표정을 지으시는가.
괜스레 마음이 쓰여 단이는 부러 과장되게 놀란 척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헉, 설마 서결 나리 없으신 틈을 타서 정말로 차 훔치러 오신 건가?”
그러자 언뜻 당황으로 굳어 있던 입가에서 비로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 맹랑한 것 좀 보게. 감히 나를 도둑으로 취급하는 것이냐?”
“아니면 어찌 그리 우두커니 계시었어요? 낯빛은 꼭 뭔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비장하게 하시고서.”
그 말에 성조는 씁쓸해 보이는 미소만 지어 보였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안색을 살피려 가만히 바라보니,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성조가 씨익 웃으며 훌쩍 담장을 넘어왔다.
그러곤 하는 말이.
“잘 되었다. 다동, 나랑 같이 달 보러 가자.”
난데없는 달구경이 아닌가.
뜬금없는 제안에 단이가 눈썹을 모아 올렸다.
“달이요?”
“그래. 마침 보름이라 달도 저리 환하지 않느냐. 탁 트인 곳으로 가서 실컷 구경이나 하다 오자.”
아까까지만 해도 시름시름 시들어가던 양반이 웬 달 타령이신가.
본래의 성조로 돌아온 것 같아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다.
“그건 아니 됩니다. 이제 곧 인정이 칠 것인데요.”
“그전까지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 내 말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다.”
“하오나…….”
“내 실로 오랜만에 달구경을 가고 싶은데 같이 가줄 친우가 없어서 그런다.”
“서결 나리께서 돌아오시면 함께 가시어요.”
“에이, 그놈이랑 무슨. 서결이 그런 풍류를 즐길 만한 감성은 아니지 않느냐.”
“나리께서도 자주 달을 보시…… 으앗!”
단이는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성조가 그녀를 훌쩍 안아들어 담장 위에 앉힌 것이다.
“어찌 이러십니까!”
“쉿, 다른 사람 들을라. 이런 모습을 들키면 너도 퍽 곤란하지 않겠느냐?”
“나리께서 출타하시었는데 행여나 제가 함부로 나간 것을 아신다면……!”
“아무도 모르게 다시 데리고 돌아와 주마.”
“성조 나리!”
“한 번만.”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인데.
“한 번만, 나랑 이리 놀자.”
왜 이리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까.
마주한 다갈색 눈동자에 단이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벼이 입가를 늘이고 있는 얼굴이, 그 짙은 눈빛이, 애원보다 더 간절해 보여서.
마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처럼.
곤란한 듯 눈을 깜빡이던 단이가 집 안을 바라보다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성조를 보았다.
“옳지. 착하다.”
무언의 허락을 알아챈 성조가 전보다 더 환히 웃으며 그녀와 함께 담장을 넘었다.
단이를 먼저 말에 태우고 그 뒤에 오른 성조는 바로 말을 몰기 시작하였다.
고요한 밤길에 또각또각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가 제법 평화로웠다.
‘그래, 혹 일이 생기더라도 성조 나리께서 알아서 해결해 주시겠지.’단이는 마음에 한 줌 남은 걱정을 휘 날려버리곤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말발굽 소리에 집중하였다.
이윽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근처에 위치한 동산이었다.
그리 멀리 온 것 같지도 않건만, 수풀이 우거지지 않은 덕에 주위가 훤히 탁 트여 절로 가슴이 시원해지는 경관이었다.
“와아,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
“마음에 드느냐?”
“네! 꼭 새가 된 기분이어요.”
“하하하! 겨우 이 정도 높이로 새가 된 기분이라니. 너는 상상 속 새도 아주 작은 모양이구나.”
“그만큼 좋다는 뜻이어요.”
새초롬하게 눈을 흘긴 단이는 다시 동산 아래를 보다가, 이번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확실히 평지보다 높은 곳에 올라와서 그런지 전보다 달과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공연히 팔도 뻗어 보았다.
성조는 그런 단이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데리고 오길 참 잘하였다, 그리 생각하면서.
한동안 단이를 눈에 담던 시선이 그녀의 목으로 향하였다.
못 보던 목도리.
너덜한 천으로 허술하게 목을 가리던 이전과 다르게 어여쁜 빛으로 그녀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목도리였다.
‘결이 사주었구나.’저 목도리나 머리꽂이나, 단이에게 어울리는 건 참 귀신같이 잘 고르는 결이었다.
“북귀의 뜻에 그런 의미도 있다던가…….”
“예?”
“아니다. 헛소리다. 언제까지 그리 서 있을 테냐? 편히 앉아서 좀 보자.”
성조가 적당한 곳에 풀썩 앉으니, 단이도 치맛자락을 주섬주섬 동여매고 들판 위에 앉았다.
마른 잔디가 제법 폭신하여 편안하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달만 바라보았다.
적막이 가져다준 용기일까.
아니면 환한 달빛이 부린 술수일까.
어느 순간 속을 어지럽게 하던 잡다한 것들이 사라지고, 성조의 머릿속에 남은 생각은 오로지 딱 하나뿐이었다.
털어놓고 싶다고.
마음속에 깊이 고이고 또 고여 끝내 새까맣게 굳어버린 고민들을, 이 아이에게.
……끝내 전할 수 없을 마음 대신.
“나를, 지독한 열등감에 빠트리는 이가 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성조가 오래도록 가슴에 품어왔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였다.
“한평생 뛰어넘을 수 없는 등만 내게 보이며, 그 너머의 것은 결코 볼 수 없게 하는. 그 너머의 것이 눈부신 빛인지, 아니면 비린내 나는 핏빛인지조차 알 수 없게 하는…….”
고요히, 쓸쓸히.
혼잣말을 하듯 가벼이,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나는 그 등이 미친 듯이 샘이 났다. 하여 한때는 그가 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아니.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지.”
“…….”
“하나 그러면 안 된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가 사라지면, 내 존재 가치도 사라지거든.”
단이는 잠자코 그의 고백을 듣기만 하였다.
성조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알고 있기에.
언제나 속없이 웃는 듯한 그 미소 속에 어떤 마음을 숨기고 살아왔는지 느껴졌기에.
“죽도록 원망스러운데, 그 재주와 품성을 죽도록 흠모할 수밖에 없어서…….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이라서.”
입술 사이로 쓰디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나의 주인은 결이라 할 수 있겠구나.”
이것은 처음부터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깊은 죄책감, 지독한 열등감.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나는 그 가엾은 벗을 너무도 소중히 아끼기에.
“난 그이를 위하여선, 기꺼이 목숨까지도…… 아니. 할 수 있다면 이 나라까지도 줄 수 있거든.”
단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조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새 달에 시선을 묶어두고 있었다.
한없이 처연한 저 얼굴이 바로 성조의 본모습이었다.
“누구는 할 짓이 없어 스스로를 비루하게 만드느냐 비꼬더군. 권문세가의 아비를 등에 업고 감히 누구를 부러워하느냐고. 남들 눈엔 다 가진 도련님의 배부른 투정으로 보이는 게지…….”
어쩌면 거북할 수도 있는 이 이야기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으로 결을 멀리하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안타까운 눈으로 성조를 보던 단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그러시었어요. 겉보기엔 다 가진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짚신 하나 가진 것만 못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
“그런 건 창고가 비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허해서 그런 거라고.”
달에 묶여 있던 시선이 단이에게로 향했다.
그 가운데 채 숨기지 못한 설운 감정들이 단이의 가슴까지 아릿하게 만들었다.
왕 할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을 땐 하나도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
다 가졌는데,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이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다동아.”
잠시 말을 아끼던 성조가 진지한 얼굴로 단이에게 물었다.
“알려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을 숨기고 싶다면…… 너는 어찌할 것이냐?”
익숙한 질문에 단이는 쉽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너도 내게 같은 말을 해줄 수 있느냐?”
언제나 당당하고 막힘이 없던 목소리가 옅게 떨려왔다.
“네게…… 가도 된다고.”
일전에 대나무 통 속에 든 반쪽짜리 밀서를 두고 고민할 때에 그에게 그리 물은 적이 있었다.
알려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을 숨기고 싶다면, 어찌해야 하느냐고.
‘성조 나리는 지금 두려우신 거야……. 미움을 받을까 봐.’무슨 사실을 숨기고 있는 건지, 또 누구에게 미움을 받을까 저리 두려워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밝히지 못한 사실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을 성조의 마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떤 답을 해야 그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까.
사실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답은 오래전에 성조가 알려주었으므로.
“네.”
단이는 부드럽게 입가를 늘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움을 받으시거든, 저에게 오시어요.”
“…….”
“불안으로 얼어 있던 마음이 전부 녹을 만큼, 따듯한 차 한 잔 대접해 드릴 터이니.”
크게 일렁이던 눈동자 아래 흐린 물기가 어렸다.
성조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달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 것처럼 숨이 차오르는데, 이상하게 가슴은 더 이상 답답하지가 않았다.
텅 비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드디어 가득 채워진 것인가.
알 수가 없다.
그저 온몸을 옥죄던 낡고 더러운 속박에서 비로소 풀려난 기분이다.
“참…… 너다운 대답이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성조는 푸스스 낮게 웃음을 흘리며 다시 단이를 보았다.
그의 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자책과 원망은 사라지고 한결 편안해진 마음이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마음에 드시는 대답이 아닙니까?”
“아니. 마음에 든다. 이토록 마음에 드는 대답이 없구나.”
너무 마음에 들어서, 오히려 더 슬픈 답이다.
더 이상 너를 욕심내선 안 된다는 걸, 네게 미련을 두어선 안 된다는 걸 너무 잘 알려주는 답이라서.
“어여쁜 것.”
더없이 애틋한 감정이 따스한 달빛과 함께 어우러져 그의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고마움 같기도 하였고, 혹은 미안함 같기도 하였다.
말보다 더 깊은 진심을 마주한 기분.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을지 알지 못해 얼떨떨해하는 단이를 두고서 성조는 또 한 번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곤 자리에서 일어나 단이에게 손을 내밀려다 말고 먼저 몸을 돌렸다.
“이만 가자꾸나. 약속대로 인정이 울리기 전엔 데려다주어야지.”
그 망설이는 손길을 보았으나 단이는 굳이 그것을 되묻지 않았다.
이유는 알지 못하나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성조를 위해서도.
이 관계를 위해서도.
“같이 가요, 성조 나리!”
“빨리 오거라. 뒤처지면 그냥 두고 갈 터이니.”
“너무하시어요!”
“난 원래 너무하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 척.
성조가 향하려는 길이 너무 아프지 않기만을 진심으로 바랄 뿐이었다.